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판사판으로 믿는다면 오늘 죽든 내일 죽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그만하면 족하다는 셈으로 
좀 그렇게 살면 어떻소.
아니, 그렇게 복작거리고 해서야 어디 살맛이 나겠소?

세상은 우리만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천차만별의 사생이 다 그렇죠. 어떠한 곤충이라도 그렇고, 날아다니는 짐승도 그렇고, 물에서 노는 생물도 그렇고 일체 생물이 다 그렇듯이 고통스러운 것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벗어날 수 있는 최고의 동물이라고 볼 수 있겠죠. 최고의 동물인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이 벗어날 수 있는가. 

항상 이런 말을 하는데요, 과거는 현실에 나오고 현실에 살아가는 건 미래에 나오듯이 우리가 이렇게 선원에 다닌다고 해서 과거가 없어지거나 그러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을 공부하는 데에 따라서 그 업보가 없어지고 안 없어지고, 팔자 운명이 지워지고 안 지워지고, 거기에 농간이 있는 겁니다.

여러분한테 항상 말을 했지만 되풀이하는 말을 항상 해야 하는 것은, 그렇게 해도 여러분은 알아듣지 못하는 경향이 여간 많지 않아요. 우리가 밥을 지었으면 뜸을 들여서 다 먹고 치우듯이, 오늘도 아마 회향을 한 것 같습니다. 그렇죠? 이 선법에는 기도 첫날이 따로 없고 회향 날이 따로 없어요. 항상 기도를 하되 관하는 걸로 가고 있죠. 기도는 항상 바깥으로 상대성이 있는 거고 관하는 것은 안으로 상대성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상대성이라는 것은 내가 나를 믿고, 굳건히 믿고, 나를 끌고 다니는 나의 주인을 진실히 믿으면서 보이고 들리고 하는 모든 것을, 다 삶에 의해서 벌어지고 오므라지고 이렇게 하는 일들을 모두 자기가 끌고 다닌다는 거죠. 자기가 하고 다니는 건데 육신을 가진 나는 모두가 ‘내가 하고 있다’는 거를 생각하거든요. ‘내가’라는 거는 없습니다. 나라는 거는 없어요. 왜 나라는 게 없을까?

항상 얘기해 드리죠. 속도가 빠르게 돌아가기 때문에 넓게 생각하면 불바퀴가 돌아가고 작게 생각하면 우리 살림살이가 돌아간다는 얘기죠. 그래서 내 자신으로서 수없는 공한 도리에 의해서 찰나에 바뀌면서 찰나에 또 바뀌면서 이렇게 돌아가곤 있죠. 그런데 내가 왜 이런 되풀이를 자꾸 하느냐. 여러분은 겨냥을 잘못 대고 겨냥을 잘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사람이, 내가 항상 말하죠, 이판사판이라고. 이 이판이라는 것도 사판이라는 것도 내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나로 인해서 생긴 거죠. 나로 인해서 생긴 것을 나로 인해서 들이고 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 육신은 그 공한 자체에, 즉 말하자면 여러 가지 인연에 따라서 보이지 않는 배낭에다가 다 넣고 그 배낭에서 자꾸 나오는 걸 볼 때 몸뚱이는 배낭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서 일체가 다 한마음으로서 악업 선업이 돼 있는데 여러분의 생각이 그것을 아예 개의치 않고 ‘내가 했다, 내가 망했다, 내가 아프다, 내가 고통스럽다’ 이게 아주 입에 젖고 뇌리에 젖어서 그것을 놓질 못해요. 왜 놓질 못하는가.

이 ‘한마음’ 하면 그 주인에서 악업이나 선업이 다 한데 합쳐지는 경향이 있거든요. 합쳐져서 생산을 만드는 그 자체에 의해서 주인공이거든요. 하나 들어오면 하나 또 들어오고, 보는 데도 하나뿐만 아니고 듣는 것도 하나뿐만 아니고 가고 오는 것도 하나뿐만 아니고, 모든 것이 그저 순식간에 돌아가고 순식간에 돌아가고 이러는 동시에 그것을, 첫째는 하나로 뭉쳐서 놓고 ‘여기서 모든 것을 들이고 내는구나, 내 주인이.’ 그렇게 생각을 하되 용도에 따라서 딱 하나가 닥칠 때, ‘아! 거기서 다 하는구나.’ 이렇게 항상 믿고 있으니까 그거 하나가, 용도가 딱 들어올 때 거기다 맡겨 놓고서는 ‘거기서밖에는 해결 못 해.’ 하는 것이 즉 관이다 이거야. 그리고 지켜보는 거.

