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빼놓고 부처 보살이 따로 있다고 보지 마세요

한 번 생각해서 놓는 데 지옥고가 찰나찰나 무너지니
그 수없는 지옥고는 다 무너지게 돼 있습니다.
그 지옥고가 무너짐으로써 
나의 밝은 본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더불어 또 만났군요. 항시 같이 돌아가는 이치를 여러분은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체를 아신다면 역대 조사들과 더불어 나도 거기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지난번에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하고 나가다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얘길 해 드렸더라면 하는 그런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거 한 가지만 남지 무슨 소릴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생사도 둘이 아니다 하는 뜻을 몸으로써 실감하고 체험해 봐야 된다는 걸 아실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우리 생활이 과학일 수도 있고 우리 한생각, 태어나기 이전 본성이 그대로 에너지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질량은 우리가 많은 마음을 내고 고정됨이 없이 행을 하는 그러한 쪽으로 비유해도 됩니다. 

그런데 생사는 둘이 아니다. 물론 그렇죠. 영원한 생명의 본성과 마음 내는 자체가 어떻게 둘이겠습니까?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에 마음을 낼 수 있고, 고정되지 않게 수많은 마음을 낼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게 둘이 아닌 까닭에 우린 몸도 있고 몸을 움죽거리기도 하고 상대성 원리도 돌아가고 이렇게 무진한 법이 우리들 살아나가는 데에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헤아릴 수 없는 업보와 더불어 지옥고를 면하지 못하고 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생이 다 그렇다고 봅니다. 인간으로부터, 수없이 날아다니는 짐승으로부터 모든 걸 따져 보십시오. 사생을 헤아릴 수 있겠나, 벌레로부터. 

지난번에도 그런 얘길 했지만, 업보를 면하는 길은 어떠한 것이라야 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업식으로 인해서 업보가 되고 업보로 인해서 인과가 되고 인과로 인해서 이렇게 뭉쳐진 몸뚱이를 가지고서…. 저녁에 한 삼십 분 동안씩이라도 이 몸뚱이가 뭉쳐진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딴 데를 볼 게 하나도 없어요. 첫째, 공부를 하려면 그것부터 알아야 된다는 얘깁니다. 지난번에 한 얘기를 반복하지마는 조금 더 핵심적으로 말씀을 드릴게요. 

여러분이 몸 안을 가만히 볼 때에, 항상 말씀을 드려서 아시고 계시겠죠, 중생이 수십억 마리라고. 그런데 그 중생들이 말입니다, 나는 모두가 부처 아닌 게 없다고 하지만 그 부처 속에는 중생들이 수없이 있다는 얘깁니다. 그 중생들은 용도에 따라서 모두가 업이 된 것입니다. 업식으로 말미암아, 인과로 말미암아 인연에 따라서 우리가 이렇게 모인 거거든. 

예를 들어서 내가 남에게 못 할 일을 했다 이런다면 그 업으로 인해서 만난 인연이 되고 또 때에 따라서는 내가 짐승을 때려죽였다 하면 그 업으로 만난 인연이 되고 할 테니까요. 그러니 헤아릴 수 없이 그 고(苦)가 뭉쳐진 덩어리인 셈이죠, 선이고 악이고, 잘했든 못했든 우리가 살면서 지은 게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살아나가는 이때만 생각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린 사생을 거쳐서, 백지장 하나 사이를 넘어서 진화된 거를 한번 생각해 본다면, 그렇게 모습을 바꿔 가면서 수십억 광년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 업식을 통해서 인과가 되고 인과를 통해서 인연이 돼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인간까지 뭉쳐서 됐다는 그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면 헤아릴 수 없이 그렇게 오면서 벌레로 살다가 업을 짓던 것, 또 짐승으로 살다가 업을 짓던 것, 날아다니는 새로 살다가 업을 짓던 것, 인간으로 살면서 또 업을 짓던 것, 이렇게 지었던 모든 것이 한 생각에 나오는 게 모두가 업보에 의해서죠. 지옥고도 천차만별의 지옥고가 있다 합니다. 그것은 생각해 보면 아시듯이 우리 세상살이 살아나가는 데에도 지옥고가 천차만별로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죠, 땅속에서 사는 벌레들은 흑암지옥이라고 불린다고. 독사지옥도 그중의 하나죠. 이러한 한 가지만 얘기하면 헤아릴 수 없는 그 지옥고를 생각하세요. 천차만별로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옥고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번 ‘주인공’을 생각해 봅시다. 이 몸속에 있는 헤아릴 수 없는 그 중생들이 제가끔 너 나가 있는 데서 너 나 없는 데로 들어서, 즉 무심도를 깨쳐서 다시금 너 나가 있는 데로 다시 나오는 것이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겁니다. 천차만별로 되어 있는 이 업보의 구덩이에서 용도에 따라 자기가 업 지은 대로 자꾸자꾸 나오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잘산다 못산다, 질병을 앓는다 가환이 온다 이러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것이니 남에게 무꾸리나 해서 그걸 제거시키려고는 아예 하지 마세요. 어리석으니까 말입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인연으로 말미암아 뭉쳐진 건데, 지금 현실에 솔솔 그것이 한 찰나에 나오고 있는 거에 속지 말라 이겁니다, 모두가. 속지 않고 진짜로 믿고 놓을 수 있다면, 하나하나 용도에 따라서 나오는 대로 거기에다가 맡겨 놓으시라 이겁니다. 그럼 뭐가 어떻게 되느냐. 맡겨 놓는 대로 그것은 화해서, 즉 말하자면 생산이 되는 겁니다. 나와서 보살로 화하는 겁니다. 

