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생활이 길이며 너 나가 있는 생활이 바로 진리입니다

우리가 오고 가면서 
삿갓 쓰고 주장자 들고 바리때 하나 들었으면, 
나물 먹고 물 마시면 족하지
대장부 살림살이 아, 얼마나 좋습니까!

공부에 진전이 없어 답답합니다

질문 인간으로 태어나서 금생에 이 마음을 꼭 깨치고 가야겠다고 서원하고 공부해 나가고 있습니다. 근데 생각보다 진전이 없어 답답하기만 합니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여러분이 염불하시는 데도 내 마음이, 한마음이 즉 관세음이고 지장이고 독성이고 산신이고 용왕이고, 이렇게 일체가 내 한마음에 들었다고 돼 있죠? 그 한마음에서 그 이름이 나가는 거고 한마음에서 씀씀이가 다 가락대로 차원대로 나가죠. 왜 내가 이런 소릴 하냐 하면, 여러분은 말로만 ‘내가 관세음이고, 내가 부처고, 내가 지장이고, 이 마음에, 그 한마음에 다 들었다는데, 뭐.’ 이렇게 꼿꼿이 세우는 마음이 있단 말입니다. ‘내가, 내가 부처니까 인간은 다 부처가 될 수 있고, 다 부처다.’ 하는 그 마음만 알고 이론만 알고 있지 진짜 행은 그렇게 못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내가 이 공부를 빨리 해야지.’ 하는 급한 마음을 가지시기 이전에 여러분은 자기의 아집이라든가 아상을 놔 버려야 하고, 자기 분수를 지켜야 하고, 또는 시간도 지켜야 하고, 의리도 지켜야 하고, 도의도 지켜야 하고, 사랑도 지켜야 하고, 그러니까 자만이나 아만을 부리지 말고, 착을 놔야 하고, 욕심을 놔야 하고, 투기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모든 악한 것은 내 마음으로 안아서, 예를 들어 이 물 한 컵에 있는 물방울이 아주 악인이라고 합시다. 악인이라 하더라도 그걸 내 물그릇에 넣어서 같은 한 그릇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관세음보살의 행입니다. 

그러면 관세음보살이 여러분의 이름에 속한다고 볼진대 그렇게 넣어서 안아서 녹여 주고, 병자가 있으면 병자가 있는 대로 여기 넣어서 안아 주고, 또 가난이 있으면 내 가난과 같이 생각해 줄 수 있는, 이익을 줄 수 있는 마음이라야 되고, 그래서 내 몸과 같이 생각하고 내 아픔같이 생각하고, 또 죽는 사람이 있어도 내 마음으로, 한마음으로 안아서 나를 만들어서 다시 내놓는다면 그것이 바로 천도입니다. 

이 마음과 마음이 서로가 서로를 안을 때, 참 그것은 즐겁고 여간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그렇게 될 때에는 밉고 곱고, 너는 잘못하고 잘하고 이것을 따진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보살들이 될 수 있는 100%를 가지고 있고 99%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또는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99%다 할지라도,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이 다 될 수 있어도 이 행을, 그대로 선행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건 중생을 벗어나지 못하는 일에 속합니다. 

그래서 물건도 ‘내가 물건을 다 잃었다’고 울지 마시고 내가 그 사람 물건을 써서 내가 그 물건으로, 물질로 그 사람한테 갚았다고 생각한다면 억울할 게 하나도 없죠. 받지도 못하고 그럴 거를 울고불고해서 몸까지 집까지 망가뜨리고, 살림까지 망가뜨리고, 식구까지 다 파산을 시키고, 그런 행은 있을 수가 없는 거죠, 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러니까 계율도 지키려는 생각을 억지로 낸다면 하나도 안 지켜집니다. 지킨다 안 지킨다를 떠나서 그렇게 행을 해 가지고 나가신다면 그대로 천 가지 만 가지 이 세상의 계율과 질서를 다 지키면서 모순된 일을 하나도 하지 않고, 그렇게 삶의 보람을 느끼면서 여여하게 자유인으로서 살아나갈 수 있는 그러한 아마 이름 없는 부처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 행이 중요하다는 얘기죠. 여러분이 아무리 부처가 되려고 애를 써도 그 행이 그럴 때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인공에다 놓고 갈 때는, 아주 빡빡하고 마르고 척박한 땅에 물을 주고 모든 걸 그렇게 하니까 노골노골해지지 않습니까. 돌도 골라 내고 다 이렇게 행으로 하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맡겨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엎드러지면 여러분에게 일어날 힘도 있죠? 그러니까 거기 놓을 때에 안 되는 것도 거기고 되는 것도 거긴데, 되는 것도 고정되지 않고 안 되는 것도 고정되지 않으니 그 굴리는 것은 운전수에 달려 있다. 

