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일체 만물만생이 이심전심으로써 다 연결돼 있다

모두 안에다가 입력을 해서 바깥 물질세계로 나와서 
둥글게 응용하도록 이렇게 한다면
그게 법이 돼서 여러분을 지켜줄 것이고
어떠한 걸림이 오더라도 걸리지 않고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성 삼보에 귀의한다고 하시죠? 그 이름만 들어도 자성 삼보라는 그 뜻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아실 겁니다. 나의 움죽거리지 않는 근본과, 움죽거리지 않는다 하면은 또 이상스럽게 듣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수레가 돌아가도 중심이 끼워진 주 중심 봉은 움죽거리지 않습니다. 힘만 배려해 줄 수밖에 없는 거죠. 힘만 배려해 준다 이겁니다. 움죽거리지는 않는다. 수레가 돌아갈 뿐입니다. 그와 같이 인간의 근본도 부동자세한 그 뜻으로서의 힘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힘을 배출하는 반면에 우리는 시공을 초월해서 고정됨이 없이 항상 찰나찰나 화하면서 바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삼보에 귀의한다는 거, 그 움죽거리지 않는 힘을 배출해 줄 수 있는 그 자(自)의 근본에서 마음을 내는 것이 법이니까요. 마음을 내는 것이 법입니다. 자성 삼보라는 것이 불법승, 그리고 승은 움죽거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에 따라서 움죽거린다. 이 세 가지가 바로 자기 자성한테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계정혜는 어디에 붙어 돌아가는가. 자성 삼보에 귀의했으면 바로 자기가 행할 수 있는, 들이고 내는 행을 어떻게 해야만이 계라고 할 수 있을까. 항상 제가 이런 말을 하죠. 들이고 내는 것도 네놈이고, 움죽거리는 것도 네놈이요, 보는 것도 네놈이요, 듣는 것도 네놈이요, 가고 오는 것도 네놈이요, 똥 싸고 밥 먹는 것도 네놈이요, 자는 것도 네놈이요, 모든 게 일거수일투족이 다 네놈이 하는 거다. 나무가 바로 제 뿌리가 있기 때문에 제 나무가 있듯이 말이에요. 그래서 그 움죽거리는 게 전체가 다 그러하니 모든 거를 즉 정에다가 모아야 진짜 정이 되죠. 그렇기 때문에 ‘계향’ 할 때에도 그렇고 ‘계정혜’ 할 때도 그렇고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자신에게 누가 되지 않게 첫째는 해야 하는 것이 부처님 도량에 누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고, 은사나 사제 사형한테 또 누가 되지 않는 겁니다. 스님네들은 물론이요, 여러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각자 누가 되게 한다면 가정이 다 누가 되게 되는 거죠. 안 그렇습니까? 한 가정에 한 사람이 누가 되게 한다면 가정이 전체가 누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까지도 자식까지도 말입니다. 

그러하니까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고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도 잘 들어오든 못 들어오든 내 탓으로 돌려라. 안에서 일어나는 것도 어떠한 용도에 따라서 일어난다 하더라도 내 탓으로 돌려라. 남편을 원망하지 말고 아내를 원망하지 말고, 자식을 원망하지 말고 부모를 원망하지 말고 모든 거를 내 탓으로 돌려라. 왜냐하면 내가 못났든지 잘났든지 내가 이 세상에 났기 때문입니다. 내 탓으로 돌려라 하니깐 “내가 뭐 잘못한 게 있어야 내 탓으로 돌리지.” 이렇게 말씀들 하시겠지만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는 것이지, 내가 없다면 무슨 상대가 있을 것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내 탓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거를 내 탓으로 돌려서 깊은 마음속에다, 근본에다가 놔서 그게 입력이 돼서, 다시 입력이 된 게 바깥으로 나오게 되면 법이요, 그냥 머리로 생각해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것은 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마음 도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아주 입이 무거워지고, 말이 적어지고, 그렇게 하면서도 이 안으로 매사를 굴려서 거기다 맡기기 때문에 입력이 돼 가지고 다시 현실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로 법이 되니까 그대로 걸림이 없다 이런 뜻입니다. 

정신계를 거쳐서 물질계로 나오니까 그것은 걸림이 없지만, 물질계에서 물질계로 그냥 나간다면 그건 항상 걸리고 사고가 생기고 이탈을 하게 되고 망종이 생기고 불화가 생기고 하니 온통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다 대치를 하시렵니까? 여러분이 이 마음 하나를 잘 해서 안으로 굴려서 바깥으로 나오게 할 수 있는 바로 그런 법신이 되신다면 그 생활은 물론이거니와 여러 가지로 편리한 점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이 세상 일체 만물만생이 이심전심으로써 다 연결이 돼 있습니다. 왠 줄 아십니까? 여러분 몸속에도 천차만별의 모습이 바로, 여러분이 수억겁을 거치면서 진화해서 창조됐다는 그 사실이 여러분 몸속에 바로 지나간 세월의 자기 모습들로 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모습이니만큼 그 모든 물질적인 생물들이 나 아님이 없죠. 

