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걸 제일이라고 내세울 게 없는 것이 부처님 법입니다

환경에 따라서 내 앞에 병고가 닥쳤으면 닥친 대로
그저 몰락 넣어버리고 태워버리고 마는 겁니다.
몰락 넣어버려! 몰락 그냥!
뛰어넘어! 뛰어넘으면 되는 거라.

여러분, 이렇게 같이 한자리를 하게 된 것을 참, 끝 간 데 없이 간다 할지라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한마음 자리에 조금도 에누리 없이, 미래도 과거도 없는 오늘에 한자리를 하게 되는 도리, 또 한자리에서 굴리는 도리, 또는 그 멋진 자유권을 가진 한자리의 도리, 이런 걸 가르치기 위해서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을, 내가 그렇게 걸어온 그 길, 문패도 번지수도 없이 걸어온 그 길 말고도 시간과 공간을 따지고 드는 이 현실 세계에서 근 삼십 년 동안이나 이렇게 여러분하고 씨름을 했습니다. 눈이 오든 비가 오든 조금도 마다 안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좀 더 이 공부를 하게 되면, 깨닫고 안 깨닫고 그걸 떠나서 자기를 자기가 진실로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옛날에 약초를 캐는 착한 나무꾼이 있었습니다.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서 약초를 캐면서도 항상 그 어머니를 잊지 못한 채, 나오면 몇 며칠이 걸리니까, 한 달도 걸리고 그러니까 그 어머니를 위해서 항상 마음의 기도를 하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약초를 캐다가 그만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져서 아주 몹시 다쳤습니다. 산골에서 다쳐서 내려올 수도 없고 그러니까 엉엉 울었습니다. 울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어느 대선사가 나타났습니다. 나타나서 하는 소리가 “너 나기 이전 너의 아비는 지금 네가 다친 꼴을 보고 울고 있구나. 아비는 울고 있고 아들은 아파하는구나.” 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하고 울다가 말고 여쭈니 “바로 네가 생기기 이전의 너는 지금 울고 있는 그 마음이니라. 네 몸이 아파하면 네 마음이 의욕이 없어지는 것도 네 아비가 자식을 위해서 의욕이 없어지느니라. 네가 의욕을 잃지 않는다면 그 아비도 의욕을 잃지 않느니라. 그것은 왜냐하면 아비는 더하고 덜함이 없기 때문에 너 하는 대로 따라가기 때문이니라.” 이렇게 말을 해 줬습니다. 그러고는 간 곳이 없어졌으니, 그 말을 들은 그 약초 캐는 나무꾼은 그러자마자 일어나도 다리가 안 아프더랍니다.

그래서 그 나무꾼은 인제는 나무를 하러 다니든 약초를 캐든, 어떠한 짐승이 있든 불쌍한 걸 보든 항상 창문을 통해서, 이 두 눈을 말하는 겁니다. ‘창문을 통해서 아버지가 똑똑히 보시고 이것 좀 살려 주셔야 되겠습니다.’ 했습니다. 창문을 통해서 본다고 했습니다. 이거는 창문에 지나질 않아. 눈이 아니야. 창문에 지나지 않고 그 창문 속에는 진짜 눈이 있어. 그래서 그 아비의 눈이라고 했어요. 아들은 자기의 눈은 눈이 아니고 창틀이고, 그 창틀 속에는 바로 아비의 눈이 시퍼렇게 있다고 생각을 했거든.

그러던 중 어느 날 부랴사랴 약초를 캐러 또 가다 보니까 덫에, 이렇게 깊이 흙을 파고선 덫을 놓고 풀을 덮어 놓지 않습니까? 그 풀을 딛고 가다가 산돼지가 그만 거기 덫에 걸렸단 말이야. 그래 빠졌지? 빠졌는데 이 나무꾼이 가다 하는 소리가 그걸 보고 “아버지!” 대답이 있겠습니까? “아버지!” 그러니까 “왜 그러느냐?” 자기가 그런 겁니다. “저 돼지가 덫에 걸려서 저렇게, 저 생명도 생명이거늘 어찌 그냥 보고 가겠습니까. 보지 못했다면 모르지마는.” 하니까 “그럼 네 맘대로 살려 주려무나.” 했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이렇게 자기가 또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하고선 저 떨어진 나뭇가지 기다란 걸 가지고 가서 거기다가 이렇게 넣어 놨습니다. 그러니까 돼지는 거기에서 그걸 밟고 나왔습니다.