이리로 가는 것도 저리로 가는 것도 운전수에 달려 있으니 안 되는 거 되는 것을 다 거기에, 거기에서 나오는 거니까 거기에다 다 놓고, 되게 하는 것도 너고 또 몰라서 못 쓰는 것도 너니까 그것을 지혜롭게 운전해 간다면, 그것을 그렇게 놓고 간다면 벌써 시각이나 청각이나 후각이나 감각이나 지각이 발효가 돼서 벌써 오신통이라고 하는 그 이름이 아닌 내 마음이 아주 밝게 맑아지고 지혜로운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자꾸자꾸 지혜가 생기죠, 두뇌로. 

그러면서 내가 보는 눈도 달라지고 듣는 것도 달라져요. 내가 하는 것도 달라지고 생각하는 게 모두가 달라집니다. 전부 바꿔져요. 이상하게 바꿔지죠. 그게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익어 가는 게.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편리하고 편안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선혜보살이라고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보살이 너무도 착하고 어질고, 행을 너무도 참 정확하게 밝게 지혜롭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항상, 아주 불쌍한 사람을 보면 불쌍한 대로 이익을 주고, 아픈 사람을 보면 간호를 해 주면서 항상 마음을 위로해 주고 내 아픔같이 생각해 줘서 건져 주시고, 또 어떠한 악한 자를 보면 악한 자도 항상 이 물컵에 물 한 방울 넣듯이 내 마음으로 안아서 항상 착한 사람 되게 이롭게 해 주고, 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그랬답니다. 착한 사람도 고정되지 않고 또 악한 사람도 고정됨이 없거든요. 그거 아시죠? 

그러니까 악하다고 해서, 모른다고 해서, 또 바보라고 해서, 거지라고 해서 병신이라고 해서 업신여기지 말라 이겁니다. 한 찰나예요, 그것도 돌아가는 게. 그러니 잘나고 도도하고 위대하고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도 한 찰나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선혜보살은 아주 모든 것을, 인간에게 어떤 꽃 한 송이도 돌 하나도 그냥 이렇게 버려두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그분의 마음의 스승이 연등으로 화하시고 나중에는 그 연등부처님으로 하여금 석가세존이라는, 석가모니를 증명해 주셨고, 오늘날까지도 그 석가모니는 살아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이 살아 있는 한 계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 없는 이름은 아마도 이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밝음이 아닌가 이렇게 봅니다.

우리가 오고 가면서 삿갓 쓰고 주장자 들고 바리때 하나 들었으면은, 나물 먹고 물 마시면 족하지 대장부 살림살이 아, 얼마나 좋습니까? 오고 가면서도 그 선혜보살처럼, 그렇게 석가모니가 되시기 이전에 그렇게 하신 그 노력으로, 그것만 노력하신 게 아닙니다. 부처님께 바친 그 뜻을 볼 때 머리를 풀어서 땅이 질다고 깔아 드리질 않았나, 옷을 벗어서 질다고 깔아 드리질 않았나, 그것도 모자라서 몸뚱이까지 거기에 엎드려서 그걸 딛고 가시게 한 그 뜻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정성이 지극했나. 그 행도, 마음의 그 도리도, 그 뜻도, 그래 여북하면 이름을 선혜라고 했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도 그 행을, 지금 여기 다니시면서도 “아이구,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떤데….” 이렇게 말씀하지 마시고 그러한 말이 들리걸랑은 그저 거기 맡기시고 ‘그거는 그런 게 아니고 우리 공부하는 사람은 이렇게 이렇게 해도 그것이 또 오래 갈 것도 아니니 달라질 수도 있고,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으니 그런 걸 개의치 않는 것이 좋지 않은가.’ 하는 그런 마음씨를 가지고 우리가 행을 할 수 있다면 앞으로 정말 여러분은 진짜 부처님이 되시고 관세음이 되실 겁니다. 

