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이 도리를 모른다면 점점 살기가  희박해집니다

생각하기 이전 나를 진짜로 믿고 맡겨 놓는다면
여러분은 이 세상 어디에 내세워도
창살 없는 감옥에서 벗어난 대인이 되실 것입니다.

(어느 스님께서 성불했느냐고 물으매 말씀하심) 석존이 계실 당시에도 석존의 제자나 석존이 어디 가시면 돌팔매질을 하고 머리를 깨뜨리고 제자를 죽이기까지 했답니다. 그것은 너무 질투가 심하다 보니깐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르고 알고 이것을 논의할 때가 못 됩니다. 또 우리가 잘나고 못나고 이걸 따지기 이전에 모두가 둘이 아님을 안다면 그 또한 나인 것을 왜 질투가 생기는 겁니까? 여자고 남자고 우리 한 집안의 가족이라고 한다면 누구라도, 저 딸이든 이 아들이든 한가족입니다. 누구라도 좀 더 잘해서 잘되기를 바라는 어버이의 마음은 아마 누구나가 다름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예전이나 지금이나 말로서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는 한갓 웃음밖에 안 나는군요.

예절을 똑바로 지켰든 안 지켰든 나이기 때문에 그 참 억설로 나오는 말이지만 공손히 대답을 해 줬는데도 불구하고 그 뜻을 모릅니다. 가르쳐 줘도 모르는 걸 어떡합니까? 우리가 행동 하나하나, 말이 있기 이전이 있다면 말을 하게 되고, 말이 있기 이전에는 반드시 행동이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말을 하고 여기 오셨습니까? 걸어올 때 말을 하고 걸어오는 게 아닙니다. 행동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났을 때, 일을 할 게 있을 때 그때에 이제 찰나찰나 나투면서 말을 하고 넘어가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이 배우는 입장에서, 배우기보다도 나를 알라는 그런 뜻에서 얘깁니다. 나를 먼저 알라는 얘깁니다. 나를 먼저 모르면 저런 행동이 나오고 무리한 일이 나오고, 생활에 보탬이 없고, 공덕과 복덕을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시대에 이 도리를 알지 못하고는 앞으로 살아나가기가 힘들다는 거를 내내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 사람이 나한테 설법을 하게끔 만들어 주고 가는군요. 그것도 고맙군요, 또. 허허허. 참 뭘로 보나, 이걸 봐도 설법이 되고 저걸 붙여도 설법이 됩니다. 그것은 우리 사는 생활이기 때문이죠. 

초발심에서 우리가 이 도리를 감응을 하고 또 감을 잡아서 나가려면 내가 항상 주인공에다가, 요 말을 하고 넘어가야 되겠어서 하는 겁니다. 새로 오신 분들도 있으실 테고 또 그냥 여러분이 매일 들어도 그것이 알쏭달쏭한 문제가 많기 때문에 항상 그 말은 하고 넘어갑니다. 우리가 주인공에다가 맡겨 놔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주인공에 맡겨 놓으니깐 잘됩디다.” 하고 얘기를 했습니다. “생활하는 데 그렇게 좋고 편안함이 없습니다.” 그러곤 나가다가 어느 땐가 또 와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전엔 잘되더니 지금은 안됩니다.” 이겁니다. 그래 나는 그랬습니다. “안 되는 것도 배워야지 되는 것만 안다면은, 안 되는 걸 모르기 때문에 양면을 걷어잡고 굴릴 수가 없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건 왜냐하면 안 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이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안 가시겠죠? 

요렇게 표현을 하면 좋겠습니다. 어린애가 부모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 사는데 어린애가 철모르고 덤벙덤벙, 지금 서너 살짜리가 뛰어갑니다. 그런데 가면은 구덩이에 빠진단 말입니다. 그 어린애는 가고 싶어 갑니다. 그런데 어른은 구덩이에 빠지겠으니까 붙들어서 안전한 곳으로 끌어다 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이것도 부처님 법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안 되는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깨달아야 할 과정을 거쳐야 할 분인데, 즉 말하자면 어른이 다 된 것처럼 “왜 아버지는 내가 하고 싶은 거 그냥 놔두지 않고 그러나?” 이렇게 말씀하실는지도 모르지마는 그게 아닙니다. 그러니 안 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입니다. 안 되는 것도 되는 것입니다. 죽인 것도 무명을 쳤다고 해서 죽인 게 아니라 그것도 살린 거라 이 소립니다. 살리는 것도 살리는 거고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겁니다. 이 도리를 우리가 알아야 되겠기에 이런 말을 해 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안 되는 거 되는 거를 모두 맡겨 놔라, 몰락 놔라 하는 이치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우리가 미생물에서부터 수억겁 광년을 거쳐서 진화돼서 지금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랬는데 그렇게 나오면서 살던, 자꾸 몸을 바꿔 가면서 살던 습이 그냥 잠재의식에 얽히고설켜서 뭉쳐 있으니 그건 종 문서와 다름없다 이겁니다, 양반집의 종 문서. 만약에 그 종 문서를 불살라 버리지 않는다면 반드시 그 양반집의 종으로 대대손손이 그건 떠날 수가 없습니다.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항상 그것을 닥치는 대로 놔라. 우리 지금 요것이 알쏭달쏭한 문제가 되겠죠. 그것을 판단을 잘하실 것 같으면 가늠이 되고 그것이 감응이 오게 되면 바로 나를 내가 발견하는 그런 뜻입니다. 내가 본래 빈 그릇을 본래 빈 그릇이라고 알았을 때, 빈 그릇이 아니라 꽉 찬 그릇입니다. 왜 비었다고 했고, 왜 무(無)라고 했는가? 

