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마음의 근본은 국한돼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대입니다

논설도 필요 없고 이론도 필요 없습니다.
이론을 따지다 보면 한이 없어요.
이 물을 봤을 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싶으니까 먹었을 뿐이듯이
모든 일이 그러한 것입니다.

백종을 지내는 뜻이 무엇인지요

질문 불교에서는 백종이 큰 명절 중의 하나로 돌아가신 조상들의 영혼을 건지고자 백종날 천도재 의식을 지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바르게 알고 있는 것인지요.

답변 그런데 말입니다, 그 영혼 자체가 바로 육신과 둘이 아닙니다. 이 육신과 영혼이 있는 데다가 그 불씨 에너지, 원소 자체가 있어서, 즉 작용할 수 있도록 마음을 내 주게 하는 겁니다. 이 영혼이라는 그 자체가 마음속에서 다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을 신이라고도 하고, 악신이라고도 하고 선신이라고도 하죠, 마음을요. 마음을 잘 쓰면 바로 선신이요, 마음을 악하게 쓰면은 악신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영혼도 악신으로서 삶을 악하게 살았으면 아주 악의적인 영혼이 되고요, 선의적으로 지혜롭게 대치를 해 나가고 마음을 넓게 잘 쓴 사람들의 마음은 악신이 아니라 선신으로서 구별이 되죠. 

그러니까 지금 마음 한군데서, 이 영혼이 악신도 나오고 선신도 나옵니다. 영혼 자체가 자기 근본은 아닙니다. 영혼은 악신이 될 수도 있고 선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혼은 그냥 이름일 뿐입니다, 영혼이라는 이름. 마음을 잘 쓰는 데서 나오는 선신도 영혼이요, 악신도 또 영혼이다 이거죠. 그러니까 영혼이라는 그 자체는 바로 자기 마음 씀씀이에 따라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남녀노소 할 거 없이 돌아가시면 재를 곱게 쳐서 이렇게 놓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인도환생을 했으면 발자국이 나타난다거나, 독사가 됐으면 독사 흔적이 나온다든가 이런 게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악행을 한 혼백이라면, 귀신이 머리를 풀어서 산발을 한 모양도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모양을 보더라도 그렇고, 영혼이라는 것은 우리의 불씨가 아니라, 그 마음을 내 주는 반면에 마음속에서 나와서 행동하는 거죠. 거기서 나오는 거를 영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영혼의 업식’ 이러죠.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지만 영혼의 업식은 따라간다구요. 자기의 불씨는 항상 밝아서 여여한데 그 업식, 영혼이 그냥 얼기설기 얽혀 가지고 업식이 돼서 현실에 나온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악신도 되고 선신도 된다는 얘기죠. 악신으로서 너무 악하게 했다면 진짜 악신으로 활동을 할 거고, 선신으로서 행했다면 선신으로 활동을 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공부시키는 거는 악신이고 선신이고 몽땅, 악신이 나오면 악신인 대로 거기다 놓고 선신이 나오면 선신이 나오는 대로 감사하게 거기 놓고 이렇게 하라는 얘깁니다. 업식이 다 이 몸속에 들어 있으니까 악신으로서 악행을 하게끔 이 마음속에서 나오거든요. 