만약에 아픈 것을 놓고 병이 나았다 했다면, 놓는다면 그것이 약사가 돼 버려요. 서로 때리고 치고받고 이래서 업보를 받은 게 악으로다가 돌아왔는데도, 그러니까 중생들이 자꾸 돌려서 내 마음을 충동질시키고 어려웁게 만들고 또 우환이 끼게 만들고, 때리고 주고받게 만들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는데 그것을 놓는다면 바로 약사로 화한다는 얘깁니다. 하나 화했으면 다음에 또 나오는 걸 거기다 놓으면 또 화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수없는 나날을 보임하면 바로 전체가 다 보살로서 화합니다. 보살로 화하면 그것이 광이 나서 삼십이상이 구족하다고 하는 겁니다, 이 색깔 이 빛이. 예를 들어서 몸뚱이 물질 자체가 모두 금광으로서의 자력이나 광력이나 전력이 충만해서 같이 돌아가니까 어디 가서 섰어도 남한테 해롭게 안 하고 그 빛을 비춘다 이겁니다. 또 안으로는 삼십이응신으로서 그 수많은 사람들이 다 와서 말을 안 하고 가도, 정직하고 진실하다면 그 집을 벌써 왕래하고 계시다 이겁니다. 

수십억 마리의 그 중생들이 다 화해서 보살로서의 활용을 한다면 이 우주에 차고도 남고, 아니 계신 데가 없이 찰나의 살림살이를 얼마나 잘하겠습니까? 여러분, 잘 생각하세요. 한 번 놓는 데 지옥고가 무너진다고 했습니다. 한 번 생각해서 놓는 데 지옥고가 찰나찰나에 무너지니 그 수없는 지옥고는 다 무너지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지옥고가 무너짐으로써 나의 밝은 본성이 나타나는 겁니다. 

육조단경에도 그랬듯이, 여러분이 잘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마음은 체가 없으니 여러분 앉아서 부산을 한번 갔다 와 보세요. 한 찰나의 살림이 아닌가. 그런데 만약에 물이 있어서 못 건너간다, 배가 있어야 한다, 또 뱃사공이 있어야 한다 이런 것은 비유를 해 놓으신 것뿐이죠. 여러분이 한번 자심(自心)을 연구해 보세요. 지금이라도 집을 갔다 오시라면 금방 한 찰나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집을 갔다 오시라고 했는데 강이 끼었다고 칩시다. 그러나 마음이 강이 끼었다고 못 갔다 오시겠습니까? 마음은 그렇지 않죠? 

그래서 옛날에 육조 스님도 말씀하셨듯이, 신수 대사가 말씀하신 거를 되받아서 “틀이 없는데 명경이 어딨으며, 명경이 없는데 먼지 앉을 데가 어디 있느냐.” 하고 말을 했듯이, 우리 마음 자체는 한 생각 잘하면 이 세상을 다 주름잡을 수 있고 한 생각 잘못하면 구덩이에 빠져서 허덕인다 이겁니다. 우리 한 생각에, 마음을 깨쳐서 정신세계로써 정신통일을 하고 정신통일로써 이 세계를 우리 한 생각에 넘어설 수 있다면 여러분은 대인에 가깝고 자유인에 가깝고 부처입니다.  

