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자기를 못 믿기 때문에 실험을 못 하고 체험을 못 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탓도 하지 마십시오.
자녀들은 부모의 탓을 하지 말고 부모는 자식의 탓을 하지 말고
또 자기네 이웃을 탓하지 말고 자기부터 돌아다보세요.
자기가 이 세상에 났으니 자기 탓이지 왜 남의 탓입니까?

죽는다는 것은

질문 요즘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 대행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죽어야 한다고 하시는데 어떻게 해야 제대로 죽는 것인지요.

답변 우리가 “첫째도 죽어야 하고” 했습니다. 일체를 놔라! 맡겨 놔라! 어디다 놓느냐. 내가 있으니깐 바로 상대가 있는 것처럼 내가 있으니깐 일체가 있고 천지와도 직결돼 있으니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자가발전소가 있는 거와 같은 겁니다, 밝은 자가발전소. 그래서 여러분의 자가발전소는 이쪽에서 전력을 끌어오면 발전소에서는 줄어들거나 늘어나거나 하지도 않고 이쪽에서 끌어오는 대로 자동적으로 전력이 옵니다. 오지만 그 전력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여러분한테 일체의 생활이 참선이며 좌선이라고 합니다. 몸을 꿇어앉아서 좌선이 아니라 마음이 편안하고 다 놓게 되면 그것이 좌선이며 그것이 바로 참선이다. 톡톡한 주관적인 내 중심이 없이 그대로 공에 빠지라는 게 아닙니다. 중심이 있기 때문에 참선이라고 하고 편안한 마음도 편안치 않은 마음도 생기는 겁니다.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부처를 이루지 못하고, 마음을 깨치지 못하고, 지혜를 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첫째도 맡겨 놔라, 일체를. ‘일체’ 하면 고독과 가난과 외로움, 또는 우환과 병고 같은 모든 일체 말입니다. 일체 생활을 닥치는 대로 거기 맡겨놓고 가시라. 이것이 바로 방하착이며 이것이 죽는 길입니다. 그러면서 처음에 죽어야 한다 하는 것은 바로 무조건 이유를 붙이지 말고,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다 놓고, 내 마음에 이루어져서 참 좋다 할 때는 감사하게 놓고,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 때는 그것도 고정됨이 없으니 ‘그것도 거기서 하고 거기서밖에는 길을 인도할 수가 없으니까’ 하고 놓고, 이렇게 해 나가시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에도 죽어야 한다 하는 이유는 무조건 첫 번에 죽어야 나를 본다 이 소립니다. 