그래서 보이지 않는 공법(空法)에…, “보이지 않는 공법에” 이러는 건 여러분이 육안으론 볼 수 없는 이런 세계 속에서 항상 그게 통신이 되고 있죠. 그래서 여러분이 각자 자기만 아는 비밀이 있다고 하지만 비밀은 없죠. 물질세계에서는 그 비밀이 있다고 하지만 무의 세계에서는 비밀이 없습니다. 그래서 비밀이 없기 때문에 비밀이 없는 그 자기가 하나하나 해 나가는 그 자체가 바로 자동적으로 입력이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그 계향에 의해서 모두 첫째, 안에서 일어나는 거나 바깥에서 용도에 따라 들어오는 거나, 가정에서 일어나는 거나, 모두 자식 부모지간에 일어나는 거나 모든 걸 거기다가 입력을 해서 스스로 나오게 만들어야 화목해지고 한마음으로 돌아가지, 거기다 넣질 않고 그냥 입으로 “어유, 저놈의…, 차라리 얼른 돌아가셨으면 좋겠어!” 이러죠? “어유, 저놈의 자식! 저거 차라리 눈에 안 띄었으면 좋겠어.” 이러는 말이 선선하게 나가죠. 

이거는 과거로부터 쭉 인연을 맺어서 온 모두 한 가족인데 그렇게 해서 됩니까? 그럭한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니까요. 그래서 모두 안에다가 입력을 해서 바깥으로 물질세계로 나와서 둥글게 응용하도록 이렇게 한다면 모두 그게 법이 돼서 여러분을 지켜 줄 거고, 여러분 길이 험악하더라도 험악지 않게 되고, 어떠한 게 걸림이 오더라도 걸리지 않고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정’ 그렇게 하신다면 정향이 됩니다. 한데 모아서 심봉을 완전히 뿌리를 박았기 때문에 어디 내세워도 흔들리지 않게끔 돼 있습니다. 첫째, 계를 안으로 잘 지켜야만 되지 내가 바깥으로 아이고, 지키려고 아무리 해도 오계도 못 지켜요. 그러니까 그렇게 바깥으로 떠돌게 된다면 이거는 정에 들지를 않아요. 이 중심이, 심봉이 완벽하게 자리를 잡지 못했기 때문에 그건 들이고 내는 데에 손상이 오죠. 

이 뿌리가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분이 살아나가시는 데에 어떤 게 닥치면, ‘아이고!’ 하고 겁이 턱턱 나고 그냥 안절부절을 못 하게 되죠. 안에서 일어나는 것도 그렇고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도 그렇고, 자식들의 일이 일어나는 것도 그렇고, 부모의 일이 일어나는 것도 그렇고 그냥 갈팡질팡을 하죠. 

그러면 이 주인공 찾는 것도 말입니다, 그냥 아리송하게 되죠. “그거 불러 봤던들 그렇더라.” 이러구요. 하 참 내, 기가 막혀서. 하하하. 그러니 말입니다, 이게 (가슴을 짚어 보이시며) 완벽하게 서서 자리를 완벽하게 잡아야 들이고 내는 대로 입력이 되고, 입력이 되면은 바로 즉시 현실로 나오고 이렇게 되죠. 이게 돌아서 말입니다. 그런데 머리로다 굴려서 아는 건 아는 게 아니거든요. 실천을 한 발짝도 떼어 놓지 못하거든요. 그러니까 발버둥이 치죠. 

인생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 것도 모르고, 그냥 지금 내가 무엇을 어떻게 중심을 잡아서 하는 것도 모르는 거예요. 어떻게 모든 거를 대치할 수 있는지 그것조차도 아리송한 거죠. 그래 가지고야 어떻게 이 우주를 삼킬 수 있는, 과거 현재 미래 삼천대천세계를 삼킬 수 있는 공부를 할 수 있겠습니까? 초발심에서 내가 완전히 완벽하게 자리를 잡아야죠. 

