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몸 떨어지기 전에 이 뜻을 알고 가야 될 것 아닙니까

‘내가 부처가 돼야지.’하지도 말고 
‘ 내가 지옥에 떨어지면 어쩌나.’하지도 말고
‘죽으면 어쩌나. 살아야겠다.’ 하지도 말고 몽땅 그대로 
여여하게 그냥 자기를 믿고 놓고 근본 자리에서 해결하라.

우리가 대의적으로 따져 볼 때는 항상 한마음 도리로서 돌아가지만, 또 너 나가 있듯이, 여러분한테 항상 말씀해 드리죠. 여기 오늘 처음 오신 분도 있고 듣지 못했던 분들도 있고, 그래서 여러분이 납득할 만한 기초적인 문제, 자기 자신을 먼저 믿고 알아야 한다는 그 사실, 항상 말씀해 드리지만 그래도 오늘 잠깐 또 얘기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바와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는 제일 처음에 사성제를 설했습니다. 고집멸도 사제법은 여러분 다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물리가 터지고 지혜를 얻고자 하는 분, 자기가 자기를 먼저 발견해야만이 자기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적으로나 세계적으로나, 우주적으로나 모든 것을 다 커버하고 자기가 자유자재권을 얻는다고 그렇게 생각하시고 가시는 분들은 똑바로 들으셔야 합니다. 

항상 말씀드리듯이 인과로 인해서 뭉쳐진 여러분 속에 들어 있는 의식들, 모습, 생명 그것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고덩어리라는 얘깁니다. 우리가 벌써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고라는 얘깁니다.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짐승들도, 하다못해 지렁이도 어떠한 생명들도 다 고입니다. 쫓고 쫓기면서, 울면서 쓰라림을 당하면서, 짓밟히면서 일어서면서 이렇게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여러분입니다. 

그런데 왜 내가 사성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드리느냐 하면 첫째, 고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고를 어떻게 해야만이 멸하게끔 할 수 있고 또는 착이 없게 할 수 있느냐는 얘깁니다. 도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해야만이 그 고 하나를 없애느냐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한테 그 고를 없애는 도리를 일러 드린 겁니다. 고만 없애면 집도 없어지고, 멸도 없어지고, 도라는 언어도 없어진다는 얘기죠. 그러면 여러분을 어떻게 인도했느냐는 얘깁니다. 

“여러분한테 누구나가 다 오신통이 있다. 바로 그 오신통 가운데 숙명통이 컴퓨터다. 과거에 입력된 것이 거기에서 다 현실에 나오는 것이니까 거기에다 되입력을 한다면, 앞서에 입력됐던 인과, 유전 또는 영계, 세균, 업보가 녹는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과거에 입력된 게 지금 현재에 나오는 거니까 운명 팔자 타령하지 말고 거기에다 놔라 이랬습니다. 거기에다 입력을 다시 시키는 반면에 앞서의 입력됐던 것이 없어지니까 모두 무너집니다. 지옥고도 무너지고 그 업보에, 그 유전에, 영계에 끄달리는 모든 것이 다 무너집니다. 