부처라는 것은 부처가 없는 것이 부처기 때문에 항상 보살로서의 활용을 할 수 있고 가만히 있으면 부처요, 한 생각을 했다 하면 법신이요, 활용을 했다 하면 화신입니다. 이것이 다 보살의 중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빼놓고 부처님, 보살이 따로 있다고 보지 마십시오. 우리들 생활 속에서 그러한 연구를 하신다면 어떠한 사업을 하든지, 가정을 이끌어 나가시는 분들이라도 그것은 끊임없이 걸리지 않고 순조롭게 화합을 이루면서 허망함을 느끼지 않으면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업보를 녹이는 방법이 놓는 방법이다, 맡겨 놓는 방법이다. 나를 발견하는 방법도 놓는 방법이다. 그러니 “첫째, 놓고 나를 발견하라! 나부터 발견하지 못한다면 모두 상대를 모른다. 상대를 모른다면 바로 한 치도 움죽거릴 수 없다. 무의 법에서 모두 유의 법으로 나오고 유의 법에서 무의 법으로 드니 이것은 한생각 무심이다.”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이 도리를 알게 하기 위해서 항상 되풀이하는 것을 탓하지 마세요. 되풀이하는 말 자체를 새겨 봐서 그 말 자체가 없어지도록 여러분은 아셔야 할 겁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말을 좋게 해서 여러분의 귀만 즐겁게 한다면 잘못이다 하는 것을 느낍니다. 여러분이 마음으로 스스로서 절감하고 감응이 돼서 여러분 마음에서 스스로 한생각을 낼 때에 그것이 법이 됩니다. 여러분이 체험하고 차츰차츰 삶의 보람을 느끼면서 또는 허망함을 느끼지 않는 법이 거기에서 나오는 거지 다른 게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업보를 지니고 나왔으면 팔자 운명을 어떻게 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는데 그거는 모르는 소리, 모르면 그렇다 이겁니다. 바깥으로 끄달리면 더 업보를 지을 뿐, 그것을 무마시킬 수는 없고 녹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하나 들어오는 대로 바깥에서 오는 경계도, 안에서 일어나는 경계도 모든 것을 거기에다 놓는다면 모든 업보가 무너지는 거죠. 

지옥고가, 천차만별로 돼 있는 지옥고가 무너지게 되자, 고르고 골라서 씨를 뿌린 밭에다 물을 주면 싹이 모락모락 나오듯, 내 마음의 근본이 바로 모락모락 나오게 되죠. 그럼으로써 지혜가 생기고 남을 원망하지 않게 되고 묵묵히 걸어가게 되고, 한 발을 떼어 놓을 때에 무겁게 떼어 놓게 되고, 말 한마디 할 때 한번 굴려서 무겁고 지혜 있게 말을 하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그 말 한마디가 법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이렇게도 말하는 분들이 많죠. “저 스님은 이거는 이렇고 저거는 저렇다고 똑 떨어지게 말하지 않고, 항상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게 얼버무려 놓는 사람이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죠. 그러나 딴 사람들이나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내가 여러분이 나쁜 짓을 했다고 해서 나쁘다고 한 번만 말을 해놓고 한 번 생각했다면 그 사람은 좋아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다’고도 아니 하고 ‘나쁘다’고도 아니 하고, 강도도 강도가 아니라고 하지도 않고 강도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 어찌 마음으로 ‘저건 강도다’ 그러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말을 하겠습니까? ‘이건 선자고 이건 악자다’ 이렇게 어떻게 말을 합니까? 그러면 그분은 몸을 벗어도 그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요다음에 또 그렇게 곡경을 당할 테니 그것을 왜 그렇게 해야만 합니까? 말 한마디 해서 법으로 딱 떨어질 땐 그게 무서운 말인데 어떻게 이건 옳고 이건 그르다고 하겠습니까?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나쁜 일을 했다가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고, 좋은 사람일지언정 때로는 나쁘게 돌아갈 수 있다는 그 사실을 여러분은 잘 파악하고 계시겠죠. 장차 좋은 것도 아니고, 장차 나쁜 것도 아니다 이겁니다. 한 찰나입니다. 나쁜 짓을 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항상 나쁜 짓만 하는 게 아닙니다. 금방 어떠한 지경에 도달해 ‘나는 이렇게 해서 안 되겠다.’ 하고 돌아섭니다. 그렇게 돌아설 사람을 ‘이 사람은 나쁘다.’ 그러고 꼭 찍어 놔야 옳겠습니까? 