사람들 사는 것도 그래요. 내가 집을 지어서 그 안에서 살면서 완전히 자리를 잡아야 가정이 화목하고 다 편리하고 식구들도 다 편리하게 살 수 있지, 가정이 자리가 잡히지 않았는데 어떻게 화목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걱정 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그렇듯이 내 몸속의 생명들도, 중생들도 다 한마음으로 자리가 잡혀야 이게 뿌리가 내리고, 뿌리가 내려야 바로 여유가 있게 유유하게 열매를 맺고, 바로 거기에 무르익어서 그것을 남들을 다 주고, 주면서도 항상 거기에 중심은 되남아 있기 때문에, 그 불종자가 되남아 있기 때문에 근기로써, 모든 지혜로써 들이고 내는 데에 손색이 없고, 그렇게 돼야만이 이제 정에 들었다고 합니다.  

정에 들면 이 뿌리가 완벽하게 내렸기 때문에 바로 어딜 가도 내 자리요, 누구를 봐도 나 아님이 없음이요, 어떤 아픔을 봐도 내 아픔 아님이 없음이요, 어떠한 벌레를 봐도 내 생명 아님이 없음이요, 모든 것이 나 아님이 없으니 어찌 자비가 그 속에서 안 나오리까 이겁니다. 가짜 사랑이 아니라, 껍데기 사랑이 아니라 아주 진실한 자비! 그 자비만이 들이고 내고 안에서 내고 들이고, 여러분도 항상 그렇게 생활하시고 계시죠? 보면 생각나고 생각나면 움죽거리고, 이게 들이고 내는 겁니다. 그런데 이 들이고 낼 때에 지혜로운 마음으로 들이고 내느냐, 아까 말대로 말입니다. 지혜롭지 못하게 머리로 그냥 굴려서 작용을 하느냐, 들이고 내는 데 지혜롭게 작용을 하느냐 여기에 따라서 천지차이입니다, 이게.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그랬습니다. 왜? 새하고 둘이 아니기 때문에요. 내가 새가 된다면 새가 그냥 가만히 내려서 앉죠. 내가 그렇게 내려앉고 싶으니까요. 그러나 여러분이 그렇게 공부를 못 한다면 지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를 본다 하더라도 그렇고 우리 지구만 있는 게 아닙니다. 다른 혹성들도 많죠. 또 우주는 우주대로, 은하계의 모든 별성들의 때가 다 지나면은 껍데기가 저절로 떨어지고 알맹이만 추려서 바로 블랙홀이 생산을 하죠. 이 모두가 사람이 살고 있는 섭리와 똑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게 문제냐. 여러분이 이렇게 마음 도리를 공부하시게 된 것은 우리가 하고 싶어서도 아니 되고 하기 싫어서 아니 해도 안 되는 이러한 도리에 벌써 이 천지 간의 이치가 있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너, 이 공부를 해서 모든 걸 대치해라.’ 이런 소임을 여러분한테다 준 것입니다. 이게 그냥 의도적으로 그냥 우연히 이렇게 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이건 자동적으로 이렇게 되게 된 인연들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거를 어떻게 대치를 하느냐. 안에서 내 가정에서 내 몸과 가정과 모든 내 자녀들과 부모와 모든 이런 대치를 할 수 있는 그 마음과 더불어, 내 몸뚱이 속에 있는 이 생명들도 다 한마음이 되고, 모두 한마음이 됐다가 벌어지면 입자로 화해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조절하죠. 또 어떠한 문제가 생겼어도 모두 대치하고 말이에요. 의사가 될 때는 의사가 되고, 관세음이 될 때는 관세음이 되고, 지장이 될 때는 지장이 되고, 칠성이 될 때는 칠성이 되고, 용신이 될 때는 용신이 되고, 지신이 될 때는 지신이 되고, 마음대로 거기서 작용을 하게 되는 거죠. 입자도 똑같은 그 위치로 하는 게 아니라 원하는 대로 그냥 모두가 천차만별로 갈라져서 활용을 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 것이 완벽하게 되게끔 하기 위해서는 이 자성 삼보가 계 정 혜를 어떻게 해야만이 이게 완벽하게 돼서 해탈, 해탈지견향까지 이르게 되느냐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지금 과거 현재 미래 이 삼세를 우리가 뒤로 돌아가려면 돌아갈 수 있고, 앞으로 가려면 갈 수 있고, 현재도 공해서 어떤 걸로라도 내가 될 수 있는 그런 여래가 돼야 이 우주의 태양력이나 모든 문제들, 지구 저 태양 모두, 달이나 별성들이나 우주 블랙홀, 그 별성의 문제들도 대처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제일 큰 별을 블랙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 왕벌 하나가 알만 자꾸 까고 그 곁의 벌은 전부 그 왕벌 하나를 따라서 다 살듯이 그런 거죠. (중략)