무너지는 반면에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착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한군데다 놓고 들고 나고 이렇게 하는데 몇 가지가 없어집니까? 그러니 이론으로 달달달달 외울 생각을 하지 말고 백 번을 외우는 것보다도 한 번 실천하는 그러한 정신을 가지고 우리가 공부해야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날더러 모든 것을 체계 있게, 일관성 있게 설법을 해달란다면, 그건 죽은 설법과 같습니다. 체계가 없으면서도 체계가 역력하게 있는 그런 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고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과거에서 나오는 거든 보이는 데서 나오는 거든 둘이 아니게 나오는 그 자체는 본래 공이다 이겁니다. 부처님께서는 “공과 색이 둘이 아니니라.” 하셨는데 왜 그랬을까요? 왜 둘이 아니라고 했을까요? 그 참 중요한 말씀이었습니다. 색으로 보이는 여러분 마음이나, 보는 거나, 듣는 거나, 말하는 거나 모두가, 가고 오는 것도 고정됨이 없습니다. 고정된 게 없으니 색과 공이 어떻게 둘이겠습니까? 그래서 그 하나만 없앤다면 여러분은 밝은 심안의 심지에 불을 당길 수가 있다 이 소립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거와 같이 그렇게 ‘고니까, 그것은 내가 면할 수가 없지, 나는 중생이니까.’ 이렇게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무시하고 자기를 믿지 않는 거는 진짜 부모한테서 자기는 물러서서 다른 부모 찾으려고 애를 쓰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런데 여러분한테 제가 인도하는 길은 ‘주인공에서 나오는 거니까’라고 하는 겁니다. 그건 오신통을 비유한 팩스나 천체 무전통신기나 또는 탐지기나 망원경이나 숙명통 컴퓨터나 레이더망에서 지금 오고 가는 걸 다 책정하듯이 그렇게 모두 하고 있는 누진통까지, 전체 시스템이 돌아가는 그거를 몽땅 한데 합쳐서 거기서 나온 거니까 거기다가 맡겨 놓고, 잘못된 거는 거기서 다시금 잘되게 할 수도 있고, 잘된 거는 감사하게 거기 놓고 가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체 자기라는 게 없이, 공해서 자기라는 건 없습니다. 그거를 몽땅 거기다 놓고 작업을 한다면 잘되는 것도 거기, 못되는 것도 거기, 그렇게 모든 것을 놓고 간다면 바로 그게 고를 녹이는 작업입니다. 고를 녹이다 보니깐 착도 없어져 ‘야, 그것이 누구 탓이냐? 내 탓이지.’ 

그것이 바로 좌선이고, 마음이 편안해야 좌선이지 어찌 몸이 편안하게 앉았다고 해서 좌선이 될 수 있겠느냐 하고 생각을 하면서 모든 것을 놓을 때, 모든 착도 다 없어지고 욕심도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할 말만 하고 묵묵히 걸어가는 그 발 한 걸음 한 걸음이 그렇게 법전에서 떨어지지 않죠. 그러니까 이 세상을 다 딛고 가는 거나 똑같은 거죠. 평발이죠. 말 한마디, 무겁게 평등하게 부드럽게 해 주는 그 말 한마디가 온 천하에, 법계에 두루 하니 그게 법에서 떨어지지 않는 거죠. 한데로 떨어지지 않는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도 많겠지만, 지금 절에서 승려들도 그렇게 가르치고 강원에서도 가르치고 그러지만, 그전에도 얘기했듯이 백지부터 갖다 놔야, 책 종이부터 갖다 놔야 연필을 들 수 있다 이 소리입니다. 여러분의 바탕이 그렇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항상 말씀드렸죠. 여러분의 바탕이 지수화풍의 바탕이기 때문에 여러분한테 그 재료, 광력, 전력, 자력, 통신력이 충만하게 재료로 갖추어져 있으니, 그 오신통은 바로 법바퀴를 굴려서, 불바퀴도 되고 물바퀴도 되니 그거를 굴려서 자유스런 자유인이 되라 이 소리죠. 처음 오시는 분도 있고 그래서 이런 말을 항상 되풀이하게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반야심경이든지 뭐든지 달달달달 외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금강경에도 “아뇩다라샴먁삼보리의 그 법도 없느니라. 그 법 안에 그 뜻도 없느니라.” 이랬을 때는 그 뜻을 아시겠습니까? 아무리 금강경을 달달달달 외운다고 그래도 그 안에 그것도 없느니라 한 뜻을 아시겠습니까? 보살은 이름해서 보살이니라. 그런데 내가 건졌다, 내가 건질 수 있다, 내가 건지겠다, 나다, 이렇게 하는 그런 사람들은 보살 될 자격이, 이름해서 보살이라는 그 이름 들을 자격도 없다고 그랬습니다. 입으로만 달달달달 외워서 강의를 해 주는 것도 이름해서 보살이라는 그 자체의 이름조차도 가질 수가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성제에서 제일 첫머리의 고만 없앤다면, 여러분은 그대로 저절로 도라는 언어도 붙지 않는 그 도를, 그대로 자유스럽게 대권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얘깁니다. 