그래서 악신으로서 행이 나올 때는 ‘어, 이것도 네가 저지른 일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 하고 거기다 놓고 ‘이것도 공부고 재료지.’ 하고 거기다 놓고요, 또 잘되고 싱그러운 일이 생기면 ‘이것도 감사하구나.’ 하고 감사하게 거기다가 맡겨 놓고요. ‘참 감사하구나.’ 하는 생각만 해도 맡겨지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현재 마음을 그렇게 먹었으면 죽어서도 영혼이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혼을 건지고자 백종을 마련해 놓았고 칠석을 해 놨죠. 그런데 이런 게 있죠. 사람이 죽으면 악행을 했든지 선행을 했든지 간에 그 모든 문서를 그냥 해결해 버리고 불씨를, 그냥 여러분이 땅을 갈아서 돌을 주워 내버리고 골라 놓는다면 이 스님네들은 씨를 거기다가 심어 주는 겁니다. 백종이 그 역할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정성껏 부모, 조상 영가들을 써 가지고 오시면 그게 밭을 갈고 밭을 고르는 거나 같은 거죠. 봉투에다가 모두 이렇게 정성껏 해 가지고 오시는 건 그러한 작업입니다. 그러면 이쪽에서는 그 밭에다가 불씨를 심어 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는 인도환생을 해서 싹이 나죠. 싹이 나는 것이 인도환생을 하는 거니까. 그래서 인도환생하는 것도 그 자손들이 얼마나 정성껏 잘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부잣집으로 태어나느냐 가난한 집으로 태어나느냐 하는 것도 있죠. 또 깡통의 차원이라서 깡통끼리 태어나게 하느냐, 하하하, 선신이라서 선신끼리 태어나게 하느냐? 가족의 모든 것도 그러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을 때는 배우면서 지혜롭게 넘어설 수 있고 업을 면제할 수도 있죠. 그리고 잘 생각하고 계속 지극하게 수행해서 자기 무명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죽으면 더하고 덜함도 없기 때문에, 그게 새로이 의복을 다시 갈아입고 나오는 때라 교차로가 되거든요. 교차로에서는 어떻게 자기가 더 배우고 나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더하고 덜함이 없죠. 이 몸, 모습이 없으니까 부딪침이 없고, 부딪침이 없으니까 상대가 없고, 상대가 없으니까 배울 게 없고 그런 거죠. 그래서 살아 있을 때 꼭 이 도리를 배워야 된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을 제대로 쓰지 못하면요, 이 정신세계의 마음을 못 배우면요, 영혼이 죽어서 말입니다, 아휴, 자기 몸체가 있는 줄 알아요. 옷을 벗었어도 벗은 걸로 알지 못한다니까요. 그래 가지고 물에 빠져 죽을까 봐 못 가고, 불에 타 죽을까 봐 못 가고, 또 귀신들 많고 짐승들이 많은 데는 잡아먹힐까 봐 못 가고, 이렇게 넘어서질 못하는 거죠.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했고, 부처님께서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저 언덕을 넘어서야 하느니라.” 하셨는데, 이 도리를 알고 보면 언덕을 넘어갈 것도 넘어올 것도 없단 얘기죠. 그 도리를 알면 산 부처죠, 산 법신이구요. 가만히 있으면 산 부처고 생각을 냈다 하면 법신이고 몸을 움죽거렸다 하면 화신이에요, 그냥요.

창살 없는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질문 큰스님 법문에도 나와 있듯이 우리가 창살 없는 감옥을 스스로 만들어 놓고 살아가고 있다는 게 정말 실감이 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답변 아침 저녁 자고 깨는 것도 실감 나지만 우리가 흩어졌다가 모이는 것도 실감 나죠. 우주 자체도 그렇게 흩어졌다가 모이고, 모였다 흩어지고 하는 작용을 쉴 사이 없이 하거든요. 먹고살기 위해서, 가정생활 속에서 내 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회 또는 내가 살고 있는 그 자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생각해 보지도 못하면서 살아나가는 수가 많습니다. 자기 죽을 날도 생각하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서도 죽을 날은 생각지 않죠.

요새 난 ‘여러분이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부자유하게 살고 있구나.’ 하는 거를 생각할 때 너무나 딱해서 기가 막힐 때가 많아요. 참,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창살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창살 속에서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면서 구속을 받고 살고 있나. 자기 마음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우리가 폭넓게 생각을 해 보십시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체 천차만별의 사생들, 그 모두가 어떻게 살고 있나. 천차만별의 사생들이 모두 자기가 살아온 습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왜 벗어나지 못할까요? 

한 가지 예를 한번 들어 봅시다. 연어인가, 은어인가? 하여튼, 왜 그것은 자기가 태어난 자리를 떠나서 세상천지를 돌아다니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서는, 자기 모습을 형성해 놓고 자기는 없어지는 그러한 역할을 벗어나지 못하고 쉴 사이 없이 하게 될까요? 사람이라고 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우리의 모습들로 인해 먹히고 먹고 살아온 그 습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습이 쉴 사이 없이 반복되는 반면에 누적이 되고 누적이 되고 그래서, 하여튼 그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려고 한 번도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왜 그대로만 따라갈까요? 그대로 따라가더라도 우리 마음은 발전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마음의 발전이 있어야만이 우리의 삶도 발전이 생기고, 또는 발전이 생기는 반면에 창조력이 생기고, 창조력이 생기면 물리가 터지고, 물리가 터지면 지혜로워지죠, 마음이 넓어지고. 그래서 우주 천지를 곳곳마다 심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자유스러운 사람이 되죠. 