그럴 때에 여러분은 ‘아이고, 내가 아무리 해도 안 돼.’ 그러는데 그 생각은 왜 드느냐. 벌써 믿는 게 미거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먼저 드는 겁니다. 여기다 맡겨 놓는 믿음보다는 ‘이게 얼른 됐으면’ 하는 욕구가 더 앞서기 때문에 거기에 정통으로 맞아 들어갈 수가 없죠. 맞아 들어가는 자체는 바로 지혜 물바퀴도 되지마는, 법바퀴와 불바퀴가 같이 이렇게 혼합이 돼서 돌아가거든. 그런데 거기에다가 놓기만 하면 녹아 없어지는가 하면 타 버리고, 타 버리는가 하면 녹즙기에서 찌꺼기는 나가고 물이 나오듯이, 생수가 나오듯이 그렇게 되는 법인데, 여기에 맡겨 놓고 믿는 힘보다 내가 욕망이 크고 욕구가 더 많고 그게 더 구체화돼 있기 때문에 여기에 와닿지를 못해. 닿지를 못하니까 녹즙기에 갈려서 나올 리가 없지. 이렇게 표현을 해도 되는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래서 여러분이 항상 주인공에 놨느니 뭐, 어쩌느니 아무리 그래도 내가 볼 때는 미거한 점이 여간 많지 않아요. 왜냐하면 지금도 얘기했지만 또다시 거푸 얘기하는데, 즉 말하자면 내가 아프다거나 뭐, 일이 벌어졌다거나, 부도가 났다거나 재난이 들었다거나, 자식으로 인해서라든가, 이러한 문제 등등을 놓고 볼 때에 그것이 먼저 급하지, 급한 생각이 먼저 들지 여기에다가 이판사판으로 믿고 확 그냥 놓지를 못해. 거기는, 믿고 놓는 데는 아무것도 붙지 않아. 이유가 붙지 않아. 

그렇게 돼야 되는데 여기다가 맡겨 놓기도 전에 벌써 그 생각부터 나. 이거 다가온 것부터 생각하니까 그 욕구가 딱 가리는 거야. 딱 가려서 거기에 닿지 못하니까 갈려 나오지 못하고, 거기에 딱 닿지 못하니까 타 버릴 수가 없지. 인과가 타 버릴 수가 없다고. 과거의 인과가 말입니다. 그러니까 크면 클수록 그냥 거기에 매달리고 욕구가 더 크고….

내가 어떤 때는 “아, 당신 맘대로지 누가 이래라저래라 합니까?” 하고 말하는데, 냉정한 것 같지만 냉정한 게 아닙니다. 그렇게 대답해 주는 그 마음도 다 생각이 있어서입니다. 생각 없는 길을 가는 사람은 없어요. 나도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을 해 주는 거죠. 왜냐하면 내가 아프면 병원으로 가겠다, 이리로 오겠다 이러는 것도 자기 안이 구체적으로 완벽해야 그게 스스로 자기가 택하는 일이지, 완벽하지 못한 일에 대해서 누가 이러란다 저러란다 해도 그것은 거기에 닿지 않는 일이라.

그러니 어차피 마음의 배낭을 짊어지고 나온 사람들이 한 철 지내다가 한 철 나게 되면 갈 것인데 내 영혼을 구제를 받고, ‘영혼’ 하면 내 몸뚱이 속의 모든 인연에 따라서 모두 한데 합친 것이 영혼이에요. ‘영혼을 다스리는 내 마음과 더불어 구제받고, 모든 세세생생에 끊임없이 돌아가는 이 고(苦)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런 참된 자유인이 되라’ 이런 뜻이죠. 그런데 우리가 지금 생에 이 몸뚱이 있을 때 이 도리를 모른다면 세세생생에 또 끄달립니다. 