이건 그럴 수가 없죠. 법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길잡이로서, 여러분한테 부처님의 참뜻, 이 좋은 법을 전달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렇게 말 한마디 할 수 있느냐? 여러분은 못 믿겠지만 정말 법이라는 것은 그렇게 무섭습니다.  

이 손이 손이 아닙니다, 손 아닌 손이 손이지. 손가락 하나 가지고도 하늘을 받칠 수가 있다는 그 사실! 하늘을 뚫을 수가 있다는 사실! 백지장 하나를, 산을 넘어가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백지장 하나 넘어서기가 어렵다는 얘깁니다. 산을 넘어가는 거야 넘어갈 수가 있지만 백지장 하나 넘어서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니, 여러분이 그것을 다 놓고 그 백지장 하나 사이를 넘어선다면 여러분은 정말 대인으로서 남북통일도 가져올 것이고, 세계를 융화시켜서…, 지금 그렇게 되고 있죠. 

몇 년 전에 내가 이걸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모든 것을 면하려면…, 그러면 나쁜 건 왜 있습니까, 좋은 것만 있지. 그것은 우리의 손가락이 길고 짧듯이 이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 같아도, 쓸모없는 따라지가 붙었어도 이거는 붙어야만이 손이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디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한쪽에선 승리가 되고 승리가 되면서 어떠한 조화를 이루고 또 발전이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왜 스님이 잘 아신다면 이거를 이럭하지 않도록 일러 주시지, 왜 일러 주질 않아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잘못되게 하느냐 그러거든요. 잘못돼서 돈을 뭉청 잃었다 이겁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한번 남한테 속았든지, 남과 동업을 했든지, 무엇을 했든지 자기가 한번 경험하는 반면에 자기는 평생 아니라 영원토록 남한테 속지 않을 것이다 이겁니다. 내가 말해서 만약에 속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건 실감이 안 나는 겁니다. 

또 속는 것도 그렇지만 일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떠한 거를 잘못해서 망가졌습니다. 그랬는데 이게 몇천 불이라고 그럽시다, 그럼. 그것이 몇천 불 짜린데 망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한 번 경험에 몇천 불이 아니라 몇만 불을 얻을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일체 만법을 다룰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얻는다 이겁니다. 그러니 이론으로 또는 경을 보고 글 강의하듯이 선생님이 가르치는 대로 배워서 이것을 남의 말 하듯이 하면 그게 무슨 실감이 납니까?

석존이 여기 계셨어도 석존을 마시고 들어가야 돼. 부숴서 마시고 들어가야 돼. 그건 무슨 소리냐. 여러분이 그렇게 믿고 놓고, 모든 걸 보임을 하고 또 그 보임한 데서 다시금 내놓고, 만법을 내고 들이고, 움죽거리지 않으면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바로 부처님은 자기 안에, 아니, 부처님만 계신 게 아니지, 일체가 들어 계신 거죠. 그렇게 딴 데 계신 게 아니기 때문에 바닷물을 삼켰느니 또 바닷물을 삼켰다가 뱉어 놨느니 또는 한마음에 들었느니 주인공에 들었느니 다 부쉈느니 이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부순 게 부순 게 아니라, 둘이 아닌 까닭에 마음과 마음이 둘이 한데 붙었으면 이게 둘입니까, 어디? 영과 영이 어떻게 둘입니까? 여기 계신 분들 마음을 한데 종합해서 다 주워 모아도 없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누가 방귀 뀌었다 해도 그 방귀는 없습니다. 여러분 수십 분이 다 방귀를 뀌었다 해도 그 방귀라는 이름만 남지, 그냥 온 데 간 데가 없습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따로 있습니까? 그러나 모두 마음의 차원이 있기 때문에 바깥으로 끄달리고 사는 그런 사람들은 그저 차원이 낮다고 이름 지을 수 있죠. 모든 것을 놓고 침착하게 에너지와 질량이 둘이 아님으로써 우린 천차만별로 돼 있는 이 법을 그대로 응용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원심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냥 빙긋이 웃고 한 발 떼어 놔도 온 법계가 다 울린다는 얘기죠. 