두 번째는 여러분이 여기서 공부하시면서 나를 발견하는 분들이 많다고 봅니다. 그러나 발견을 해 가지고 내가 ‘나’라는 거, 이것을 버리지 못하고 습을 버리지 못해서, 아직까지도 꿈에 부처님이 보이면 좋고 머리를 풀어 산발을 한 귀신을 보면 나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또 어떠한 것이 바깥으로 신호가 오면 신호가 온다는 발설을 하질 않나, 보면 보는 것대로 들으면 듣는 것대로 그것들이 변해서 돌아가서 환상으로 보이는데 그렇게 바깥으로 보이고 들리는 그런 것을 가지고 집착을 하고 논의들 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도 죽어야 하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도 죽어야 하며 비밀로 놓고 두 번째도 죽어야 하며 비밀을 지켜야 하고.’ 이 뜻을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뭐냐. 비밀을 비밀로 둬야 하고 비밀을 지켜야 한다 하는 것은 나를 발견했을 때에, 내가 어떠한 것이 보이든 들리든, 내가 오신통을 한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누누이 그렇게 말씀드렸을 겁니다, 아마. 오신통에서도 벗어나야 우리는 그것을 굴릴 수 있다 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들리고 보이고 안다고 말을 하게 되면 첫째, 불법에 누가 되게 하고, 둘째 선원에 누가 되게 하고, 스님네들한테 누가 되게 하고, 셋째 자기한테 누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나를 발견했을 때는 그게 실험하는 단계입니다. 꿈에 가르치는 것도 생시에 가르치는 것도 둘이 아니게 항상 자기가 비밀로 두고 지키면서, 봐도 본 사이가 없이 지키면서, 들어도 들은 사이가 없이 지키면서, 알아도 안 사이가 없이 지키면서, 실험을 통해서 체험을 하고 체험을 하면서 행을 해 보는 그러한 막강한 공부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도 죽어야 하며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비밀을 지키면서 타심통이나 숙명통, 천이통, 신족통, 천안통, 이 오신통에서 딱 벗어나면, 바깥의 이 다섯 가지 통에서 벗어나면 바로 이 통을 굴릴 수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내 몸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내 몸을 코치를 못 해요. 내 몸 안에서도 벗어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나를 마음대로 자유자재하게 건강하게 이끌어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듯이 그 오신통이라는 다섯 가지 속에서도 벗어나지 못한다면 안 되겠기에 보이더라도 놔라, 들리더라도 놔라, 남의 마음을 알더라도 놔라, 과거를 알더라도 놔라, 내 몸이 시공을 초월해서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간다 하더라도 놔라. 그것은 비밀을 지키는 거다. 그것이 바로 물리가 터져서 지혜를 구해서 내가 바로 그것을 실험하고 체험하여 자기의 것을 만드는 그러한 비밀의 문서다. 비밀 문이 나한테 있다. 오관을 통해서 들이고 내는 비밀 문이 나한테 있으니 내 문을, 없는 문 있는 문 다 놓고 그 문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도 죽어야 하며 또 그렇게 비밀을 지키고 오신통에서도 벗어난다면 그때는 너 나가 없이, 너 나는 틀림없이 있으면서도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네가 될 수 있는 그러한 나툼에 의해서 응신으로서도 막강하며 나툼의 화(化)함도 막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화하는 거는 무엇이냐. 이 마음이라는 자체는 체가 없어서 수만 명의 모습이 달리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천백억화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천백억화신이라고 그랬을까? 여러분이 응하는 대로 응해 주시기 때문에, 모습도 다르게, 산신을 원했으면 산신으로 보여 주고, 관세음보살을 청했으면 관세음보살로 모습을 보여 주고, 그러나 보여 준 것만이 아닙니다. 모습도 응해 주셨지마는 마음의 그 자비도 응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그 나툼은 하다못해 곤충에서부터 일체 모든 생명들에게 나투며 화하면서 응해 주시는 부처님의 한 발 내려디딘 보살행이니 보현등의 행적이라고도 할 수 있고, 연화불이라고도 할 수 있고 여래불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님이라는 그 말은 하다못해 곤충에 이르기까지 응해 주시기 때문에, 목신에도 응해 주시고, 지신에도 응해 주시고, 남녀를 막론해 놓고 거지든 거지가 아니든, 권세가 있든 권세가 없든, 여자든 남자든, 애든 어른이든, 지식이 있든 없든, 학식이 투철하든 말든, 박사든 박사가 아니든, 어떠한 문제를 막론해 놓고 평등하게 응해 주시기 때문에 이 도리를 바로 부처님이라고 하는 겁니다. 

만약에 이것을 어떠한 한 인간의 완성이라고 한다면, 개별적인 완성이 아니라 전체가 한데 합쳐진 완성이며, 같이 돌아가는 완성이며, 너는 너대로 있고 나는 나대로 흐르고, 이렇게 흘러가는 데서 응해 주시며 모두가 내가 될 수 있고, 내 자리가 될 수 있고, 내 손이 될 수 있고, 내 아픔이 될 수 있는, 바로 이것이 천백억화신으로서 응해 주시는 부처님의 자비입니다. 

그러니 부처님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벌레가 될 때에 부처라고 할 수도 없고, 관세음보살로서 여러분 앞에 응해 주실 때에 부처라고 할 수도 없고, 축생으로 응해 주실 때에 부처라고 할 수도 없으며, 개 배 속에 들어갔을 때에 부처라고 할 수도 없으니 이것이 바로 길이며 진리다. 

우리가 부처님의 그 길을 따른다면 올바르게 자력 신앙으로서 우리 갈 길을 똑똑하게 갈 수 있다. 그러면 어떤 게 똑똑한 건가. 모든 것을 놓고 참자기의 중심에 의해 이리로도 흔들리지 않고 저리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기’ 하면 저 전구만을 보지 마시고, 그 전력을 보신다면 아마 밝음을 만들어 놓은 저 전구와 갓을 똑바로 보실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항상 저 전구라는 물질만 보시고 스위치를 누르면 그저 밝게 불이 들어온다는 것만 아시지, 전력이 오고 가는 것은 모르기 때문에 여러분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걸 모르는 것입니다. 전력은 여러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허나 여러분한테 전력이나 광력이나 또는 자력이나 통신력이 다 충만히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 안의 자생 중생을 제도하려면