지금 세상에 80까지 산다 하더라도 이 몸을 가지고 도저히…, 그러면 또 이 몸을 벗고서 공부를 할래도 또 그 타령이 그 타령이야. 도루묵이야. 그러니 몸이 떨어지기 전에 이 뜻을 알고 가야 될 것 아니냐는 얘깁니다. 그래서 요다음에 나와도 뚜껑만 열면 나오게끔요. 어떠십니까? 트릿하게 공부하시겠습니까? 누가 대신 먹어 줄 수 없는데요. 이 공부는 틀림없이 대신 먹어 줄 수도 없고, 죽을 때에 같이 가 줄 수도 없고, 똥 눠 줄 수도 없듯이 대신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항상 영원히 같이 둘이 아닌 도리를 아셔야 되겠기에, 사성제의 첫머리의 고덩어리를 녹이는 그 작업만 해라 이런 겁니다, 토막토막 한 토막씩. 이제 이건 이쯤 해 두고요.  

옛날에 무착 대사가, 저 치악산에 있을 때 그것도 얘기 들었습니다마는, 뭐, 꿩 치(雉) 자를 써서 치악산이니 이렇게 말들을 하더군요. 거기로 절터를 보려고 갔다가 꿩이 알을 낳고 있는데 큰 구렁이가 알을 먹으려고 나무 위로 올라가니깐 그냥 활로 쏴서 떨어뜨려 죽였거든요. 알은 살렸으나 그 구렁이는 죽였죠. 그런데 저녁나절이 됐는데 무착 대사가 하룻밤 드새겠다고 하니까, 하얗게 소복한 여자가, 나와서 하는 소리가 “들어오십시오.” 하더랍니다. 

그래 들어가니까 밥상을 차려왔는데 젓가락 한 짝만 놨더랍니다. 그래서 무착 스님은 물그릇 국그릇에다가 탁 손을 넣어 가지곤 밥을 갖다가 그냥 먹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 여자가 있다 하는 소리가 “당신이 내 낭군을 죽였어. 그러니까 당신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이랬는데, 정히 그렇다면….” 했습니다. 그 젓가락 한 짝 놓은 거하고 손으로 집어 먹은 거하고 어떠한 문제가 있어서 그렇게 “정히 그렇다면” 했을까요. 

“정히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감고 있는 동안에 종이 울린다면 내가 당신을 풀어 주고, 내가 죽겠으니 나까지 마저 거두어 주시고, 만약에 이 종이 울리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원수를 갚겠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묘한 것이 말입니다, 젓가락 한 짝만 놨는데 그분은 왜 젓가락 한 짝을 갖다 놨느냐, 왜 숟가락은 안 놨느냐, 숟가락 좀 달라 이게 없이 아무 소리 없이 물을 탁 축여서 그걸 집어 자셨다 이겁니다.  

그래서 먹고 나니 아, 그냥 구렁이로 변해 가지고 자기를 탁 감거든요. 그래 감고 있으니까 아침 새벽에 종이 세 번이 울리더랍니다. 울리니깐 풀어 주면서 하는 소리가 “나까지 마저 거두어 주소서.” 하고선 그냥 풀어 주면서 아예 가 버렸어요. 그 순간에 구렁이는 몸이 가 버렸단 말입니다. 그랬는데 나중에 보니까 꿩이 말입니다, 날아갔다가 와서 떵 치고선 또 날아갔다 와서 떵 치고 그러느라고 코가 아주 뭉그러져서 죽었단 말입니다, 그 자리에서. 