분별심을 쉬어야 한다는데

질문 마음공부를 한다면서도 끊임없이 분별 망상이 올라오니 공부하는 불자로서 부끄럽기만 합니다. 분별심을 쉬어야 한다는데 어떻게 공부를 지어 가야 할는지 도움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여러분은 분별을 망상이라고 생각하시는데 그 분별이 없다면 부처를 이룰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분별은 바로 우리가 성장하는 데에 거름이 되기도 하고 진화를 시키는 데에 있어서는 마음에 지혜를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일단 생각나는 건 모두 망상이라고 생각을 하시니까 그 생각대로 망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에 의해서 여러분을 건지면 여러분 몸속에 있는 중생들도 다 건져질 수 있고, 여러분의 마음이 건져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몸에 있는 중생들의 마음도 벗어질 수가 없어서 건져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행이 그대로 보살행으로 여여하게 돼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미신의 짓을 하면서 행을 똑바로 못 하기 때문에 중생이란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마음공부를 하게 되면 질서도 정연하고, 계율도 일체 다 지킬 수 있고, 시간도 지킬 수 있고, 말도 법으로서 실천을 할 수가 있고 또 도의와 의리, 사랑을 할 수 있는 그러한 실천행이 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유권을 얻어서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분별을 망상이라고 생각하시는데 저 바다를 가 보십시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고 물이 있기 때문에 젖는 것이 있죠? 그 물은 얼음도 될 수 있고 다시 물도 될 수 있고 파도를 일으킬 수도 있고 잔잔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활이자 진리이자 도라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파도가 잔잔하게 가라앉으면 망상이 가라앉았다고 생각하시고 파도가 일면 아휴, 또 망상이 떠오른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런다면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참선이 되시겠습니까? 망상이 일어나든 안 일어나든 모든 것을 놓는 데서 나도 없고 분별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분별을 놓지 못하신다면 아마도 여러분을 놓지 못하고, 여러분 각자를 놓지 못한다면 일체 끄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보는 대로 망상이고, 보는 대로 망상이 쉰다고 합니다. 쉬는 것도 없고 망상이 일어나는 것도 없는 걸 알아야 합니다. 망상이 일어나는 건 뭐며 망상이 가라앉는 건 뭡니까? 그것이 다 어디에서 나오는 겁니까? 

항상 말씀드렸듯이 여러분 각자가 이 세상에 나지 않았더라면 고도 없고 멸도 없고 세상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났기 때문에 모든 게 있는 건데 과거도 생각지 말고 미래도 생각지 마시고, 남의 소리 듣고 이리로 치우치고 저리로 치우치지도 마십시오. 왜냐하면 내가 난 게 태초요, 내 몸뚱이가 난 것이 바로 화두요, 그리고 내 몸뚱이가 난 것이 진리요, 상대와 모든 일체가 다 같이 공존하는 것을 한마음이라고 합니다. 한마음은 어떠한 개별적인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가 한데 합쳐진 것이 한마음입니다. 그래서 손가락을 하나 들어도 같이 들리는 거, 그거를 실천궁행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분별하고 고집하고 저렇게 분별하고 고집한다면 언제 인간 세상을 벗어나겠습니까. 

바로 보고 바로 생각하고, 그 생각하는 것이 바로 무심법행이라고 알고 불심을 바로 무심종으로 삼아야 하지 않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무심법행을 그대로 여여하게 하는 것이 그대로 열반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따로따로 분별하기 때문에 가정에서 고생을 하시고 병고에 휘달리고 부적을 벼개 안에다 넣고 온통 붙이고 자시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미신 짓을 안 한다면 미신은 없는 것입니다.