질문 이 마음공부를 하는 데 우선 자기 자생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는데, 그럼 내 안의 자생 중생들을 제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여러분 몸뚱이 속에 의식들이, 생명들이, 모습들이 천차만별로 있죠? 그런데 그 생명들은 전자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차원대로 그 부모를 정하게 돼 있거든요.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차원이 정해집니다. 그것이 금 차원이라면 바로 금방에 탄생이 될 거고, 또 무쇠 차원이라면 무쇠전에 무쇠로 탄생이 될 거고, 넝마라면 넝마전에서 넝마로 탄생이 될 거고 이렇듯이 그렇게 이 세상에 출현을 하게 돼 있죠. 

그거는 왜냐하면 악업 선업의 인연들이 바로 내 몸뚱이 속에 주둔을 하고 있으니까요. 자기 영혼과 더불어 같이 정자 난자를 빌려서 탄생을 시키는 것이 바로 자기 주인공이거든요. 그래서 수억겁 광년을 거쳐 오면서 진화시키고 탄생시켜 온 장본인이 바로 여러분의 주인공 주장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장이라고도 하고, 주장자라고도 하고, 주인공이라고도 하고, 참부처라고도 하고, 참나라고도 하고 그렇게 이름은 많죠.

그런데 모든 것이 이 마음을 통해서 그 업식에서 나오는 거를 여러분은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줄 알고 착각을 하고 있어요. 그것은 그 마음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진짜 자기가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생각을 하는 게 아니고, 컴퓨터에 넣어 놓은 그 입력이 바로 나오는 겁니다, 그냥. 그러니까 ‘나오는 대로 다시 되집어 넣으면서’, 이것은 내가 주인공에 되놓으라고 항상 하는 소립니다. 

되나오는 거를, 잘 나오는 거는 ‘잘 나오게 해서 감사해.’ 하고 놓고, 또 잘못 나오는 거는 ‘너만이 잘 나오게 할 수 있어.’ 그러고 거기다가 되넣는 겁니다. 되입력을 하는 거죠. 되입력을 해야 앞서 입력된 게 없어지면서 새 입력이 자꾸 들어가는 거죠. 그래야만이 그 유전성, 업보성, 인과성, 세균성, 영계성 이 다섯 가지가 다 무너지게 됨으로써 이 나가 나를 발견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자유인이 되려면 내 자생 중생들부터 바로 조복을 받아라, 항복을 받아라 이 소리죠. 그것도 강제적으로 항복을 받는 건 항복을 받는 게 아닙니다. 인의롭고 유유하고 자비롭고 지혜롭게, 나오는 모든 것을 ‘너만이 할 수 있어.’ 하고 거기다 되놔야만이 다시 입력이 돼서 그게 없어지지, 그렇지 않으면 없어질 수가 없죠. 

그러니까 거기다가 되놓으라는 것, 지금 여러분한테 이끌어 주는 관법이 그대로 그겁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내 내면의 자생 중생들부터의 그 의식이 마음의 선장과 더불어 한마음이 돼야 배가 지나가는데도 뒤집히지 않듯이 말입니다. 아무리 파도가 쳐도, 아무리 뇌성벽력이 쳐도 배는 잔잔히 건너갈 수 있는 거죠. 그와 같이 우리 이 몸뚱이가 그렇게 잔잔하고 편리하고 평등하게 잘 갈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 내 몸속에 있는 자생 중생들의 조복만 받는다면 그 조복받은 의식들이 전부 보살로 화해요. 보살로 화해서 천백억화신으로 화해요. 화해서 한생각을 하면 그 모든 의식들이 화해서, 즉 말하자면 분자로 화해서 입자가 돼 가지고 전부 나가서 원자로 화해요. 그래 가지고 조절을 해요. 그래서 모든 중생을 건질 수 있다 하는 그런 뜻이죠. 그러니까 깨닫는다 하는 거는 한울의 일체제불의 마음으로서 해인을 받는 건데, 해인의 도장을 받는 건데 그 도장의 열쇠를 받을 때 거짓이 있다면 어찌 그 도장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모든 것을 다 놔야 다 얻을 수가 있고, 다 얻을 수가 있어야 다 나누어 줄 수가 있어요.