그러니 어차피 그렇게 나왔다가 갈 것을…, 이 사대는 원점으로 도로 가고 그 마음 나기 이전과 마음은 결국 이 세상에 거추장스럽게 또 나올 거냐? 금이 돼서 나올 거냐, 깡통이 돼서 나올 거냐. 이런 데에 수난을 겪게 되는 거죠.

그런데 어차피 말이 났으니 말이지 내가 답답한 것은요, ‘참 이상도 하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나는 관리인인데 왜 이것저것…, 모든 여러분은 관리하는 분들입니다. 재산이 있다면 재산 관리에, 자손이 있다면 자손 관리에, 모든 가정의 관리인으로서 내가 관리하는, 내 몸도 내가 관리하는 사람이지 내가 ‘나’가 아니라는 얘기예요. 관리자예요, 관리자. 그런데 관리인이 왜 그렇게 그 주인을 비켜 놓고 그렇게 그냥 아둥바둥하는지 난 모르겠어. 잘못된 거 있으면 주인이 잘되게 할 거고 주인이 다 할 건데 왜 주인도 아니면서 자기가 괜히 나서서 아등바등 아등바등하면서 온통 난리를 지기는지 모르겠다 이거야.

이해가 안 가는 점이 많죠? 이판사판으로 믿는다면, 나를 끌고 다니는 나의 주인을 믿는다면 육체가 오늘 죽든 내일 죽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또 나는 죽을지언정 내 자식은 죽지 말아야 한다는 그 착이 또 있거든요. 그런데 부모든 자식이든 착을 두지 말아야 진짜 사랑을 할 수 있어요. 착을 두게 되면 오히려 가던 발목을 쥐고서, 옷자락을 쥐고서 끊임없이 그걸 가지 못하게 매 놓는 형국이거든. 전구는 많지만 전력이 다 똑같듯 내가 컴컴하면 자식들도 컴컴해지는 거예요. 내가 밝아야 자식도 밝게 되죠. 한방에서 살면서 내가 불을 켜면 다 같이 밝게 살 수 있을 텐데 내가 불을 켤 줄 모른다면 다 같이 컴컴하게 살 수 밖엔 없죠. 그와 같은 거죠.

그러니까 좀 더 믿고, 믿는 것도 그래요. 내 주인공을 믿는다면 그 주인공과 둘이 아니게 가설이 돼 있거든. 자식이다 부모다 부부다 하는 가설이 돼 있거든. 그러니까 내 마음의 그 주인공에 탁 맡기고, 둥글려서 맡기고 있으면 어디 갔다 안 들어온들 걱정이 되나? 걱정이 하나도 안 되는 거야. 그렇게 믿으라는 얘기지. 그렇게 믿어야 될 텐데 벌써 “어디 갔다 왔느냐. 여태 뭘 하고 있었느냐.” 진짜 사랑을 한다면 난 그러고 싶어요. 사랑을 진짜 한다면, 사랑은 주는 것이 사랑이지 받으려고 아등바등하면 오히려 받아지질 않아요. 

그러니 남편이든 자식이든 또는 부인이든 모두가 그저 마음 편안하게 믿어 준다면 아무 데를 가도, 또 그 남편이나 자식은 자기 어머니를 믿고 자기 아내를 믿고 이럭하고선 태평하게, 마음 편안하게 일을 하니까 순수하게 무슨 일이든 잘되겠죠. 그런데 안에서 바둥거리면 바깥에서도 허둥거리게 돼 있거든요. 그거는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그래요. 허둥지둥 허둥지둥하다 보면 일은 일대로 못 하고, 일은 일대로 잡쳐지고 자식은 자식대로 바둥거리니까 점점 더 달아나가게 되고, 이게 아주 몹쓸 일이 되는 겁니다. 이거 이렇게 얘기해 드리는 거 깊이 좀 잘 들어야 돼요.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어느 사람이 이렇게 했더래요. 남편은 술만 먹으면 들어와서, 주사가 있었던 모양이죠. 그런데 그 괴로움에다가 자식조차 또 그렇게 괴로움을 주는 거야. 나가서 며칠씩 안 들어오거나, 학교는 나간다는데도 며칠씩 안 들어오고 기껏 들어와서 하는 소리가 “내가 들어오면 뭘 하느냐. 안 들어오는 게 낫지.” 이러고는 속을 썩이니까 엄마가 있다 하는 소리가 “남편 덕 없는 놈이 자식 덕이 있겠느냐.” 하면서 “그저 모두 나가서 빌어먹든지 깡통을 차든지, 나가서 그냥 다리 옹두라지나 부러졌으면 좋겠다.” 하고 이렇게 허술히 그냥 말을 뱉은 것이 정말 그 이튿날 사고가 나서 다리가 부러지고 남편은 유치장에 가 있고 그렇더라는 거지. 그러니 누구 속을 썩이는 거요? 자기가 해 놓고 자기가 썩는 거라.