예전에 산돼지는 사람도 잡아먹고 그랬답니다. 그러나 나무꾼은 산돼지더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비가 너를 살려 줬거늘 앞으로 네 모습을 벗고 사람이 되려면 사람을 해치지 마라.” 그랬습니다. 돼지가 고개를 끄덕끄덕했습니다. 그래서 그 돼지는 그 후에 산에서 으뜸가는 맹수인 사자가 됐습니다. 사자가 됐는데도 글쎄, 돼지는 그때의 그 나무꾼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모습을 바꿔서 맹수가 됐는데도 그게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나무꾼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무진 노력을 하다가 나중에는 자기 몸까지 그 나무꾼에게 바쳤다는 얘깁니다. 그건 뭐냐? 그 나무꾼을 못 잊은 그 마음과 이 맹수의 마음은 항시 둘이 아니어서 그만 이 모습도 벗고, 이 모습을 벗으니까 아주 이 세상에서 으뜸가는 대인이 됐다는 얘깁니다. 대인이 돼서 어진 정승으로서 중생들을 많이 제도를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말하고 싶은 거는 딴 데 있어서 그 말을 했습니다. 살아나가면서 여러분이 몸이 아프거나 또는 어딜 다치거나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거나 이런다면 살 의욕이 없어지는 듯합니다. 여러분을 볼 때 참 내 가슴이 아플 때도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만 고치는 게 부처님 법인가?” 이러지마는 그게 아닙니다. 보석이나 뭐나 다 가지고 있어도 자기가 죽게 된다면 아무 의욕도 없어지는 겁니다. 그 얼마나 묘합니까? 그러니 자기 몸을 자기가 얼마나 사랑하는 겁니까? 야, 몸뚱이가 좀 아프다고 하면 그 마음은 얼마나 의욕이 없어지고 슬프고 눈물이 나고 이러는지 모릅니다. 생각 한번 해 보세요, 모두. 얼마나 자기를 자기가 사랑하나.

그런데도 믿지 못하는 겁니다. 자기가 아프면 서로 같이 아파 주고 울면 같이 울어 주고 의욕이 없어 하면 같이 의욕이 없어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를 자기가 못 믿어서, 자기를 자기가 업신여기고 못 믿고 따르지 않고 이러면서도 저 먼 데 부처님이 계시다 하면 만날 그냥 ‘부처님, 날 좀 도와주시오. 이 몸 아픈 것 좀 낫게 해 주시오.’ 하고 빌곤 합니다. ‘우리 남편 낫게 해 주십시오. 우리 남편 잘되게 해 주시오. 자식 잘되게 해 주시오. 나 몸 좀 안 아프게 해 주시오.’ 하고선 빌고 있다 이 소립니다. 그러면 얼마나 멉니까, 그게?

나에게 참 사랑하는 바로 내 자부처가, 자신(自神)이 계신데도 불구하고, 일체 신이 바로 한마음에 계신 거를 알면서도 그것을 못 믿고 그렇게 빙빙빙빙 돌아간다면 앞으로 어떻게 내 몸과 내 가정 또 내 국가, 사회 이런 거를, 내 자식을 어떻게 길러 나가면서 에너지를 불어넣어 줄 것입니까? 지금 현재뿐만 아닙니다. 세세생생에 끝 간 데 없이 말입니다. 끝 간 데 없이, 수억겁 광년이라 할지라도 일 초에 달한다는 얘깁니다.