여러분이 다 잘 아시죠. 지구의 지형이 벌어졌다가 오므라졌다가 다시 방향을 바꾸고 이렇게 지형이 변경이 된다는 사실은 여러분이 알죠? 이 변경이 되는 것도 순조롭게 잘 리드해 나가면서 변경이 된다면 이거는 걱정이 없는 겁니다. 그건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움죽거린다는 겁니다. 흙도 살아 있고 물도 살아 있고 돌도 살아 있고, 다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움죽거리는 거는 하다못해 일본이라든가 어디 중공이라든가 미국이라든가, 어디든지 어떠한 손색이 있다 하더라도 이건 사람이 숨을 쉬고 살 수 있게끔 어떤 게 변경이 된다 하면 그거는 상관이 없는 거지마는 멸망한다는 소리는 그건 있을 수가 없지 않으냐. 멸망 자체가, 아니, 말이 거기에 붙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 지수화풍이 전부 불종자인데 어떻게 멸망이 됩니까? 우리가 애당초에 생명이 생긴 것이 지수화풍으로 생겼는데 지수화풍이 있기 때문에 우리 생명이 생겨서 이렇게 나무도 생명들도 이렇게 생겨 가지고 진화돼서 사람까지 됐는데, 바탕이 없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멸망이 됩니까, 이런 소리입니다. 

그러면 그 멸망이다 하는 것도 우리 마음공부 하는 분들이 다 이렇게 넓고 지혜롭게 대처해 나갈 수 있는 마음들이 필요합니다. 금성이나 화성이나 또는 목성이나 천왕성이나 이런 데는 전부 생명체가 없죠. 없다고 하죠? 그러나 물이 있거나 흙이 있거나 하면은 바로 그것이 공기를 일으켜서 생명체가 생기게끔 돼 있습니다. 아주 펄펄 끓는 물이라고 해서 생명이 없는 게 아닙니다. 펄펄 끓는 물이 있어서 흐르면 흐르는 대로 완화되고, 종합이 되고 또 이게 한데 합쳐져서 생명이 생기게끔 돼 있는 거죠.  

이 모두가 이렇게 심오하고 광대한, 이 법을 불법이라고 하죠. 이 불교라는 단어가 얼마나 광대하고 미묘한지 모르는 것입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이게 머리 깎은 사람만 불교라고 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일체 벌레로부터 물, 뭐 지수화풍이 더불어 전부 다 불(佛)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불입니다. 불 아닌 게 하나도 없지요, 풀 한 포기까지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자라면서, 자기가 자라면서 살아가면서 ‘아휴, 참 이건 아쉽다. 요건 요렇게 됐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진화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까지도 올라왔구요. ‘난 서서 다녔으면 좋겠다.’, ‘난 제대로 먹을 만한 걸 못 먹고 이렇게 사는 것도 참 힘들다.’ 해서 모두 여러분이 서서 꼬리를 뗀 채 다니지 않습니까? 그 꼬리가 붙었던 자리는 아마 모두 그대로 있을 겁니다. 그리고 과거에 드러내고 살던 그 모습들이 여러분 육체 안에 다 들어 있을 겁니다. 아주 생각하면 심오하죠.

그래서 아주 흰 사람이 있고 붉은 사람이 있고 또는 검은 사람이 있고 누런 사람이 있고 이런 것도 지역에 따라서 다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스스로서 다 지역별로 분포되어 살고 있고, 이 사과도 큰 거 작은 거 썩은 거 골라 놓듯이 끼리끼리 모이는 거죠. 그래서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러한 지망년도 당하는 거죠. 왜냐하면 굵은 거는 추리고 썩은 거는 모두가 퇴비로 들어갈 테니까 말입니다. 다시 해서 다시 나오게 되니까, 용광로로 들어가야 되니까요. 

그게 그렇게 어느 지역이 전부 타 죽게 생겼다, 굶어 죽게 생겼다 이러는 원인도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냉정하게 판단한다면 말이에요. 불쌍하게 만든 것도 자기네들이요, 불쌍하게 된 것도 자기네들이요, 다시 용광로에 들어가서 재생이 되는 것도 자기네들입니다. 아주 죽는 게 아니에요. 그런 데서도 추리는 거지요. 다시 추려서 다시 넣고, 다시 재생해서 나올 때 아, 여기로 갈 거냐 저기로 갈 거냐 이렇게 추리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렇게 되는 거는 그냥 그대로 세상 변동이라고 하고 우리가 그저 닿는 대로 돕고 이렇게 살지마는, ‘네가 죄를 지었으니까 네가 그렇게 된 것도 당연하지, 뭐.’ 이렇게 하질 마시고, 이런 거를 이렇게 알았으면 더 불쌍히 생각해서 더, 만약에 강도라 할지라도, 도둑놈이다 할지라도 도둑질을 왜 하게 됐느냐는 거죠. 강도질을 왜 하게 됐느냐부터 알아서 불쌍히 생각해서 선처를 베푼다면 다시 요다음에 태어날 때는 아주 과감하게 큰 인물로다가 태어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배고파서 죽는 데를 보시를 해서 보낸다거나 위문을 한다든가 뭐, 이런 것도 각자 이렇게 하죠. 그런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죠.

