[현장] 국립중앙박물관 시각장애인 전시학습 ‘오감’

국민적인 호응 얻은 ‘사유의 방’
조명·배치 노력 끝 완성했지만
시각장애인에겐 무용지물일 뿐

시각장애인 위한 프로그램에서
똑같은 모형으로 만질 수 있어
“상상했던 것과 너무나 달라요”

11월 25일 ‘오감’ 프로그램에 참여한 강태봉 한국시각장애인불자회장이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을 재현한 모형을 두 손으로 만져보며 미소 짓고 있다.
11월 25일 ‘오감’ 프로그램에 참여한 강태봉 한국시각장애인불자회장이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을 재현한 모형을 두 손으로 만져보며 미소 짓고 있다.

“부처님이 참 잘생기셨네.”

두 손으로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재현한 모형을 더듬던 시각장애인 배선애 씨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동안 불교용품점에서나 만져봤던 자그마한 불상과는 격이 다른 느낌에서 나온 말이었다. 옆에 있던 시각장애인 강태봉 씨는 오른손 두 손가락을 볼에 댄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 모형의 오른팔 장식을 만지며 말했다.

“이건 단주는 아니고 팔찌 같은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다양한 감각으로 박물관 문화유산을 경험하고 서로 생각을 나누며 공감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 학습공간 ‘오감’ 교육현장. 11월 25일 오후 박물관에서 만난 시각장애불자 강태봉·지선걸 씨와 체험에 함께한 배선애 씨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름만 들어봤던 반가사유상을 직접 손끝으로 느껴본 자리.

교육을 안내하던 윤주희 강사가 “똑같은 재료와 크기로 만들어진 모형”이라며 교육장에 배치된 두 반가사유상을 소개하자 참가자들에게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말마따나 ‘백문이 불여일감(不如一感)’이다.

반가사유상을 자유롭게 만져보는 참가자들.
반가사유상을 자유롭게 만져보는 참가자들.

국립중앙박물관은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국보 반가사유상 두 점을 나란히 전시한 ‘사유의 방’을 기획하며 국민적인 호응을 얻었는데, ‘사유의 방’은 기존 전시들과는 성격이 달랐다. 유명한 두 반가사유상을 구구절절 해설하기보다는 관람객이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경험에 중점을 뒀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박물관은 시각장애인들이 결코 찾아가고 싶지 않은 장소 1순위로 꼽힌다. 대부분 유물이 유리벽 너머에 존재하는 박물관에서 시각장애인이 체험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점자로 된 설명을 읽고 나름대로 상상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오감’은 바로 이런 고민에서 시작됐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그간의 전시가 문화유산 모조품을 만들어 단순히 만져볼 수 있게 했다면, ‘오감’은 반가사유상이라는 독립된 주제를 시각장애인이 다양한 방식으로 깊게 감상할 수 있도록 기획한 것이다.

“중생의 고통을 해결할 방안을 사유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아! 방안을 찾은 뒤 회심의 미소를 짓고 계신 게 아닐까 싶네요.”

반가사유상의 눈매와 입꼬리를 매만지던 강 씨가 진지한 감상평을 내놨다. 옆에서 “무념무상의 경지가 느껴진다”고 말한 지 씨 입가에는 어느새 반가사유상을 닮은 미소가 번졌다. 이런 시각장애불자들의 깊이 있는 감상평에 교육관 관계자들도 조금은 놀란 기색이다. 기자가 옆에 있던 관계자에게 “시각장애인 대다수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불자들이 반가사유상을 느끼는 자리를 꼭 취재하고 싶었다”고 말을 건네자 그도 취지에 공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가사유상 제작 과정도 단계별로 만져볼 수 있다.
반가사유상 제작 과정도 단계별로 만져볼 수 있다.

‘오감’은 90분이라는 제법 긴 시간 동안 진행됐다. 시각장애인 맞춤형 프로그램인 만큼 준비도 철저했다. 시각장애인이 골전도 이어폰으로 음성 안내를 들으며 스스로 체험하도록 돕고, 촉지도로 교육장 구조도 알 수 있게 배려했다. 교육은 반가사유상 미니어처를 만져보고, 벽면에 부조로 표현한 반가사유상에서 두상과 자세 등을 차례차례 느낄 수 있게 했다. 또 반가사유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단계별로 만져보는 기회는 여타의 전시와 궤를 달리할 만큼 참신했다.

반가사유상을 접하기 직전에는 △반가사유상 내부를 상상하고 이야기하기 △두 사유상의 공통점과 차이점 말하기 △자세 따라 해보기 등 단순히 만지는 것을 넘어 보다 진지하게 체험할 수 있게 점자 활동카드를 나눠줬다. 이런 순서를 거친 뒤 최종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반가사유상은 시각장애인에게 깊은 울림을 전한다.

반가사유상을 접하기 전 활동카드를 읽으며 더 진지한 체험에 나설 수 있도록 안내한다.
반가사유상을 접하기 전 활동카드를 읽으며 더 진지한 체험에 나설 수 있도록 안내한다.

“10년 전쯤인가 어느 박물관에서 신라시대 왕관 복제품을 만져보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저는 10살 때 시력을 잃어서 왕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거든요. 나름대로 상상하면서 살아온 제가 직접 만져본 왕관은 상상과 너무나 달랐어요. 난초처럼 장식이 뻗어나가는 게 얼마나 멋있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반가사유상도 마찬가지네요. 입체적인 유물을 더 경험해보고 싶어요.”

한국시각장애인불자회장이기도 한 강 씨가 반가사유상을 접한 뒤 감격하며 말했다. 박물관 유리벽 너머의 세상이 별 의미 없는 시각장애인에게 ‘오감’이 더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셈이다.

강 씨는 “반가사유상의 실제 크기를 알고 나니 그 시절에 만들었다는 게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며 “불자로서 두 손으로 부처님을 만지려니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상상만 해오던 걸 경험할 수 있어 특별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반가사유상 앞에서 자세를 따라 해보는 참가자들.
반가사유상 앞에서 자세를 따라 해보는 참가자들.

불자인 지 씨 역시 “반가사유상이 오른쪽 다리를 접어 올리고 연화좌대에 앉아계신 걸 오늘에야 알게 됐다”며 “이름만 들어보고 상상해오던 것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라고 말했다.

장은정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과장은 “사유의 방은 시각장애인이 느낄 수 없어서 장애 유형별 맞춤형 프로그램인 오감을 기획했다”며 “하나의 주제를 단계별로 심화했기 때문에 기존의 시각장애인 교육이 뷔페라면 오감은 파인 다이닝이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9월부터 시작된 국립중앙박물관 ‘오감’은 12월 12일부터 매주 화·수·목요일로 날짜를 변경해 내년 2월 1일까지 이어진다. 시간은 1회차 오전 10시, 2회차 오후 2시. 박물관 누리집과 교육 플랫폼 ‘모두’에서 3일 전까지 예약하면 된다. 온라인 신청이 어려운 경우 전화로도 가능하다. 02-2077-9301

교육장 벽면에 부조로 표현된 반가사유상.
교육장 벽면에 부조로 표현된 반가사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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