요기에서 한 가지 더 얘기하겠는데, 천칠백 공안이라고들 얘기합니다. 그럼 화두가 그렇게 많다는 얘기죠? 그런데 그 화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미래도 생각하지 말고 어저께도 생각하지 말고 내일도 생각하지 말고 오늘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한 발 한 발 걷고 돌아가면서 생활을 할 때에 몇 가지 생각이나 하십니까? 생각도 많고 가지가지 일도 많고, 사람의 살림살이는 말도 많고, 저 별이 수효가 없듯이 인간의 살림살인 그렇게 말이 많고 그렇게 갖가지로 고정됨이 없이 그렇게 많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그 갖가지로 많은 것이 수차에…, 우리가 요렇게 한번 표현을 해 볼까요? 다섯 가지로 표현을 해도 좋습니다. 올해는 굴왕신이 들었다. 나는 업보가, 인과응보가 지금 여기 이렇게 많다. 참, 업보가 많아서 짊어진 채 팔자가 이 모양 이 꼴이라고 하는 그 날짜가 있다고 합시다. 달수가 있고 햇수가 있고 그렇다고 합시다. 그럼 여기 또 한 가지 있습니다. 복을 타지 못해서 이렇게 가난하다 이런 게 있습니다. 병고 액난에 끄달린다. 이런 게 다섯 가지가 있다 합시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가 빙글빙글 이렇게 돌아갑니다, 우리가 이 다섯 가지로 표현한다면. 

아, 이게 마음은 체가 없는 겁니다. 굴왕신이나 삼재나 이런 것도 무슨 내놓을 것이 없는 겁니다. 삼재가 들었다는데 여러분이 내놓으신다면 내가 삼재를 톡톡 다 털어 드리겠어요. 업보가 많으시다면 가져오세요, 내 털어 드릴게. 병고 액난이 많다면 가져오세요, 털어 드릴게. 굴왕신이 들었다면 털어 드릴게요. 그거 다섯 가지만 비유한대도 우리가…. 한마음이라는 거는 체가 없어서 한번 훌떡 넘어간다면 일 초도 걸리지 않아. 그렇다면 굴왕신이나 업보라든가 병고 액난이 그렇게 고정되게 나에게만 딱 박혀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 박혀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예 그 병고 액난을 다 겪어야 합니다. 팔자 운명을 다 겪어야 돼. 그리고 삼재팔난을 다 겪어야 돼.

그러나 그 마음이 말입니다, 아까 얘기한 거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고정된 게 아닌 것이 공했다는 거다. 그러니까 훌떡, 이걸 지금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여러분이 여길 지금 걸어오셨습니다. 걸어오시다가 고정되게 딱 서서 있었습니까, 굴왕신이 들었다고? 또 병고 액난이 들었다고 거기 꼭 고대로 서서 있었습니까? 그냥 이렇게 걸어왔습니다. 걸어오듯이 한 발짝 떼 놓으면 굴왕신 그 한 구절이 훌떡 넘어져. 이게 바로 한생각에 그 굴왕신이 그냥 뛰어 넘어진다는 겁니다. 은산철벽이라 그러는 것도 그 한생각에 달렸다 이 소립니다. 그러면 이렇게 한 발 떼어 놓을 때 그건 벌써 고정되지 않으니까 거기 닿지도 않았어. 굴왕신이라는 이름조차도 없을 정도로 휘딱 뛰어넘었다. 또 한 발자국 뛰어넘었다. 그러니 뒤도 벌써 한 발짝 뛰어넘었으니까 뒤도 없지, 앞은 가지 않았으니 없지. 이거는 그저 신발 밑에, 발밑에 그저 그냥 훅딱훅딱 훅딱훅딱 뛰어넘었으니 무슨 팔자가 거기 담기며, 거기 붙었으며, 삼재팔난이 거기 붙었으며, 또는 굴왕신이 거기 붙었겠습니까, 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달린 거라. 그냥 간단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또. 아주 심사숙고해서 생각하세요. 간단하지 않으면서도 아주 쉽고 간단한 겁니다. 그러니 ‘깨닫지 못해서 중생이다’ 이런 생각도 마시고, 깨닫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대로 법이기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의 그 뜻을 믿는다면, 믿는다면 모든 걸, 아까 얘기했듯이 “아버지! 저거 그냥 보고 가겠습니까?” 한다면 그냥 보고 못 가고, 저거 그냥 보고 간다 이러고 그냥 가면 그냥 가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자유스럽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그 미지의 보이지 않는 세계의 맛을 보지 못해서 그러시는데 요렇게 한 접시에다가, 요것도 표현입니다. 아까 얘기한 거와 똑같은 얘깁니다. 접시에다 갖은 과일을 다 깎아 놓았습니다. 포크를 들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생각할 때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 포크냐, 이거냐?” 하니까 “포크도 아니고 이 과일도 아니다.” 이렇게 됐습니다. 그러면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닌 데서 내가 먹고 싶을 때 탁 꽂아서 먹을 때, 내가 먹고 싶은 것 꽂을 겁니다, 아마. 여러 가지가 있다면. 그래 먹고 싶을 때에 먹었으면 됐지 않습니까? 바로 말로 형용할 수 없고 내놓을 수 없는 것을 바로 이 먹는 걸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냥 먹고 싶은 거…. 