그렇다면 어떻게 넓게 봐야 하나? 첫째, 우리가 공기주머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죠. 그 사실만 알아도 그것은 아주 폭넓게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알고만 있어서도 안 된다고 했죠. 항상 얘기하는 것처럼 마음은 체가 없으니까 과거, 현재, 미래를 한 찰나에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고 행할 수도 있다. 삼천 년 전을 지금 현재에 일 초로 갖다 놓을 수도 있다. 미래를 일 초로 갖다 놓을 수도 있다. 이것은 못을 박아서 ‘미래의 어느 때에 이렇게 갖다 놓을 수 있다’ 이런 게 아니고, 시공을 초월해서 멀고 가까움이 없이, 또 가고 옴이 없이 자유롭게 가고 옴을 말하는 거죠. 

이 모든 도력이 어디서 생기나? 마음이 폭넓고, 폭넓은 그 무리들이 사는 그 가운데에 바로 나도 더불어 함께 한마음으로 지금 생활을 하고 있는데, 나를 형성시킨 놈이 어떤 놈인가? 내가 나를 형성시켜서 지금 끌고 다니는데, 물론 혼자는 할 수 없어서 어느 부부를 등장시켜서, 정자 난자를 빌리고 몸을 빌려서 형성시키는 겁니다. 벌레가 나무를 의지해서 자기 몸뚱이를 붙들어 매서 진화를 시키는 것처럼, 우리는 기대지 않고는 못 살아요. 그래서 항상 여러분한테 해 드리는 말이 ‘공생, 공심, 공용, 공체, 공식화하고 돌아가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먼 데로 가서 공부를 하겠다, 산으로 올라가서 공부를 하겠다, 홀로이 앉아서 공부를 하겠다 이런 것은 아주 어긋나는 일이죠.

어떤 선지식께 제자가 이런 말을 했다죠. “분주하고 시끄러워서 저는 도저히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산으로 올라가서 토굴을 묻고 살겠습니다.”라고 하니까 “그러면 너는 지금 곧바로 가되 길을 딛지 말고, 남이 짜 준 옷을 입지 말고, 남이 농사지은 밥을 먹지 말고, 남의 물을 먹지 말고 남의 땅에다가 오줌도 누지 말라. 그리고 남이 농사지어서 지붕을 만든 건데 그 지붕 밑에서 어떻게 자느냐? 남들이 다 해 놓은 데서 너도 더불어 같이 살면서, 더불어 같이 사는 너의 모습과 너의 생명과 너의 아픔을 다 버리고 무슨 공부를 한다고 하느냐!”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떠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뜻을 그때서야 알고 ‘어허, 이게 모두가 한도량이구나!’ 하고 가는 바도 없고 오는 바도 없이 공부를 했더랍니다. 

그런 거와 같이, 이걸 말로 꼬집어서 어떻게 다 하리까? 말로 해서 마음이 승화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말로 꼬집어서 다 할 수가 없어요. 비밀문서라는 것이 정신세계의 비밀이니까요, 전부. 우리가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 것도 비밀이거든요. 예전에는 모습을 가지고 축지법을 했지만 정신계의 축지법이 지금 시점에는 필요하니까요. 지금은 정신을 먹고 살고, 정신을 잡아먹느냐 정신을 뺏기느냐 하는 문제들의 싸움이라고요. 지금 구순히 사는 것 같지만 전체가 전부 싸우고 있는 거죠. 이런 싸움을 안 하고 어떻게 평등하게 공법으로 대치를 해 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모두가 내 몸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고, 내 형상 아님이 없는데 모든 거를 밟고 먹고 이렇게 사는 것이 어떻게 인간의 도리를 다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법은 없을까? 그래서 삼천 년 전에 부처님께서 그 뜻을 일러 주셨고 지금까지도 일러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도리를 깨달았다 해도 각각 있는 게 아니에요. 이 도리를 자세히 들으세요. 마음은 체가 없어서 깨달은 사람들의 마음이 아무리 많이 마음을 통해서 들어와도 두드러지지 않고, 여러 부처님들의 마음이 여기를 통해서 바닷물 내놓듯이 다 내놔져도 줄지 않아요. 이렇게 광대무변하고 묘한 도리가 우리들에게 다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도 관습의 습에, 인연줄에 매달려서 그냥 꼼짝을 못 하고 있는 거예요. 한 식구, 부부, 자식이다 할지라도 그 자식들의, 부부의 몸을 붙들고 매달리지 말고, 만약에 그 마음을 둘 아니게 놓고 슬기롭게 굴린다면 몸은 저절로 붙들어지고, 사랑은 저절로 화해서 자비의 정이 되어서 뗄래야 뗄 수 없이 이어져 가면서 더불어 하나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묘법이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어떡하면 요것을 요리를 잘해서 잘 먹여서 그 맛을 알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도무지 쉽지가 않고 땀이 부쩍부쩍 나잖아요. 왜 그러냐 하면 지구에 붙어서 사는 사람 벌레는 화해서 한 발을 떼어 놔야만이 이 공기주머니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그래야만이 자유자재할 수가 있고, 그래야만이 내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가 있는 평등봉에 같이 한자리를 할 수 있어서 여래 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분별심을 놓아야 하는 이유