차라리 그냥이나 뒀더라면, 차라리 모든 것을 그저 그냥 믿고 여기다 맡기면 가설이 돼 있어서 거기까지 밝아져서 오히려 “엄마!” 하고 들어오고 “아유, 왜 내가 술만 먹으면 당신한테 이래?” 하고 뉘우칠 수 있는 것을, 그런 길을 주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뱉어 버리는 그것이 독이란 말야, 독. 아주 극치적으로 속이 상할 때는 독이 나오거든. 가설이 된 그 줄에 독이 가서 그냥…. 그러니까 우리 살림살이가 전부 가설이 돼 있다 이거야. 그러니까 과학적이면서 이건 생활이다 이거야.
그러니 어차피 나왔다가 이 몸뚱이를 가지고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닌 걸 서로 모여서, 즉 말하자면 놀러 한 철 나왔다가 만난 인연들인데 진짜 사랑하고 그러려면, 진짜 거기다 놓고 부드러운 말과 부드러운 행을 해 준다면 가설된 대로 점점 다 밝게 같이 돌아가기 때문에, 불이 같이 돌아가기 때문에 아주 나중에는, 한 번 밝아져 두 번 밝아져 세 번 밝아져 그러다 보면 그 부인이 생각한 대로 ‘아, 내가….’ 하고 자기는 회개를 하는 거야. 

또 부모가 생각하는 대로 자기는 ‘내가 그렇게 망종같이 해도 어머니는 기다리고 계시고 어머니는 부드럽게 해 주시고, 어머니는 부드러운 말로 이렇게 자식을 사랑하는구나.’ 하는 그러한 마음이 들기 시작해. 속으로는 미워하면서 그러지 말고 속으로도 밉지 않게 그냥 내맡겨라. 너도 한 철 놀러 나왔고 나도 한 철 놀러 나왔다 이거야. 그러니까 속담의 말로 자식이다 부부지간이다 하는 것도 자기 소관의 소유물이 아니다 이거야. 다 같이 놀러 나온 거야. 놀러 나왔다가 맺어진 인연들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하고, 나가서 여자를 보고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걸 그냥…. 그게 그렇게들 중요한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하여튼 따뜻하게 말해 주고 따뜻하게 행을 해 준다면 항상 따뜻한 데로 고이게 돼 있거든. 여름에는 시원한 데로 고이게 돼 있고, 물은 항상 골짜기에서 깊은 데로 고이게 돼 있거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다 마음을 신성하게 갖고, 오늘부터라도 신성하게 갖고 ‘사랑을 한다, 사랑을 안 한다’를 떠나서 내 마음속의 주인공, 그 주인공을 붙들고 울지언정 ‘서로 만난 인연들이 이렇게 속을 썩이니 속을 안 썩이게 당신밖에 할 수 없다.’ 하고 맡겨 놓고 울더라도 울어라. 

거기다가 아무리 말을 하고 아무리 바가지를 긁어도 소용이 없어. 오히려 달아나가. 자꾸 달아나가. 이건 마음의 놀이기 때문이야, 마음 놀이. 그러니까 그런 것을 바가지 긁으려면 내가 오히려 물에 빠져서 퍼덕거리게 되는 이치가 많거든. 내가 빠지지 않고는 남을 물에 넣을 수가 없거든. 내가 속이 부릉부릉 끓지 않으면 어떻게 그거를 말을 하느냐 이거야. 말을 하게 되면 내 속이 더 썩지. 그러니까 내가 망가지지, 그쪽 망가지지. 다 망가지게 돼 있어.