이렇게 환경에 따라서 내 앞에 병고가 닥쳤으면 닥친 대로 그냥 그저 몰락 넣어 버리고 태워 버리고 마는 겁니다. 몰락 넣어 버려! 몰락 그냥! 뛰어넘어! 뛰어넘으면 되는 거라. 사과 깎아 놓고 배 깎아 놨으면 하나 뚝 찍어서 먹어 버리면 그만인 거라. 그러고 또 배 먹고 싶으면 배 찍어. 또 먹어. 과일이 없으면 또 고만둬. 그렇듯이 생활하면서 나한테 닥치는 대로 놔 버려라 이거야. 용광로에 넣어 버리듯이 넣어 버리면, 놔 버리면 그것이 바로 공부가 참 진실하게 돼서 앞으로 참나에게 그 무궁무진한 일들을 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생깁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어떠한 문제가 생겼습니까? 전자에도 나는 그런 소리 가끔 했습니다. 우리 가정에서 빚을 많이 졌으면 우리 식구들이 살 수가 없다. 그러나 빚을 갚으려면 이렇게 계발이 돼야 하고, 이렇게 물리가 터져야 하고, 지혜로운 마음으로서의 한마음이 돼 주고, 이렇게 마음을 조절할 줄 알고 서로 한마음이 돼 줄 줄 알아야 된다. 이래야만 우리나라가 좀 더 나아진다. 그리고 풍족해지고 빚도 갚아진다. 이것은 누구나가 하는 말이지만 그냥 말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진실된, 진실하게 현실로 나오게끔 만드는 작업입니다. 이 말이 법입니다. (중략)

그러면 그걸 어떻게 해결을 하느냐고 하시겠죠? 우리가 물질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물질로써는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과학이 발전이 됐다 할지라도 물질로써 한다는 거는 물질을 죽이고 보는 겁니다. 그러나 물질을 죽이지 않고 할 수 있는 방법, 어떤 것이냐! 우리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런 말을 해 드린 걸 한번 참작해서 앞으로 살아가면서 잘 보세요. 여러분의 마음과 내 마음과 둘이 아닌 까닭에, 일체제불의 마음도 둘이 아닌 까닭에 여기저기 부처가 없는 데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의 마음은 한마음이기 때문에 절대로 우리가 생각한 대로 그대로는 아니 될 겁니다. (녹음 안됨) 여러분이 참 그 뭐, 요새 금강댐을 한다 어쩐다 이런 것도 마음대로 안 될 겁니다.

우리 한마음 한뜻으로서 우리 마음이, 일체제불이 한마음 한뜻이라면 어찌 남이겠습니까. 우리가 전부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은 바로 자비입니다. 누구를 해하지 않으면서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 그것은 말로 이렇게 이렇게 하겠다 이래도 이건 법이 되지 않는 법. 그러니 닥치는 대로 마다하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 가는 것 일부러 잡아서 할 생각 하지 말고, 또 내가 이 공부를 잘해서 아주 부처가 다 됐다고 뻐길 것도 없고. 