그렇지마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우주적으로 이게 지구가 망하면 다른 데도 다 지장이 있고, 다른 데도 다 한번 뒤집어져야 되는 문제가 생긴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인종이 많으면 많은 대로 또 갈라서 살고 이러면 되지, 넓은 데로 가서 살고 그러면 되지 아, 그러한 요량이 없어 가지고야 어떻게 이 세계를 대치해 나가겠습니까? 그리고 세계인으로서 연구를 해서, 이 마음 세계의 연구로써 다 어떠한 거든지 대처할 수 있다 이런 겁니다. 

그러니까 지구도 이제는 집이 헐어져서 우리가 보수를 해야 할 텐데 보수를 하게 되면 어떻게 보수를 해야 되느냐. 우리가 보수를 못 한다면은 속수무책으로 그 집이 헐어져서 우리는 죽는다 이런 거죠. 그러니까 이 마음의 도리가 아니라면 보수를 할 수가 없습니다. 할래야 할 수도 없고 또 보수를 하고도 에너지가 없어서 어떻게 살아나가느냐는 거죠. 우리 마음의 도리가 아니라면 허공에서 에너지를 흡수할 수가 없습니다. 또 그러면 어떻게 그 도리를 알아서 하느냐? 이런 것도 우리는 과학자들한테 과학자들이 내가 돼서 연구를 하게끔 베풀어야 합니다. 

즉 말하자면 마음은 체가 없어서 백도 되고 만도 되고 천도 되고 이렇게 그 개수가 따로 없이 사람이 열이라면 열 개도 되고, 백 개라면 백 개가 되고, 만 개라면 만 개가 되고 이렇게 분류돼서 천차만별로 되는 거니깐요. 그래서 이름 없이, 함이 없이 하는 법이 이 법입니다. 그래서 딴 사람이 연구를 하더라도 연구하는 사람에게 모두 그렇게 배출시켜 주고 베풀어 준다면은 그것이 눈을 뜨게 하고, 다리를 한 짝 못 들었던 거를 들게 해서 걸음을 걷게 하고 눈으로 보게 하고 이런다면 한계 없는 이 세상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그런 미묘한 법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모두 “못 한다, 못 한다. 우린 그렇게 되면 멸망해서 죽지.” 이렇게만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겁니다. “멸망해서 죽을 테니깐 우리 굴이나 파고 들어가자.” 하하하. 그냥 몇 달 먹을 거, 몇 해 먹을 거 가지고 들어가서 우리나 살자 이러면은 벌레밖에는 못 됩니다. 땅속에 사는 벌레밖에는 못 돼요. 그리고 땅속도 땅속입니까, 어디? 지구가 어떻게 생긴 건데, 지금 공중에 물 위에 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땅속으로 들어가 봤던들 위냐 아래냐 이것도 없는 건데 거기 들어가 봤던들 뭘 합니까? 거기 들어가면 살 것 같습니까? 하하하. 만약에 지구가 망가진다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소소한, 죽기 싫어서 소소한 생각은 마시고 영원한 참다운 나가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하고, 영원한 참다운 나가 있어서 종자 하나를 가지고도 세계를 다 먹이고 그 종자가 되남아서 또 세계를 다 먹이고, 영원하도록 먹일 수 있는 그 광대한 법을 우리가 체득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얘기한 걸 종합해서 말씀드린다면요, 이 공부를 하는 분들은 어떻게 하든지 바깥으로 끄달리지 말고 안으로, 바깥으로 끄달려서 이론적으로 다 안다고 하지 마시라 이겁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묵묵히 한 발짝을 떼어 놓을 때에 그게 법이 돼야 하고, 그게 실천에 옮겨져야 됩니다. 이게 그런 공부입니다. 그래야만이 이 우주에 관한 건도, 우리 지구에 관한 건도, 우리 세계적인 건도 모두 대처해 나갈 수 있는 겁니다.

※위 법문은 대행 선사 법문집 ≪허공을 걷는 길≫ 중 1995년 12월 17일 정기법회 법문의 일부를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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