화두가 잘 들리려면

질문 누구한테 화두를 받은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 ‘이 뭣고’ 화두를 들고 공부해 보려고 하는데 화두가 잘 들리질 않습니다. 화두가 잘 들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답변 우리가 몽땅 놓지 않으면 그 길에 들지 못합니다. 놔야, 거기에서 미지수의 세계에 스스로 의정 나는 게 있는 거지 아니, 번연히 알고 있는 것도, 이 뭣고? 사람이지 뭡니까. 이 뭣고? 물건이지 뭡니까. 아니, 아는 걸 돌리려니까, 의정을 내려니까 이게 의정이 진짜로 들어갈 수가 없는 겁니다. 예전에는, 몇백 년 전에는 그렇게 할 수 있었어요. 그것도 도대체 의정이 나니까, 모르니까 그랬는데 지금은 너무 잘 알잖습니까. 과학적으로나 생물적으로나 동물적으로나 생리학적으로나 모든 게, 의학적으로나 모두 잘 아니까 이거는 전부 아는 거예요. 아는 걸 의정을 내려면 내지나요? 스스로 내가 모든 것을 놓았을 때 스스로 홀연히 의정이 나오는 거지요.

그래서 의정이 날 때, 그때 의정을 내지 말고 믿고 들어가는 겁니다.  믿고 들어가서 ‘넌 알지? 진짜 너는 알지? 주인 너는 알지?’ 하고선 딱 홀연히 나를 내가 깊은 속에서 끌어내 가지고서 그때 같이 동시에 둘이 아니게, 하나로서 둘이 아니게 돼 가지고서, 그때에 돌면서 진짜 의정이 나는 겁니다, 그때는. 미지수의 세계를 돌면서 그때 진짜 손 아닌 손이 아니 닿는 데가 없고, 발 아닌 발이 길 아닌 길을 아니 닿는 데가 없다 이겁니다. 한 발로 디뎠어요.  그렇게 됐을 때 진짜 의정이 절로 나는 거지 어쩌자고 글쎄, 요기서 빤히 아는 놈의 걸 의정을 냅니까. 그래 가지고 무슨 의정이 됩니까, 그게? 

그러니까 보고 듣고 움죽거리게 하는 소소영영한 그 성품의 주인 녀석이 있는 거를 분명코 알았다면 ‘이 뭣고?’ 할 필요도 없다 이겁니다. 지금은 시대가 이렇게 바뀌었으니만큼 우리가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는 것이 전체가 참선이 아니라면 안 됩니다. 시간과 공간을 두고 우리는 참선을 한다,  좌선을 한다, 화두를 쥔다 이런다면, 아니, 내가 태어난 게 화두고 태초인데 거기다가 또 더 붙인다면 언제 어느 명년에 그 종 문서는 다 태워 버릴 수 있겠습니까. 

말도 하기 싫고 우울해요

질문 요즘은 말도 하기 싫고 마음이 우울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영성 강의도 들어보고 했지만 큰 변화는 없었습니다. 우연히 대행 스님의 법문을 접하고 관하는 공부를 해 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요.

답변 여러분한테 내가 항상 말씀드리죠? 여러분 육체 안에, 오장육부 안에 악업 선업이 뭉쳐서 중생들이 돼서 여러분을 고통스럽게 만드니 거기에 속지 말라고요. 여러분의 그 참나라는 중심의 참자기는 더하고 덜함도 없으며 당당하며 꿋꿋한 것입니다. 밝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악업 선업이 자꾸 농락을 해서 그것을 뒤집어쓰고 맞고 해서 여러분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저 꿈을 조금만 잘못 꿔도 ‘아이구, 오늘 뭐가 잘못되려나 보다.’ 조금만 이상한 생각이 들어가도 ‘아이구!’ 하고서는 나쁜 쪽으로 생각을 합니다. 이거는 생각 자체의 운전을 잘못하는 겁니다. 나쁜 생각이 들고 우울한 생각이 들고 말하기도 싫고 그렇다면 아, 그걸 조금만 돌리면 ‘그런 마음이 드는 것도 여기니까 그런 마음이 들지 않게 하는 것도 여기지.’ 아, 이러면 금방 돌아갈 거를, 그거를 노상 붙들고 있어요. 그러면서 뭐라 그러는지 아세요? 날더러 “이렇게 마음이 우울하고 말하기도 싫고 이러한 병과가 있습니다.” 그러거든. 왜 그걸 내게 말을 합니까, 예? 일체의 운전수는 당신이라고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용도에 따라서 당신 앞에 닥치는 대로 운전을 잘하고 가라고 이랬는데도 불구하고 왜 나한테 묻느냐 이겁니다. 