질문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려면 분별을 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데 마음공부를 하는 데는 분별심을 다 놓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지요.

답변 우리가 학술적으로나 경학으로 모든 것을 일일이 따져서 배우려면 천 년이 가도 다 못 배울 겁니다. 다 못 배울 뿐만 아니라 깨치지도 못하실 겁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께 인도해 드리는 거는 “항상 일거수일투족이 다, 내 몸에서 나오는 거는 다 그놈이 하는 거다. 모든 것을 작용하게 해 주는 의식들도, 생명들의 의식들도 다 다스리는 그놈이 하는 거다.” 하는 겁니다. 

이 모든 오장육부의 소임을 맡고 있는 그분들, 그분들이라고 해도 돼요. 사람 속에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분들도 다 내 선장의…, 선장이라는 건 여러분의 마음에 따라서 응해 주면서 밀고 나가는, 그 천차만별의 의식의 힘들 말입니다. 그런 걸 본다면 요만한 거 하나 빼놓지 않고 내 몸뚱이가 움죽거리고 사는 것이 모두 나의 불성 원동력이 그렇게 힘을 배출해 주는 까닭에 움죽거리지 않고도 이 우주 천하를 다 움죽거리게 하는 그런 능력을 가졌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의 마음의 근본은 국한돼 있는 게 아닙니다. 무한대입니다, 무한! 항상 진화해서 발전시키고, 발전하면서 또 거듭거듭 발전할 수 있는 무한한 심성의 근본입니다. 우리가 마음공부를 하면서 반야줄이라는 자기의 줄을 잡고서 나가는 거는 당연하지만, 본래는 반야줄이라는 것도 없고, 마음이라는 것도 없고, 문이라는 것도 없고, 교차로라는 것도 없이 그대로 그렇게 여여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가르치기 위한 방편의 이름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이해하시게끔 한번 이렇게 뒤집어 봅시다. 이 세상의 도리로 악이다 선이다, 나쁜 거다 좋은 거다, 모자라다 영리하다, 길다 짧다, 죄가 있다 없다 하는 것이 논의되는데 이것이 자기를 막아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있다 없다도 없습니다. 참 미묘한 거죠. 인간은 당연히 고등적인 차원이기 때문에 이러니저러니 하는, 죄가 있다 없다, 업이 있다 없다, 무명이 있다 없다 이런 게 근본에는 없습니다. 

내가 항상 “죄가 있든지 없든지 무조건 믿고 무조건 놔라.” 이랬습니다. 그것입니다, 바로! 무조건 놓게 되면 무조건 사대로 통신이 되면서, 모든 오장육부의 의식들도 통신이 되면서 대뇌를 통해서 정수에 입력이 된다고 그랬죠. 입력이 되면은, 내 생각으로 잘됐다 못됐다가 없이, 잘된 것도 못된 것도 착이 없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분별이 없이 무조건 거기다가만 넣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놓게 되면, 앞서 차원으로 살아오면서 입력됐던 것이 다 없어집니다. 무조건 하고 없어지는 거죠. 무조건 놨으니까 무조건 없어지는 겁니다.  