그러니 한 발짝 한 발짝 딛고 돌아가는 이런 멋있는, 끊임없는 생사윤회에 걸리지 않고 돌아가는 이 마당에서 어떤 발자국 떼어 놓을 때, 어떤 과일을 먹을 때 내가 먹었다고 할 수 있으며 어떤 과일을 먹었는데 이것이 제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부처님 법은 어떠한 걸 제일이라고 내세울 게 없는 게 부처님 법입니다.

그러니 시시각각 작든지 크든지 우리가 환경에 따라서 조절하고 환경에 따라서 모든 걸 처리해 나갈 수 있는 그런 방법을 모색하고 연구하고 해서 그 마음으로 금방금방 자기의 그 가환도 금방 떠넘겨, 그냥. 자꾸 그걸 붙잡고 늘어지고, 그걸 붙잡고 ‘이걸 어쩌면 좋은가? 이거를 낫게 해 주시오. 이거를 해결해 주시오.’ 그러고 붙잡고 늘어지니까 이놈의 게 넘어가지 않지 않나. 그냥 몰팡하게 내버려. 내버려. 모든 걸 용광로에다 넣어 버려요. 그런다면 바로 자동적으로 생산이 돼서 그게 나와요.

부처님 법이 경전에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는 경전에 있는 부처님 법이 딱딱하고 모르고 그러니까 아주 간단하게, 우리가 지금 급하니까. 우리 지금 국내에서도 급하거든요. 여러분이 이런 도리를 깨달았다 깨닫지 못했다 이걸 떠나서 진실히 자기를 믿고 자기한테다가 맡겨서 ‘모든 거를 여기서 할 수가 있으니까.’ 하고 믿기만 한다면 그거는 뭐든지 실험을 통해서 여러분이 체험을 해 볼 겁니다. 그래서 오늘부터라도 조그만 거 큰 거 따지지 말고, 남의 일이든 자기 일이든, 얘기는 바깥으로 말고 속으로만 알고 자꾸자꾸 실험을 통해서 체험을 해 보세요. 그럼 앞으로 국내의 문제들도 다 해결할 수 있는 여건이 생기는 겁니다.

지금 내가 말씀해 드린 거를 잘, 잘 들으셔야 합니다. 이것은 말로 해 드릴 수가 없는 것을 지금 말로 해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말이 아닌 겁니다. 여러분이 현실로서 지금 그렇게 실험을 통해서 자꾸 해 나갈 수 있게끔 만들어 드리는 겁니다. 

어저께도 얘기하고 갔지마는 어느 학교의 선생님이신데 말입니다, 그분은 여기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실험을 통해서 자꾸 해 나가고 있습니다. “야, 이게 참 멋집니다.” 이겁니다. 그렇게 해 나가는 분들도 있는데 어째서…. 난 나쁘다곤 안 그럽니다. 왜냐하면 상에 반찬을 놓을 때 종지도 있어야 쓰겠더군요. 그렇기 때문에 그 종지도 부처인 것이죠. 작고 큰 게 없어요. 여러분이 다 똑같습니다. 나와 여러분과 똑같습니다, 아주. 크고 작은 게 없어요. 크고 작고 그런 게 없는 반면에 여러분은 급한 대로, 앞에 닥치는 것대로 해결하고 넘어갈 수 있는 그런 대인이 되시라는 얘깁니다. 자유인이 되시라는 말입니다. 

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못 믿습니까? 자신의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수만 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도 있는 겁니다. 마음이라는 건 체가 없어서 저 사람이 내가 될 수도 있고 내가 저 사람이 될 수도 있으니 이 마음이 참 싱숭생숭한 사람도 그 마음만 잡아서 나한테다가 딱 집어넣고서 정상적으로 이렇게 밀어 준다면 그것도 빠릅니다. 여러분이 모든 걸 할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게, 멋있는 자유인으로서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이 멋있는, 부처님 법이기 이전에 여러분의 법을 왜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그 법이, 여러분을 살리고 죽이는 거는 여러분에 달렸습니다.