우리는 한 발짝 뗄 때 쉬지 않고 떼어 왔습니다, 지금. 걸어왔습니다. 쉬지 않고 걸어올 때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앞발은 아직 떼어 놓지 않았으니까 없고, 뒷발은 떼어 놨기 때문에 없습니다. 그러면 시공이 없다는 뜻도 알게 되고, 우리는 꽉 찼는데 이렇게 나투어서 하루살이로 이렇게 떼고 가니까 발이 붙지를 않는 겁니다. 고정되게 붙지를 않는다. 

왜, 눈이 왔는데 미끄러져서 아주 유리알 같을 때에 발을 오래도록 거기 붙인다면 미끄러지고 맙니다. 그러나 자주자주 떼어서 발이 그 얼음판에 딱 붙질 않는다면 그건 넘어질 리가 없습니다. 제가 그거 경험을 해 봤는데요, 아주 가파른 미끄러운 얼음판에 언젠가 한번 제가 뛰었습니다. ‘야, 이거 발이 붙으면 미끄러지겠구나.’ 해서 거기를 그냥 뛰었습니다. 막 뛰니까 발이 미끄러질 새가 없다는 얘깁니다. 그와 같이 우리는 지금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미끄러질 새가 없이. 고정되게 거기 못 박히듯 그냥 박혀 있는 거 그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고 그럴 사이가 없이 지금 한 발 한 발 떼어 놓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게 빈 그릇이 아니라 꽉 찬 그릇입니다. 꽉 찼는데 한 발 한 발 떼어 놓고 돌아가서 이렇게, 그전에도 말했지만 애들 만날 때는 그냥 스스로 마음이 달라지고 말도 달라지고 행도 달라지고 또 아버질 만날 땐 딸로서 생각나고 아들로서 생각나고 행도 나오고 말도 나옵니다, 스스로 누가 그렇게 하지 말래도. 그건 왜? 나한테 그 오관을 통해서 수레바퀴가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그렇게 돌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서 묘법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붙을 사이 없이 한 발 한 발 떼어 놓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 보배를 그렇게,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오관을 통해서, 오신통을 수레바퀴라고 한다면 그것을 굴리면서, 또 내 마음의 운전수를 만약에 누진통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책정을 하면서 굴러갈 땐 굴러가고 참견할 땐 참견하고 이렇게 올바르게 구르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 이거는 굴러가지 않는 건가? 그것도 굴러가는 거, 이것도 굴러가는 거, 잠자는 것도 굴러가는 거, 모든 게 전부…. 일 초도 쉬는 게 없습니다. 그렇게 떼어 놓으면서도 찰나찰나 나투어 돌아가는 이치죠. 그렇기 때문에 그 보배를 누구나가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 보배를 가지고 있는 거, 거기까지만 얘기하고 어디로 넘어가야 하느냐. 지금 우리 지수화풍으로서,  끈을 잇기 위해서 그 말을 또 합니다. 지수화풍이 전체 가늠할 수가 없이 헤어져서 생명만 이렇게 돌아다니다가 한데 합쳐지니깐 어떠한 거를 조성해서 형성시켰습니까? 생명을 형성시켰습니다. 아주 위대한 생명을 형성시켰죠. 바로 지수화풍이 형성을 시켰습니다, 이 몸을. 일체 만물에 대한 그것을 형성시켰다 이겁니다. 