진짜 사랑을 한다면, 아까도 얘기했던 거와 마찬가지로 자식도 어렸을 때 고분고분히 엄마 말을 듣고 이럭할 때, 그 조그마했을 때 그때뿐이지 거기서 조금 머리가 커지면 벌써 그걸 각오해야 돼. 내 소유물이 아니다라는 거. 같이 놀러 나왔던 인연들이 만나서 이렇게 산다는 거. 내가 한 말 되하고 한 말 되하고 그러는데, 나가서 공부를 안 한다고 “공부 공부 공부 공부 공부…” 하면 얼마나 지겹겠습니까. 

차 타고 오다가 보니까, 세 살 먹은 애도 차에 치일까 봐 쏜살같이 달아나가더라고. 세 살 먹은 아이도 저 살 궁리를 하는데 어째서 모두들 저 살 궁리 안 하겠느냐 이거야. 빤한데, 벌써. 애들이 더 잘 알아요. 그런데 “공부 공부 공부” 하다 보니까 이건 자기를 생각할 여유가 없고, 자기가 좀 해야 되겠다 하는 여유를 주질 않아. 그러고도 귓전에 자꾸 들어오니까 지겨운 생각이 들어가. 자기가 개선해서 자기가 해 나갈 수 있는 그런 여유를 주지를 않아서. 그러니까 하고 싶은 것도 내가 하고 싶어야 능률이 나는 거지 남이 “해라, 해라” 해서 하는 것은 능률도 안 생겨.

그리고 모든 점에서 내 소유물이라고 생각을 안 하고 좀 더 능동적인 지혜로 이렇게 리드해 나갈 수 있는 그러한 마음 자세나 말 자세나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거. 이건 내 소유물로 알기 때문에 꼭 그렇게 해야 하고, 꼭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고, “당신은 내 거니까 내가 꼭 필요한 존재고 내가 꼭 이렇게 하자는 대로 해야 된다.” 이런 게 아니라고. 이 세상에 날개를 가지고 훨훨 날면서 놀러 다녀도 시원치 않은데 마음으로다가 그냥 딱 묶어서 항아리 속에다 딱 넣어 놓고 이렇게 한다면 넣어 놓은 사람도 그걸 지키느라고 꼼짝 못 하고, 거기 들어간 사람도 꼼짝 못 하고, 이거는 산 지옥이지 살아간다고 볼 수 있겠소? 

그러니까 좀 넓게, 그렇다고 해서 다 팽개치라는 것이 아니고 좀 더 거기다가…. 이 가설이 다 돼 있기 때문에 이 손바닥 안에서 어디 가질 못해요. 전부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저 널리 울을 쳐 놓고, 지금 있는 게 이 지구 아니겠소. 이 지구 바깥을 벗어나지 못하죠. 지금 울타리를 널리 쳐 놓고선 그 안에서들 지금 사는데 그 안에서나마 좀 활력성 있게, 좀 마음이 좁지 않게, 지혜로이 나가게끔 자꾸 개선해 주는 게, 어머니나 부인이나 또는 아버지나 남편이나 이게 서로 똑같이 해야 할 일이라.

여러 말을 해도, 우리가 근본적인 이 도리를 모르면 여러 말 해 줘도 그게 소용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살아나가는 것이…. 우주의 근본은 인간의 마음에 직결이 돼 있다. 이 세상 이치는 전부 가설이 돼 있다. 그러니까 공생, 공용, 공체, 공식화하고 조화를 이루고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게 고정됨이 없다. 그러니까 공했다. 그러니까 찰나찰나 바꿔지면서 생활을 하고 있다. 그 바꿔지면서 돌아가는 생활을 바로 누가 하는가? 자기 안에 자기를 끌고 다니는, 이걸 끌고 다니는 그 주인이, 바로 마음 내는 주인이 끌고 다닌다. 그러면 그 마음 내는 자체가 바로 그 몸속에 든 영혼들을 전부 한마음으로 몰아서 다스리는 거거든.

사람은 모두 모르지만 이 속에서요, 팔자 운명이라는 게 어디 있는 줄 아세요? 내 몸속에 다 있어요. 팔자 운명 뭐, 유전성 영계성 인과성, 이게 다 이 몸속에 들어 있는 거예요. 왜 들어 있다고 하느냐. 어머니 아버지의 정자 난자로써 몸뚱이는 받지만 과거에 자기가 살던 그 영혼들이 전부 자기한테 인과로 뭉쳐서 자기 영혼과 더불어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자라서 지금, 몸뚱이 속에서 우굴우굴 우굴우굴하고 살고 있잖아요. 거기서 일을 저지르려면 남을 시켜 가지고 남한테 들어가 가지고 여러분한테 부딪치게 만들고, 또 자식한테 들어서 자식한테 부딪쳐서 싸우게 만들고 부부지간도 역시 그렇게 만들고 재난이 드는 것도 역시 그렇고 병고가 생기는 것도 역시 그렇고….