그것을 체험해 보고 실험해 보신 분들은 “참으로 생활해 가면서 그걸 실험을 통해서 하면서 나가다 보니까 아, 자기가 거기 있더군요.” 합디다. 누구도 모르는 거. 보이지도 않는 거. “있는 걸 그러면 내놔 봐라.” 그랬더니 아주 아름답게 노래를 부르데요. 허허허. 그래서 듣기 좋았습니다. 새소리가 나고 봄에 꽃이 피고 물이 흐르고, 이것이 바로 공생을 하면서 공용을 하는 공음파를 보내고 주고, 이심전심으로써 우리가 같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못 믿고 자기 자신을 개별적으로 생각하고 ‘나는 힘이 없어, 중생이니까.’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주인공, 한마음이시여.’ 하면 일체가, 전체가 그 한마음 속에 다 들어 있는데 원력이 얼마나 무쌍합니까? 마음이라는 건 내놓을 게 없고 체가 없기 때문에 그 무전자의 이치는 유전자로 통해서…, 또는 형상이 되죠. 이것이 우리가 삼위일체로 돌아가는 이 멋진 마음, 이 멋진 아름다움, 멋진 법. 한 번 치면 그냥 딱 잘라지는 거. 잘라지면서도 잘라짐이 없는 그 멋진 법. 여러분이 이 무서운 법이면서도 자비스러운 이 법을 참, 생각해 보시면 여간 좋지 않습니다.

이 법이 얼마나 좋았던지, 배꼽 있는 데를 훌렁 뒤집어 놓으려면 뒤집어 놓고 제껴 놓으려면 제껴 놓거든요.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왜, 예전에 우리 토끼치기 했죠? 요만한 막대기 하나 가지고도 되고, 손가락 하나 가지고도 되고 손가락 하나 없어도 이 마음의 막대기 하나만 갖는다면, 한 나라를 이렇게 하려도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려도 해. 그러나 둘이 아닌 까닭에 그렇게 하질 않아요. 그러니 그렇게 하질 않는 반면에 그렇게 해요,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거든요. 그리고 우리는 또 계속해서 끊임없이 진리가 될 수도 없고요.

아까 그냥 대충대충 말했는데 지금 시급한 문제도 그렇거니와 우리가 지금 국내의 그런 것들을 위해서도, 국내의 모든 문제점을 우리가 마음으로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는 다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걸 힘을 들여서 아이고, 그걸 생각을 하고 꼬집어서 생각하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한번 생각나걸랑은 이렇게 한번 해서 딱 맡겨 놓는, 집어 놓는 거면 그냥 그것이 다 해결을 하니까요. 컴퓨터처럼 말이에요. 우린 자연 컴퓨터, 자연 천체망원경, 영사기, 탐지기 또 전체 무전통신기 이런 게 있기 때문에, 우리가 누진통이라 하면 책정기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마음대로 오온의 수레바퀴를 굴릴 수 있다는 요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 마음의 도리를 의심치 말고 믿으십시오. 자기 자신의 주인공을 믿으시면서 거기다가 일체를 다…. 들이고 낸다는 건 거기서 하는 겁니다. 우리가 문을 열고 닫을 때 저 빗장을 쥐지 않는다면 열고 닫을 수 없습니다. 뭐, 길게 말한다고 해서 공부를 잘하고 또 짧게 말한다고 해서 공부를 못하는 게 아니니 심사숙고히 생각하셔서 앞으로 가정에서 조그만 것이라도, 또 회사에서도 그렇고 장사하면서도 그렇고 우리가 실험을 통해서 가고 오면서도 그걸 한번 침착하게 생각해 보실 그런 여건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걸로써 마치겠습니다.

※위 법문은 대행 선사 법문집 ≪허공을 걷는 길≫ 중 1986년 11월 2일 일반법회 법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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