이 마음공부를 하는 데 그렇게 세세하게 이유를 따지고, 분별을 하고, 옳으니 그르니 한다면 저승 세상은 맛도 못 봅니다. 죽는 사람이, 한순간에 숨이 끊어질 텐데도 불구하고 자기 자식들을 두고 죽으면서 이유를 붙입디까? 죽는 사람은 이유를 못 붙여요. 

그렇듯이 우리가 죽은 세상에 들어가서 모든 걸 할 수 있어야죠. 듣는 사이 없이 듣는 세상, 보는 사이 없이 보는 세상, 가고 오는 사이 없이 가고 오는 세상, 내가 자유자재로 ‘이렇게 하겠다’ 하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겠다’ 하면 저렇게 하는 거, 이게 평등공법의 원리입니다. 이유를 붙인다면 어떻게 그런 세상을 배우고 맛볼 수 있겠습니까? 

죽으러 가는 사람이 ‘이 길이 옳다, 저 길이 옳다’ 이러고 갑니까? 죽는 사람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사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길에서 와서 길로 갔노라.’ 하셨지만 부처님만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도 역시 길에서 와서 길로 가는 겁니다. 한마디 더 붙이자면 ‘길을 걷다가 길로 간다’ 이런 말이죠.

그러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살아오던 습과 착과 욕심과 그 의식으로 지내던 모든 것이 앙금처럼 앉아 있기 때문에 이 생각 저 생각이 복잡하게 일어나는 거죠. 지금 한세상 살아가기도 바쁜데, 그리고 귀찮은 일도 많은데, 생기는 대로 닥치는 대로 한마음 속에 모든 거를 다 놓고 편안히 그냥 길을 걸어가면 얼마나 편리합니까? 그 골치 아픈 거를 다 이유를 따지고…, 사람이 젊었을 때는 좀 따지기도 좋아하고 또 뛰어들기도 좋아하고 그러다가도 나이가 좀 들면 점점점점 식어집니다. ‘에이, 귀찮아. 그저 뭐, 끼어들어 봤자 그렇구.’ 이렇게 하듯이, 그냥 모든 거를 차례차례 닥치는 대로 다 놔 버리세요.

논설도 필요 없고 이론도 필요 없습니다. 이론을 따지다 보면 한이 없어요. 살아나가는 모든 것을 이론으로 따지고 하는데, 무의 세상에 공법의 도리로서 가고 옴이 없이 일을 하는 것은 그대로 내 한생각이라고 할까요? 생각이라고 해도 그것도 방편이죠. 이 물을 봤을 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싶으니까 그냥 먹었을 뿐이죠. 모든 일이 그러하다 이겁니다. 

머무르지 않는 마음이란

질문 금강경에도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하셨는데 머무르지 않는 마음은 어떤 것인지요.

답변 여러분은 머무른다는 생각을 하고, ‘내가 아버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애가 와서 부르면 아버지 노릇을 합니까? 또 “여보” 하고 부르면 ‘내가 남편 노릇을 해야지.’ 하고 생각을 하고 남편 노릇을 합니까? 그렇게 미리미리 아주 생각을 하고 합니까, 모든 일체 만법을? 그리고 병고가 오더라도 ‘병고가 간다’ 이러고선 옵니까? ‘내가 병을 앓겠다’ 하고 앓습니까? 

항상 얘기했죠? ‘주인공이 청정함을 어찌 알았으리까?’ 이 청정하다는 뜻은 더럽고 깨끗한 게 전체 한데 합쳐서 돌아가고 ‘나’라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청정하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그 한 구절을 듣고서 지견이 열렸다고 한다면 여기 있는 분들 다 지견이 열립니다. 머무르는 바가 없이 여러분이 지금 생활하지, 아니, 머무르는 바가 있게 생활합니까? 마음은 체가 없습니다.  

이거 보십시오. 마음속으로 ‘야, 내가 집을 짓겠다.’ 한다면 그것도 머무름이 없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짓겠다 했습니다. 그런데 바깥으로 집이 올라갔단 말입니다. 머무르는 바가 없이 머물렀다는 얘기죠. 일상생활을 전체 머무르는 바 없이 하고들 가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대로 여여하고 그대로 갖추어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주인공의, 그 중심에 의해서 들이고 내는 데 자유스럽다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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