그래서 꿩하고 구렁이하고 모두 세 개를 갖다 한 구덩이에다가 막 묻으려고 하니까 웬 스님이 가면서 하는 소리가 이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부처님의 자비로서 알을 살리느라 그랬다지만 어떻게 생명 셋을 다 죽여서 그렇게 하는 것이 자비일 수 있겠습니까?” 했습니다. 그러니까 무착 스님은 그 대답을 이렇게 했습니다. “서천의 돌이 동쪽에 꽃이 피었네.” 하고요. 그 소릴 듣던 스님은 “아하! 이 요리 맛이 이렇게, 탕 맛이 이렇게 좋은 줄은 난 미처 몰랐네.” 하면서 껄껄 웃고 돌아서서 가거든요. 

멋진 거 아닐까요? 젓가락 한 짝 놨는데도 손을 담가서 먹었고, 셋을 다 한데 합쳐서 했는데 “그거 알 살리겠다고 세 생명을 다 죽이고 자비가 될 수 있겠느냐?” 하니까 “서천의 돌이 동쪽에 꽃이 피네.” 하는 소리를 하니까 그쪽 사람 또 멋져요. “탕 맛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하면서 무릎을 치고 껄껄 웃고 돌아서서 가더라 이겁니다.  

내가 나를 발견하지 않고는 이런 도리를 몰라요. 그럼으로써 여러분이 책을, 팔만대장경을 외로 꿰고 바로 꿴다 할지라도, 법설을 아무리 잘한다 하더라도 충전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광력과 전력, 통신력이 충만하게, 구르질 못하기 때문에, 굴리질 못하기 때문에 이익이 하나도 없어. 말 떨어지면 입 떨어지고 입 떨어지면 몸도 떨어지고 아무것도 없어. 공덕이 안 돼. 달마 대사가 말씀하셨듯이 공덕이 될 수가 없어. 남을 이익하게 할 수도 없거니와 자기 자체도 이익하게 할 수가 없다 이거죠. 

내가 만약에 실험을 하지 않고 체험을 하지 않고 이런 말을 한다면, 이 말도 모두가 허사고 아마 그냥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토막의 이치지만 아주 성성하고, 그렇게 광대무변할 수가 없고, 그렇게 청정 자재천궁, 그 자재의 대권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멋질 수가 없어요. 이렇게 멋지게 자유스럽게 살고 갈 수 있는 영원한 이 길을 여러분이 등한시한다면, 그건 정말 안 될 말입니다. 

이렇게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장마다 나는 것은 아닙니다. 눈을 뜬 사람이 끌고 갈 때는 둘이 다 빠지지 않지만 눈을 감은 사람이 눈을 감은 사람을 끌고 갈 때는 둘이 다 빠지게 돼 있습니다. 그거는 우리 지금만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라 역대의 조사들이 다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리고 이 사회의 이치도 그렇습니다. 둘이 아닙니다. 

인과에 대해서 또 한 토막의 얘기를 하죠. 춘천에서 있었던 얘깁니다. 어느 분이 참 극난히 돈을 벌어서 잘돼 가지고 집을 짓게 되어서 집터를 보러 다녔습니다. 집터를 보니까 참 좋은 데가 있어서 터를 닦는데 아, 구덩이 구덩이 그냥 몇 구덩이가 전부 뱀 소굴이더랍니다. 그래 뱀을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그냥 그 구덩이에다 기름을 끼얹고 불살라 버렸습니다, 구덩이마다. 그래 그럭하고 다 치우고선 집을 거기다 지었습니다. 

짓고 났는데 아들이 성장해서 장가를 들어서 애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애가 병이 들었습니다. 또 자기 아들도 병이 들고 손주도 병이 들었습니다. 그냥 몸이 붓고 배가 부르고 점점점 커지는 겁니다. 그래서 뭐, 아들들이 어디 취직을 할래도 그런 문제 때문에 됩니까? 또 자신은 진급도 되질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애가 딱 죽게 됐는데 그냥 뱀 새끼들이 꾸역꾸역 그 몸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렇게 죽으니까 또 갖다가 기름을 끼얹고 그거 화장을 시켰지 어떡합니까, 너무 징그러우니까. 