그러니까 지금 의학술로는 35%밖에 될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원인이 거기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도리를 알면 ‘아, 요것도 핑계 없는 무덤이 없지. 요것도 거기서 나온 거고, 요것도 거기서 나온 거고.’ 그저 모조리, 모조리 거기서 나온 거라고 거기 맡겨 놓고선 돌아갈 때 아무 부담이 없는 거야, 죽든지 살든지. 죽이는 것도 너, 살리는 것도 너, 고달픈 거를 평화스럽게 해 주는 것도 너. 모든 것이 거기니까. 모두 한군데 맡겨 놓는 작업만 열심히 하면 그뿐이지 내가 잘되겠다 못되겠다 왜 참섭을 하느냐 이거지. 그렇게 거기 갖다 맡겨 놓으면 거기서 주인이…. 

이 몸속에 있는 영혼들도 전부 한데 합쳐져서 한 덩어리가 돼 가지고, 뭉쳐지니까 살고 흩어지니까 죽는다는 얘기야. 이 마음들도, 의식들도 뭉쳐져야, 이 한마음, 다스리는 마음을 따라 줘야 전부 몸도 건강하지. 내 마음이 건강하니까 몸도 건강하지, 몸이 건강하니까 돌아가면서 내 가정도 건강해진다 이거야. 첫째, 속 안 썩으니 건강하지. 또 파워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아, 거기서 나왔으니까 거기서 고칠 수밖에 없다.’ 하고 믿는 데는 어쩔 수 없는 거거든.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법은 없거든.

그 묘법을 그렇게 두고도 항상 믿지 못해서 아등바등…. 여기서 듣고 나가면 그냥그냥 흘려버리고는, 실오락지 같은 게 어디까지 가다가 그냥 이렇게 흩어져 버리고 말아 버려. 이 세상의 팔자 운명 그런 것들을 전부 한데 합쳐서 이 주머니 속에 모두 가지고 있는데, 주머니 속에서 나오는 것 주머니 속에다 되넣는다면 앞서 것은 없어진다고 그렇게 해도….

그러니까 난 요새 말도 하기 싫고…. 한 날 저 바람 불고 나뭇잎 나부끼고, 피었다 시들고 시들었다 피고 물 흘러 돌고, 세상이 그렇듯이, 또 세상이 그런가 하면 우주 자체가 그렇고, 그렇게 돌아가고…, 뭐, 할 말이 있어야지. 할 말이 없는데 말이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그만하면 족하다는 셈으로 아, 좀 그렇게 살면 좀 어떻소! 아니, 그렇게 복작거리고 그렇게 해서야 어디 사람 살맛이 나겠소? 내일 아침거리가 없다 하더라도 아니, 요새 같은 세상에 먹게 하는 것도 너, 굶기는 것도 너, 아, 그렇다면 입히는 것도 너, 못 입히는 것도 너, 집에서 못 살게 내쫓게 하는 것도 너, 집에서 살게 하는 것도 너, 모두 너라면 그렇게 아둥바둥할 것이 뭐 있소?

머슴을 사는데 말이오, 머슴을 사는데 주인이 하자는 대로 하고 주인이 시장 봐다 주면 그저 그대로 반찬 해서 먹고, 또 안 사다 주면 안 사다 주는 대로 하고 “가서 해 오너라” 그러면 해 오고, “저거 가서 보고 오너라” 하면 보고 지키고, 이래라 하면 이러고 저래라 하면 저럴 것이지 뭐 그렇게 말이 많소? 뭐 그렇게 그 습이, 그냥 ‘나’라는 습에서 영 떠나지를 못하시니…. (녹음 안됨)

※위 법문은 대행 선사 법문집 ≪허공을 걷는 길≫ 중 1991년 9월 10일 일반법회 법문의 일부를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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