그건 어디로부터? 그것이 바로 자기의 마음으로부터, 위대한 마음으로부터 한생각에 의해서 그 모든 미생물이 났다는 얘깁니다. 미생물만 난 게 아니라 무정물도 식물도 다 났단 말입니다. 다 났는데 그것이 지수화풍이 아니면 그렇게 생명이 날 수가 없습니다, 그게 규합이 안 됐다면. 그래서 그 위대한 생명을 발견했고 조성해서 참, 그 몸을 형성시켰는데 미생물이 거기서 탄생을 한 것도 우연히가 아니라 그건 자성(自性)으로서의 한생각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그렇게 태어나서 수없이 거듭거듭 해 오다가 보니까 우리가 무엇을 하나 연구할 때, 처음에 물건을 하나 만들었을 때 처음 물건을 만들었기 때문에 찌그러질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 만들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처음에 그 생명의 모체를 조화를 이뤄서 형성시키는 데, 물질을 형성시키는 데 많은 실패를 했단 얘깁니다. 실패라기보다는 잘못 만들었다고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시공이 없이 방치해 뒀단 얘깁니다. 

우리 인간들의 생명이 살아나가는 데는 시공이 있어서 이것이 차곡차곡 순서가 있어야 하는데 이건 순서가 없이 시공이 없이 놔뒀기 때문에 물씬물씬 그냥 자랄 대로 자라는 거고 악할 대로 악하고 이렇게 되니까 그 물질이 상당히, 그 생명을 생명들끼리 잡아먹게 되고 또 형성시켰으나 모든 그 모습이 흉하고 그래서 실패작이 됐습니다.

이게 거듭거듭 서너 차례 실패를 하고 보니까 여기까지 이렇게 오게 되는데 우리 이 조선으로선 단군이 한 가정의 어버이로서 그 길을 일러 줬다고 봅니다. 그런다면 두 번째의 대의적인 문제를 일러 주신 건 석가라고 본다면, 우리가 석가나 단군할아버지가 아니 계셨다면…, 지금 안 계신다 하더라도 그 단군이나 석존이 안 계신 게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이 바로 그 자손이기 때문에, 그 나무가 하나 이렇게 섰으면 씨앗이 거기 열려서 수많은 씨앗이 나왔다는 그 조건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럼 바로 여러분이 단군도 되고 석존도 되고 다 되는 것입니다. 일체제불이 다 되시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 낮고 누가 높고 누가 깨닫고 누가 깨닫지 못하고 이런 것을 따지겠습니까? 참, 그런 분은 어리석은 분이라고 볼 수밖엔 없습니다. 왜 저렇게 어리석은가? 자기로서는 어리석은 게 아닙니다. 그분으로서는 어리석지 않다고 생각을 하고 ‘한번 이렇게 하는 바람에 힘이 없어서 주저앉는다, 또 방해를 놓는다면 입도 떼지 못할 거다’ 이러한 자기의 생각으로써 여기에 온 것이죠. 

아무튼 여러분은 참, 다 부처고 법신이고 다 보신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내 몸을 보호하고 이렇게 나가는 그 보신, 또 여러분의 생각이 현실로 나오니 법신, 예. 그러니 그 얼마나 교묘하고 광대무변한 여러분이시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천차만별로 차원이 있기에 그런 분도 있고 저런 분도 있습니다. 그거를 원망은 안 합니다. 이것도 바로 내가 있기 때문에 그분이 오셨지 내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그분이 오셨겠습니까? 망했든지 좋았든지 간에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이 오신 것을 바로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분이 오셨기에 내가 한번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있지 않은가. 고맙다.’ 이렇게 내용적으로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우리가 무방비 상태로 뒀기 때문에 그렇게 세 번이나, 참 두 번이나 그랬고 적게 한 번이 돌아갔으니 세 번이라고 볼 때, 우리가 생각하기엔 천지개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천지개벽! 그렇게 실패를 하고 보니 인간으로 태어났고 우리 인간이 됐습니다. 인간이 됐으니만큼 인간으로서 허무하다, 죽는다 이런 걸 떠나서 우리는 자유자재권을 스스로 가지고 있는 거고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천지의 신이 따로 있고 사람들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를 보십시오. 얼마나 위대한가? 

전자에 단군할아버지가 길을 가리킬 때에 다르고, 지금 개발된 이 시점에서 또 다릅니다. 내일 또 다르고 모레 또 다른 겁니다. 앞으로는 우리가 떡 어딜 가려고 섰기만 하면 그냥 드르르르 가게끔도 될 수 있는 거죠, 자력에 의해서. 그만큼 과학적으로다 발달이 되고, 지금 시점에서도 발달이 많이 됐지마는 한계가 있는 거죠. 그것도 한계가 있는데, 또 더 발전이 된다면 더 과학적으로 놀 때에 우리는 이 발바닥에 흙을 안 묻히고 떠서 다닌다는 얘깁니다. 또 물속으로도 그냥 뭐, 300Km나 400Km나 500Km로 이렇게 달리는 그런 멋진 시대가 오는데, 인간 자체가 그렇게 될 수 있는 보배를 가지고 있고 수레를 굴리기 때문에 그러한 물건도 나온단 얘깁니다. 그렇게 발전을 이룬다 이겁니다. 