화장을 시키고 났는데 아버지가 또 돌아가시더랍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그저 하루 이틀 사이로 그냥 돌아가시더랍니다. 그래서 어머니하고 아버지하고는 자기 산에다가 묻었습니다. 그럭하고는 한 이삼 년 갔는데 아, 이 산소에 가 보면 구멍이 송송송송 뚫렸더랍니다. 그래 구멍이 송송송 뚫리고 어느 때는 집 마당에도 울타리에도 뱀이 척 걸쳐 있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고 이러더랍니다. 

그래서 어디 도인이라는 스님을 만날까 해서 아무리 찾아도 도인 스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스님 좀 만나게 해 달라고 얼마나 정성을 들였던지 그 해 일 년을 그렇게 그냥 꼭 물을 떠 놓고 향을 피워 놓고 정성을 들였더니 아, 삿갓 쓴 허름하게 입은 스님이 지나가더랍니다. 그 스님을 붙들고 그 사실 얘기를 다 하니까 그러냐고 그러면서 “그 산소에도 있고 지금 집터에도 뱀 소굴이 그렇게 있어서 아버지 어머니의 뼈 마디마디까지도 전부 뱀이 돼 버렸어.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려느냐?” 이랬답니다. 

“아이! 그러면 안 듣겠습니까?” 하니까 그 스님이 군데군데 망을 치라고 그러더랍니다. 저 왜, 병아리 가두는 그런 거 있죠? 그렇게 망을 쳐 놓고 그 안에다가, 예전에는 겨가 많지 않습니까? 집집마다 겨가 있으니까, 겻불을 피워 놓고, 하얀 죽을 그 큰 함지박에다가 이 집터에도 세 그릇, 저 산소에도 세 그릇 갖다 놓고는 그저 자기가 시키는 대로 그렇게만 해 놓는다면 당신을 살리겠노라고.

그래서 그렇게 해 놓고서 있었는데 그 스님이 그냥 가만히 앉아서 있는데 그 산소 구멍 뚫린 데로요, 그냥 수없이 뱀들이 나오더랍니다. 집에서는 그 기둥 밑에서 수없이 나오더랍니다. 수없이 나와 가지고는 그 죽을 잔뜩 먹고는 그냥 다 죽는 겁니다, 거기서. 다 죽었어요. 죽어가면서 기어서 그리로 다 들어가니까 거기에서 그냥 타서 그 껍데기는 없어지더랍니다. 

그러니까 그 스님이 아버지의 영혼을 건졌다고 하시면서…, 그러고 나니 그 집안에 그런 일이 하나도 없어졌답니다. 그래서 그 동네가 전부 불자가 되고 그 식구는 전부 승려로서 입산을 하게 됐더랍니다. 그런 얘기 한 토막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인과라는 것이, 그래서 첫째, 살생을 하지 말라 그랬는데 항상 여러분한테 ‘묘한 도리가 있다’ 이런 말을 했죠. 부모를 위해서 토끼 한 마리를 잡아야 할 텐데 어떡하면 살생이 되지 않나를 얘기해 드렸습니다. 일부러 생명을 죽이라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급할 때는 그 토끼도 내 몸이요, 토끼의 생명도 내 생명이요, 토끼의 그 마음도 내 마음이니, 바로 그 토끼를 죽이는 순간 죽인 게 아니라 자비라 이겁니다. 토끼는 바로 나로 인도환생이 됐단 말입니다. 들어가도 들어가도, 토끼를 만 마리를 죽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람으로서 인도환생이 됐기 때문에 탕 요리를 한 거죠. 탕 요리예요. 