그런데 “그럼, 스님은 다 놓으라고 그러시면서 무슨 이유가 그렇게 많아서 토론을 하고 질문을 하랍니까?” 이런다면 한 가지 말씀을 드리죠. 도반들끼리 모이면 문짝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리만큼 신랄하게, 법을 구하는 데는 서로 문답을 청하고 또는 토론을 하고 이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하고 하는 데서, 이렇게 행하고 저렇게 행하는 데서 바로 체로 걸러서 내가 내 거를 만드는 수가 많거든요. 그리고 물리가 터지는 수가 많고 지혜가 생기는 수가 많습니다. ‘저런 건 저렇게 안 했으면….’ 하는 생각도 들고, ‘저거는 저렇게 해야 되겠다.’ 하는 생각도 드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나한테 질문을 했을 때, 질문을 했을 때의 그 음파를 내가 집어먹었습니다. 그럼 여러분이 한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또 여러분한테 내가 말씀을 드렸는데 여러분은 내 말의 음파를 듣고 먹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한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렇게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서로가 자력과 전력과 광력과 통신력이 충만하게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이쪽에서 말을 했으면 그쪽에서 먹고, 그쪽에서 말을 했으면 이쪽에서 먹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력과 같아서 오고 가는 것도 없이 통신이 됩니다. 무전통신이 왔다 갔다 하죠? 물이 없으면 전력이 없죠? 이 모두가 묘법입니다. 이 묘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들이 살아나가는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이 내가 말하는 거를 먹어 버리고 내가 여러분이 말하는 거를 먹어 버렸다면 그냥 무(無)죠? 한 사이가 없죠? 그런데 그렇게 끄달릴 수가 없는 겁니다. ‘스님이 말을 하지 말랬는데, 그냥 놓으라고 그랬는데….’ 아, 이렇게 옹졸할 수가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우리들한테 일러 주신 거와 같이 찰나의 생활이 길이며, 너 나가 있는 생활이 바로 이 진리다 이겁니다. 그러면서도 너 나가 한 사이 없고, 뜬구름과 같고, 뜬구름과 같으면서도 그 속에는 분명 네가 있고 내가 있습니다. 금방 말했으면서도 금방 먹어치워 없애 버리고, 물질은 변질돼 가도 뿌리는 영원하듯이. 우리는 이 뿌리의 영원함을 발견하고 자유스럽게 살기 위해 공부해 가고 있습니다. 저 우주의 근본도 인간의 마음의 근본과 직결돼 있다는 요거 한 마디라면 모두가 될 수 있다는 거, 들을 수 있다는 거, 볼 수 있다는 거, 판단할 수 있다는 거 모두가 거기에 종합되는 겁니다. 일일이 이렇게 한마디 한마디 해야 아시겠습니까? 

예전에 선지식이나 그런 분들은 풀섶을 지날 때는 짚신에다가 방울을 달고서 뇌성벽력이 치고 비바람이 쳐도 그냥 드문드문 팔자걸음을 걸었습니다. 그건 왜? 생명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죠. 걸음을 드문드문 걸었던 까닭은 바로 이 마음을 항상 무겁게 생각을 할 수 있는 그러한 마음, 항상 움죽거리지 않는 마음을 무겁게 두고 걸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지내 보면 아시겠지만 풍청풍청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펄떡펄떡 뛰면은 어떻게 하루를 지냈는지도 모르게 그렇게 되겠죠. 그러나 일하면서도 깊이 생각하면서 또는 길을 걸으면서도 깊이 생각하고 또는 차를 타고 가면서도 깊이 생각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나를 내가 자재하면서, 질서를 지키면서, 문란하게 하지 않으면서 2세, 3세의 나를, 길을 인도하는, 또 뿌리에 물을 주는 그러한 행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스스로 자기 운전수를 믿고, 운전수가 바로 마음이라면 마음이 있기 이전 바로 그 기름, 누구나 줄 수 있고 누구에게나 쳐 줄 수 있는 부처님의 기름을, 항상 서로 주면서 자기 속에서 내면의 자기 주인공만을 믿고 거기 놓으십시오. 편안하게 놓으세요. 그러면 아주 공부 길이 탁 트일 겁니다,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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