그러면 누가 했습니까? 사람들이 했죠. 모두가 사람들이 하는 거 아닙니까? 연료도 참, 로케트 연료로써 충분히 쓸 수 있는 그런 문제, 전기화도 되고 전자력으로서 일들을 하고 모든 게 이렇게 나가는데…, 그런데 말입니다, 앉아 계신 저 부처님은 창이 없고, 벽이 없고, 문이 없습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이 된다 하더라도 문이 있어서 들어올 문이 있고 나갈 문이 있고 그렇지만 저 부처님께서는 가만히 앉아서 드나드십니다, 가만히 앉아서. 저 부처님이, 어떤 분은 ‘저거 형상인데, 뭘.’ 하죠? 처음에 배울 때는 형상으로 봐야 하고 나중에 진짜 알았을 땐 스스로서 부처인 줄 알게 된다 이겁니다. 

자기도 그렇게 허무하다 그러지만 이 몸뚱이는,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소라 껍데기, 껍데기가 소라가 아니고 소라 알맹이가 소라다. 소라라는 것도 이름이기에 그 살 속에는 또 마음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영원한 생명이라는 게 있다. 그런데 우리도 그와 똑같은 문제니까 말하기 이전, 생각하기 이전 나를 진짜로 믿고 그렇게 맡겨 주신다면 여러분은 참, 이 세상에 어디다 내세워도 정말 창살 없는 감옥에서 벗어난 대인이실 것입니다. 대인입니다. 대인이 되시는 겁니다. 그걸 부처라고도 하고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까도 얘기하던 끝이, 그렇게 과학이 발전이 돼서 그렇게 앞으로 물속으로 떠다니고 아무리 그런다 할지라도 요 묘한 말을 어떻게 해야 여러분이 잘 알아들으실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지수화풍으로서의 위대한 생명을 조성해서 형성시켰고 육신을 형성시켰고, 그렇게 작업을 해서 수없이 실패를 하면서도 또 발전을 해서 이날까지 계발을 해 가지고 여기까지 올라온 겁니다. 

그러면 무의 세계의 무전자, 유전자 또는 지금 현재의 형성된 이 모습! 이런 문제가 바로 유전자의 그 미지수의 일들이 바로 우리를 이렇게 해 놓기 때문에 우리는 유전자로서 형성이 되고 형성이 됨으로써 발전을 이루어서 우리들은 주인으로서 하는 겁니다. 우리는 최초의 지수화풍이 그렇게 위대한 생명을 참, 방대하게 그렇게 조성했을 때 바로 그때도 있는 겁니다. 그때에 우리도 있었고 지금도 바로 그분들이, 바로 그것들이 우리가 된 셈이죠. 

그러면 왜 부처님 따로 있고 신이 따로 있고 우리가 따로 있습니까? 이거를 세밀하게 아신다면 우리는 지금 온 누리에 어떠한 육해공군이 있다 하더라도, 정치를 하는 사람이나 모든 면에 있어서 모든 걸 지시할 수 있는 겁니다. 왜? 모든 것이 내가 될 수 있고, 내 모습 없는 바로 나는 그 사람이 돼서 그 모습으로써 그 마음이 한마음이 돼 줌으로써 그것은 경제난에도, 육군에서도 공군에서도 해군에서도, 정치하는 사람들도 모두가, 경제발전도 그렇고 공업의 발전도 그렇고 사람이 마음을 조절해서 잘되는 이치도 바로 내가 돼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도 말했지만 나쁜 마음을 먹고 나쁜 행동을 하다가 좋은 사람의 마음이 거기 합세를 해 주니까 좋은 일을 하고 다니거든요. 이 몸뚱이는 마음에 따라서, 운전수에 따라서 차가 끌려다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아, 구덩이에 빠지지 않고 남을 치지도 않고 좋게 다니고 그러는 거와 같이, 사람도 좋은 일만 하고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니까 나중에 그렇게 잘된 연에, 마음이 좋게 된 연에, 행동도 그렇게 하는 연에 그 마음을 도로 쑥 빼 와도 그 마음이 그 마음으로 그냥 서 있단 얘깁니다. 그래서 밀물 썰물이 있듯이 물이 고였다가 좀 더 부자연할 때는 밀물이 돼 주고, 더 좀 할 땐 썰물이 돼 주고 이러는 활용! 이러한 문제가 지금 여러분이 알아서 시급하게 지금 써야 할 일이 아닌가 봅니다. 