아리송합니까? 하하하. 아리송할 거예요. 그러니까 그대로 그렇게 해 보세요. 열심히, 일을 하다가도 똥을 누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한 찰나에 그냥 거기 놓으세요, ‘너만이 할 수 있잖아!’ 하고요.

인성 교육에 문제가 있을까요

질문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삶을 살아나가는 게 너무 힘든 것 같습니다. 지구 문제뿐 아니라 각종 전쟁 및 사건 사고 등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마음을 불안하게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의 인성 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답변 지금 보십시오. 전 세계를 볼 때 이런 문제도 욕심이 과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부처님이 나신 고장에도 그런 욕심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일들을 어떻게, 한 번 두 번이나 봐줬지 세 번은 봐줄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신 거와 같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이 착이 있으면 욕심이 붙고 욕심이 붙으면 일을 저지르는 거죠. 너무 과한 욕심은 부리지 마십시오. 자녀들을 키우는 데도 여러분이 모범이 돼야 하고 또 사랑할 줄 아는 그런 능력을 키워야 됩니다. 우리가 이 도리를 모른다면 자녀들은 자녀들대로 빗나가고 그게 뭉치면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큰일이 벌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엘 가니까 어머니는 아침에 나가고 아버지는 저녁에 나가고 그러니, 애들 얼굴은 이틀에 한 번 보고 사흘에도 한 번 보고 이런 집들이 허다합디다. 그러니까 애들이 방황하게 되고, 사랑에 굶주리고 고독한 그 마음에서 따뜻한 둥지를 찾아가느라고 나쁘게들 되는 사건들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침에 나가는 엄마는 반찬을 해서 냉장고에 넣어 놓고 냉장고에다가 “너를 사랑해. 우리 식구가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너희들을 키우기 위해서 이렇게 엄마는 일하러 나간다. 여기 이렇게 넣어 놨으니까 꺼내 먹어라. 사랑해.” 하고서 고 쪽지에다가 써서 뽀뽀라도 해서 거기 붙여 놓고, 이럭하고서 나가면 아이들이 이탈되지 않는다는 얘기죠. 

사랑이라는 것은 몸으로써 몸소 붙잡아 주고 말해 주고 이래서 사랑이 아니라, 이어지지 않으면서도 전달되는 마음입니다. 사랑의 손길이란 그렇게 전달되지 않으면서 이어 가는 그 마음이죠. 거기에 자녀들과 남편을 비롯한 가족 모두가 서로 화목하게 이루어 나가고 또는 이탈되지 않는 방법이 있죠. 아무리 나쁜 일을 하고 공부를 안 한다 하더라도 말로 해서 되는 일이 아니고 욕을 해서 되는 일도 아닙니다. 전력은 이 전구나 저 전구나 똑같듯이 우리의 마음들도 똑같이 아들이라는 그 가설, 또는 어머니 아버지라는 걸 알기 때문에 가설이 된 거죠. 전력은 다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한마음으로서 모든 것을 주인공에 맡기고 ‘거기서밖에는 화목하게 할 수 없다, 거기서밖에는 병고를 낫게 할 수 없다, 거기서밖에는 액난을 물리칠 수 없다, 유전을 물리칠 수 없다’고 믿고 모든 일체를 다 구멍 없는 구멍에 맡겨 놓고 작업을 하실 수 있다면, 그것이 화목을 가져오고 사랑을 가져오고, 이탈을 안 가져오고, 공부 안 하는 애들도 공부를 잘하게 되고, 정신력이 아주 투철해지고, 모든 물리가 터지고 이렇게 해서 여러분의 가정을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행복이 오는 거죠.

그래서 나는 말하는 게 그겁니다. 누구의 탓을 하지 마시라고요. 자녀들은 부모의 탓을 하지 말고 부모는 자식의 탓을 하지 말고 또 자기네 이웃을 탓하지 말고 자기부터 돌아다보라고요. 자기가 이 세상에 났으니까 자기 탓이지 왜 남의 탓입니까? 