그렇다면 그것은 약으로도 쓸 수 있지만 그것은 요리도 된 거죠. 영혼을 요리해서 그 껍데기를 벗겨 주고, 토끼라는 껍데기를 벗겨 주고서 인도환생을 시킨 거죠. 한순간에 말입니다. 그래서 들여놔도 들여놔도 그것이 두드러지지 않고 그거를 몽땅 내서 천도를 시켜도 내간 사이가 없다 이거죠. 줄지 않는다 이거죠. 이 도리가 바로 거기에, 여러분이 깨치는 도리에 거기도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일체 만법이 전부, 행이 전부 도 아닌 게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 참 광대무변한 도리다, 이런 문제죠. 

그래서 이러한 한 토막의 인과에 대한 이야기, 여러분이 그런 것도 옛날 전설의 고향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고 현실에 그렇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항상 인간으로만 사시는 게 아니라, 지금 공부 열심히 하셔야만이 아마 그런 데에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런 데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야 이 도를 또 이루게 되는 것이죠. 뭐, 그렇다고 해서 ‘내가 부처가 돼야지.’ 하지도 말고 ‘내가 지옥에 떨어지면 어떡하나.’ 그러지도 말고 ‘죽으면 어쩌나.’ 하지도 말고 ‘살아야 하겠다.’ 하지도 말고 몽땅 그대로 여여하게 그냥 자기를 믿고 놓고 여기서 해결하라 이거죠. 

자기 자신이 없다면 세상도 없고 자기 자신이 없다면 상대도 없고 자기가 나왔으니까 나쁜 거 좋은 게 내 앞에 닥치니까 모든 게 내 탓이다 이거야. 좋은 것도 내 탓 언짢은 것도 내 탓이다 이거야. 누구의 원망이나 그런 것도 하지 말고. 모든 게 그렇게 나간다면 이자에 이자가 붙어서, 이자까지 붙어서 여러분한테 공덕이 될 겁니다. 

여러분, 잘 생각하셔서 몸뚱이가 보지 않았어도 “아이고, 나는 오늘 큰스님….” 그건 여러분이 부르시는 큰스님입니다. 내가 커서 큰 게 아니라, 여기 스님네들이 많고 그러니까 이름을 어떻게 붙일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늙은이를 큰스님이라고 그러고, 조금 젊은이를 총무 스님이라고 그러고, 시자 스님들이라고 그러는 거거든요. 여러분도 아버지라고 그러고 아들이라고 그러죠? 큰아들 작은아들 뭐, 이렇게. 

그런 거와 같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우리는 그냥 정돈해서 살자, 부지런히 뛰자 이런 건데, 그 보세요. 지난번에도 하나 하니까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하는 것도 그 격이죠. 하나 하니까 하나 해도 하나요, 천 해도 하나야. 둘 해도 하나고, 셋 해도 하나고, 하나 해도 하나고. 너무 많으니깐 또 한 그릇 이러다가 나중에는 너무 많으니까 하나도 없다, “무(無)” 이래 버렸거든. 그러니 그 무심 속의, 바로 그 무심 속의 심지에다가 불을 당겨라 이겁니다, 불을 당겨. 자가발전소야, 여기가(가슴을 짚어 보이시며). 아무리 천둥 번개를 하고 비가 막 쏟아져도 꺼지지 않는 자가발전소. 

여러분, 처음에는 용광로에 넣었다가 작업을 하고 나니까, 나중에 두 번째는 자가발전소가 되고, 나중에는 넣어도 넣어도 정말이지 두드러지지 않고 꺼내도 꺼내도 줄지 않는 그런 자유자재의 대권을, 그대로 법자를 마음대로 굴려도 한데 떨어지지 않게 그렇게 불바퀴를 타고 다니면서 법바퀴를 굴리고 말입니다, 물바퀴를 굴리고 용이 돼서 들어왔다 나갔다 해도 수많은 고기들을 다 먹이고도 남음이 있으니까, 들락날락하고 꽃이 피고 새 우는데, 앞뒤 없는 펑 뚫린 피리를 불어 가면서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 그 뜻을 잘 아셔야 합니다. 

※위 법문은 대행 선사 법문집 ≪허공을 걷는 길≫ 중 1990년 10월 21일 정기법회 법문의 일부를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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