이 말 자체를 자꾸 되풀이하는 것은 여러분을 위해서 하는 거기 때문에 마다하지 마세요. 열 번을 되풀이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열 번만 먹는 게 아니라 아침 점심 저녁 되풀이하고 계신대도 마다 안 합디다. 한 끼니만 걸러도 그냥 배가 고프다고 딴 때보다 막 퍼넣는 거죠. 반찬이 조금 소홀해도요. 그러나 배가 부를 때는 반찬이 잘 놓였어도 뜨적뜨적 천천히 먹는 시늉 해요. 

이렇게 우리는 차이점이 나는 겁니다. 항상 밥과 김치를 먹어야 살듯이, 항상 했던 소리를 또 하는 것은 여러분이 불성을 가지고 있고, 항상 들이고 내기 때문에 그 얘기를 해서 납득이 되면은 자기 스스로서 나의 속도 알 것이요, 부처님 속도 알게 될 것입니다. 왜? 숙명통을 알고 있으니까.  

어떤 분이 와서 “스님! 부모가 불쌍해서 천도를 시키려고 그랬는데 가난해서 돈을 모으다 보니깐 일 년 육 개월이 걸렸습니다.” 하면서 “일 년 육 개월이 걸려도 돈이 모아지질 않아서 이렇게 그냥 왔습니다.” 하고 눈물이 나는 걸 참으니까 눈물만 흐르고 침을 자꾸 삼키면서 말을 못 했습니다. 잇질 못했습니다. 그럴 때 내가 그런 말을 했죠. “이거 봐. 없으면 없는 대로 천도하지 왜 그렇게 걱정 근심을 해? 그게 고야, 바로. 당신이 모른다면 내가 천도시켜 줄까?” 그러니까 “예!” 그러면서 그래요. “내가 천도시켜 준다고 말 한마디 해서 믿어 줄까?” 그러니까 믿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천도한 줄 알고 가!” 그랬어. 

여러분, 이거를 가만히 침착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삼십이응신으로서의 여러분 마음이 있다면, 진실한 마음이 있다면 다 오고 감이 없이 응해 드릴 겁니다. 또 본래 여러분 불성은 움죽거리지 않으면서도 만법을 들이고 내는 그 능력이 있는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놓지 않는다면 그 지옥고도 무너뜨릴 수 없거니와 그 업보로 인해서 천만 가지 다가오는 것에 끄달릴 것입니다. 그러면 “스님이 그건 천도시켜 줬죠?” 이러실 테죠. 그게 아닙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진실하고 절실하게 왔기 때문에 그건 단번에 천도가 되는 겁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단번에 놓는다면 지옥고가 단번에 무너진다는 거. 

항상 이렇게 하고 나가는 데에서 여러분이 느낄 때에 “부지깽이 하나라도 늘어 가면 늘어 갔지 줄지는 않어.” 이 소리는 무식한 말이지만 여러분이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얘기하기 이전에 여러분이 여기 다니면서, 이 공부를 하시면서 집안이 늘어 가면 늘어 갔지 줄어 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더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또 재산을 위해서 사느냐. 그게 아닙니다. 자기가 그 업보를 하나하나 놓기 때문입니다. 그 업보가 없어지기 때문에, 지옥고가 무너지기 때문에, 하나하나 무너져 들어가기 때문에 바로 살림살이가 내 몸으로부터, 가정으로부터 나아지는 거죠. 스스로 말입니다. 

그러니 이 공부를 안 하면 안 된다는 사실. 지옥고를 무너뜨릴 수 없고, 내 업보를 없앨 수 없고…. 여러분, 항상 얘기 들어서 아시겠죠? 용광로에다 놓으면 다시 생산돼서 쇠가 나오고 그 쇠가 생산돼서 나오면 다시 이름을 받고 다른 물건이 돼서 나온다고요. 그러면 여러분은 그 몸 하나에서 하나하나 분기가 치밀어도 별거 별거 다 놓는다면 바로 그게 용광로에다 넣는 거와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생산돼서 나오듯이 그 하나하나 업보로 뭉쳐진 중생이 보살로 화해서 여러분을 돕게 되고 조상, 친척, 자식들도 다 돕게 됩니다.  

이 좋은 법을 만약에 모르고 기복으로만 왔다 갔다 하면서 우리 소꿉장난하는 것처럼, 아니 놀러 다니는 것처럼 어떠한 대상을 놓고 빌거나 부적을 가지고 다니거나 이래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위 법문은 대행 선사 법문집 ≪허공을 걷는 길≫ 중 1990년 10월 21일 정기법회 법문의 일부를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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