그리고 자기가 자기를 못 믿어서 한생각을 해도 ‘에이, 그게 될까?’ 이러는데 관습에 젖어 가지고 자기를 자기가 못 믿는 겁니다. 못 믿기 때문에 실험을 못 하고 체험을 못 하는 거죠. 우리는 그대로 여여하면서 그대로 실상이면서 실행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그 관습 때문에 그만 망가지는 거죠. 관습으로 인해서 착이 붙고 욕심이 붙어서 모든 일을 그르치고 자기가 자기를 밝게 못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첫째, 사람이 돼야 하고 둘째, 가정에서도 잘 다스려야 하고 셋째, 자기 마음을 자기가 다스려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행을 잘할 수가 있고 올바로 갈 수가 있고 진실하게 갈 수가 있고, 얼토당토않은 욕심을 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도 그것을 보고 듣는데 어찌 이탈하겠습니까? 여러분이 고독하게 만들고 배고프게 만드니까 그렇게 되는 거죠. 부모의 책임이 없다고도 볼 수 없죠. 학교에다가 맡겨 놓으면 다 되는 줄 알고요. 바로 2세, 자긴데요. 자기입니다. 더 발전을 해서 내 2세는 더 올바르게 진실하게 똑바로 다스려 나갈 수 있는 자기를 길러 주는 부모들이 돼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여러분을 다스려 나가면서 가정과 모든 데서 화목을 깨트리지 마시고 그저 자녀들을 기르더라도 그렇게 해 나가신다면 ‘아휴, 내가 어머니 아버지 말을 왜 이렇게 안 들었을꼬.’ 하고 후회를 하면서 아마 착한 2세들이 될 겁니다. 이런 속담도 있죠. 안에서 새는 바가지 나가서도 샌다고요. 그것처럼 질질질질 물이 새니깐 남들을 모두 얼리고 빙판을 만들고 그러니 전부 미끄러져서 부상을 당하고 다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한 집 한 집, 한 사람 한 사람이 직결이 돼 있고 가설이 돼 있다더라. 그러기 때문에 이 사바세계는 관세음보살이라고 이름을 지어 놓으셨구나. 우리들이 관해 보고 우리들이 관해 듣고,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느냐. 그리고 말을 하고 있지 않느냐. 이것이 관세음보살이라는 그 이름 아니냐. 우리들을 떠나서 관세음보살이 어딨으며 지장이 어딨겠느냐.’ 이렇게만 생각하세요.

법당에 오더라도 부처님 몸과 내 몸이 둘이 아니요, 부처님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니요, 그 생명과 내 생명이 둘이 아니요, 풀 한 포기의 생명도 둘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나무와 나무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그 마음들을 서로 이어서 열매를 맺는 거 보시지 않습니까? 사랑을 해서 말입니다. 저 건너편의 나무 한 그루가 이쪽 건너편의 나무 한 그루와 사랑을 해 가지고 열매를 맺는 거 아시죠? 

이것이 바로 전파 아닌 전파죠. 마음을 이어 가는 전파인데, 지금 남편이고 애들이고 그렇게 속을 썩여도 ‘허허, 주인공은 전력이 둘이 아니니까 불 들어오는 거는 전력만 있으면 다 들어오겠지.’ 하고 맡겨 보세요. 너하고 나하고, 아들이다 자식이다, 이렇게 모두 알고 있는 것이 가설이 아니냐. 그럼, 네 주인공과 내 주인공이 둘이 아닌데 둘이 아니게 그저 ‘당신밖에는, 둘이 아닌 주인공밖에는 해결 못 하겠구나.’ 하고 맡겨 놓는 작업을 할 때 벌써 다들 전파가 되거든요. 불이 들어오게 돼 있다고요. 인등이 켜지게 돼 있거든요. 

내 마음이 스스로 밝아지니 스스로 자기가 자길 다스리게 되죠. 이 세상을 나쁘게 보는 것도 자기가 나쁘니까 나쁘게만 보거든요. 그러니 나쁘게 보지 않고 ‘아하, 이런 거로구나!’ 하고 자기가 스스로 좋게 돌리면 좋게 돌아가게 되죠. 그럼으로써 가정에도 화목이 오고 서로 사랑을 하게 되고, 나가서도 남들을 사랑하게 되고 남들 보는 눈이 달라지죠. 여러분의 마음이 천국이면 모두가 천국으로 보이지만 여러분이 모두 악으로써 병이 들면 모든 게 악으로만 보이고 도둑놈으로만 보이거든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합니다. 도둑놈이면 어떻고 도둑놈 아니면 어떠랴. 나 걸음 걷는 거, 다스려 가면서 올바로 진실하게만 꾸준히 걸어갈 뿐이지. 그렇게 생각하면 스스로 만났던 사람, 인연 됐던 사람이 스스로 언젠가는 착해지고 언젠가는 그런 걸음을 다 떼어 버리거든요. 더디고 이르고 그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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