앞으로는 여러분이 이 도리를 모른다면 점점 살기는 희박해집니다. 여러분이 참, 여러분 가정에 조화를 이루면서 향내를 내면서, 만 가지 꽃이 피어 만 가지 향내를 내면서, 열매를 맺으면서, 열매를 또다시 심으면서, 끊임없이 그 서원이 있기를 기대하면서, 이 도리를 알아야만이 우리가 불국토를 이루지 않나. 불국토가 뭐 다른 게 불국토입니까? 우리가 천차만별로 차원이 되는 거, 차원이 높아짐으로써 우리는 그렇게 오관을 통해서 그 수레바퀴가 스스로 돈다는 걸 알고 자기가 자발적으로 책정을 해 가면서 자기가 그 단추를 누를 줄 안다면 바로 불국토입니다. 

지금도 개발을 해서 로케트가 올라가고 이렇게 하지만, 앞으로는 전자력 원료를 쓰고 원자력을 다 발동해서 또는 전자나 원자나 다 써서, 우리는 갈 때도 올 때도 사는 것이 풍부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지금 우리 인간이 이렇게 멋진 인간으로서, 이 혹성의 주인으로서, 또 혹성의 주인만 되는 게 아니라 온 우주 전체의 주인이 된다 이겁니다. 

그건 왜? 우리는 지금 국내의 주인이지만, 우리 국내를 위해서는 전 세계를 조절할 줄 알아야 국내를 위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국내를 잘 리드해 나갈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참, 안전한 방석을 가질 수 있다 이런 문제도 되죠. 그럼으로써 전 세계를 도우려면 우주를 또 서로 상응하면서 이심전심으로써 돌아갈 줄 알아야 된다는 얘깁니다. 우주의 주인이 돼야 되겠죠? 

그러니 여기뿐만 아니라 딴 동네도 있고, 저 동네도 있고, 은하계의 동네도 있고 참, 금성 동네도 있고 여러 동네가, 아주 은하계도 동네가 많습니다. 허공에도 지금 수많은 생명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한생각에 그것이 모아지고 펼쳐지고 한다는 거, 그 얼마나 위대한 주인이시며 얼마나 그게 묘법입니까? 난 자부합니다. 어떤 스님이 “너 깨달았느냐?” 이러지마는 난 깨달았단 말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난 그냥 할 수 있다라는 얘기만 하는 겁니다. 왜? 내가 한마음이라 함은, 전 우주에 그 생명체들의 마음이 한데 모였다가 흩어졌다 하는데 누가 감히 혼자 내가 했다 이러나요? 어림도 없어요. 

그러니 내 이 모습이 있기에 내가 그렇게 그것을 발전하고 깨닫고 계발하고 이랬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얘기하는 거다 이겁니다. 얘기 안 할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이런 얘깁니다. 하지만 우리가 얘기를 했어도 얘기한 사이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내놓을 게 없는 마음이요, 나도 내놓을 게 없는 마음이니 어찌 둘이겠습니까? 그리고 어찌 말을 했다 하며 어찌 들었다 하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역력하게 말은 했고 역력하게 들었잖습니까? 한 사이가 없습니다.

요다음에 그것에 대해서도 얘기해 드리겠습니다마는 이 부분 부분 참,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마는 수많은 생명의 그 주인들이 수많은 혹성들에 다 있고 행성에 다 있고 그런데 왜 우리만 여기 살고 있는지. 그렇게 나, 나, 나, 나 하다간 고만 저 이웃에도 가 보지 못하고는 그냥 옷을 벗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렇게 옹졸하게 생각 마시고 넓혀서 오늘 저녁거리가 없다 하더라도 ‘당신이 억겁을 통해서 형성시켜서 조화를 시켜서 살아왔으니 당신이 더 잘 알 거 아닌가. 내가 뭘 아나.’ 하고선 맡기는, 즉 말하자면 심부름꾼, 시봉자! 시봉자가 돼서 그렇게 다, 조그만 아이가 어머니나 아버지 믿듯 그렇게 믿고 모두 맡겨 놓는다면 어머니 아버지가 어련히 오죽이나 잘해 주겠습니까? 그거와 같다 이 소립니다.


※위 법문은 대행 선사 법문집 ≪허공을 걷는 길≫ 중 1986년 11월 16일 정기법회 법문의 일부를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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