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된다 못된다 개의치 말고 용광로에 넣는 작업만 하세요

제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가는데
자꾸 짊어지고 갈 바가 뭐 있습니까.

몸뚱이 하나 올라가는 것도 무거운데
다 놓고 올라가시라 이겁니다.

여일하게 놓고 가려면

질문 일체를 주인공에 놓는다 다짐하고 공부하고 있는데 어떤 때는 잘 놔지는 것 같은데 어떤 때는 잘 놔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관하면 잘되는데 어떤 때는 관해도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여일하게 잘 놓고 갈 수 있을는지요.

답변 모두 일체 사는 게 공했어요. 찰나 생활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공한 그릇이에요, 공한 그릇. 그러니 여러분이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는 것을 다 당신 내면의 주인공에 일임하라 이겁니다. 그 주인공이라 하는 것은 어떠한 개별적인 자기를 내세우는 게 아닌 한마음의 도리로서 그냥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했다 네가 했다 하지 마시고 그대로 여여하게 하시면서 놓아라 안 놓아라 하는 이런 것도 놓으십시오. 그 생각을 전체 놓으시고 그대로 하세요.

잘되고 못되는 거, 나중에 잘된다 못된다 이런 거는 개의치 말고 용광로에 넣기만 하는 작업을 해라 하는 것입니다. 용광로에 넣기만 하는 작업을 한다면 재생돼서 나오는 쇠는 자동적으로 스스로 나오니까. 내가 이렇게 놓는다고 해서 잘될까, 못될까 이런 건 걱정하지 말아야 이게 진짜 정통으로 놔지는 거죠. 내가 이렇게 주인공에게 모든 것을 다 일임해서 놓고 난 뒤에 재차 ‘아이구, 이렇게 놓는다고 저 일이 저게 될까?’ 이러한 생각을 한다면 그건 용광로에 정통으로 들어간 게 아닙니다. 그래서 나중에 재생돼서 나오는 거는 생각지 말고 주인공에 넣는 작업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도 표현을 했습니다. 그 아주 높은 산꼭대기, 제일 높은 데를 올라가는데 자꾸 짊어지고 갈 바가 뭐 있습니까? 자꾸 놓고 가야지, 사람 하나 몸뚱이 올라가는 것도 무거운데 어떻게 자꾸 생기는 대로 짊어지고 가겠습니까? 그러니 올라갈 때는 다 놓고 올라가시라 이겁니다.

조금만 뭐가 보이는 게 있고 들리는 게 있고 이러면은 그냥 자만하고, 또 나쁜 게 보이고 좋은 게 보이고, 미운 게 보이고 또 이쁜 게 보이고 이걸 일일이 욕심내고, 그 아집을 가지고 나라는 조건에서 영 한 발짝도 떼 놓지 못한다면 거기 자기가 갈 수 있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 짐도 무거우니까, 이 몸도 공해서 이것도 놓고 지금 터벅터벅 가는 바 없이 가고 있는데 자꾸 짊어질 게 뭐 있느냐는 얘깁니다.

다 놓고 가다 보면 맨 상봉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비로소 둘러보니까 모두 그 위에서 내려다보이더라 이겁니다. 전체를 볼 때하고 조그만 개별적인 거 볼 때하고는 전혀 다르게 보이더라. 전체가 보이는 걸 보니까 ‘아이구, 저기서 일어나는 것이 여기로 인해서 일어나고 저기로 인해서 여기서 일어나고 이렇게 되니깐, 이쪽을 누르면 저쪽이 눌러지고 이쪽이 이렇게 자꾸 일어나니까 어떤 거를 손을 댈 게 없더라.’ 이렇게 되죠.

그래서 잘못하고 잘하고 그것이 없더라는 얘기죠. 그리고 남녀노소가 따로 없고. 무의 세계 유의 세계를 다 합쳐서 보니까 그렇더라는 얘기죠. 또 동 서가 둘이 아니고 남자 여자가 둘이 아니고, 대승 소승이 둘이 아니요, 어려운 사람 부자 사람 이것이 둘이 아니요, 권세 없는 사람과 권세 있는 사람과 둘이 아니요, 항상 뒤바꿔지더라, 돌아가더라 이겁니다. 그래서 거기서 내려올 때는, 내려올 때는 다 주워 모아서 담아도 담긴 사이가 없더라. 담긴 사이가 없으니 내려와서는 내놔도 내놓은 사이가 없이 내놔지더라.

그래서 무조건 여러분이 이 도리를 배우는 데는 천금 만금을 주고도 배우기 어려우니 지금 인연에 따라서 이렇게 배우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열심히 스스로 익히고, 자기 것을 만들어서 스스로서 자기가 응용할 수 있는 그러한 방법과 그러한 지혜와 그러한 자비를 가지고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얻으시라는 얘기죠.

우리가 아무리 남의 책을 보고 남의 말을 듣고 지식적으로 머리에 넣어서 그거를 때에 따라선 얘길 하고 쓴다 해도 그거는 헛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경을 본다 하더라도 백지를 볼 줄 알아야 글을 볼 수가 있고 글을 볼 수 있어야 만법의 근원이 지혜롭게 그 한 글자에서도 나올 수 있다 이런 말이죠. 그래 여북하면 ‘백’은 전체를 말하고 ‘지’는 지혜를 말한다고 하겠습니까. 글은 우리가 지금 용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렇다 좋다 하는 거를 모른다면 어떻게 부처를 이루겠습니까?

하여튼 망상이라는 것도 놓고, 우정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하는 마음도 놓고 꾸준히 물러서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대로 여여하게 갖추어 가지고 있으니까 그대로 믿으면 되는데 사생결단을 하고 ‘이놈의 게 왜 안 되나?’ 모질음을 쓰고, ‘이게 이렇게 놓으면 된다는데 왜 안 되나?’ 이러면지네가 가다가 “아이고, 다리가 저렇게 많은데 어떻게 저렇게 가나?” 하니까 딱 서서 못 가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못 갑니다.

그렇게 성실하게 일러 드려도 놓지 못하고 놨다 하더라도 다시 생각을 해서 ‘아이고, 이거 또….’ 하고 방방방방 뛰고, 그렇게 뛸 때 또 놓으라고 하니까 ‘아이구, 이렇게 놓고, 이렇게 놨는데도 안 된다.’ 이거죠. 안 된다는 생각까지도 놔야 될 텐데 그걸 놓지 못한다는 얘깁니다.

여러분 중에서 어떤 사람은 “아이, 그거 뭐, 한 번 죽지 두 번 죽습니까. 하늘이 무너져서 짜부러져 죽는다 하더라도 그냥 아이 뭐, 없으면 없는 대로 그냥 죽으면 죽는 대로 살죠.” 이러는데 그 사람은 아주 살게 돼서 괜찮고 아, 이건 살려고 바둥바둥하고 ‘왜 놓는데도, 그렇게 맡기는데도 안 되느냐. 주인공, 살려 주시오.’ 이러면 오히려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런 어리석은 행을 하시면 되겠습니까.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질문 생활하다 보면 어렵고 힘든 일이 많이 닥치는데 마음공부를 한다면 이 난관들을 잘 대처할 수 있을까요.

답변 여러분이 생활을 하시면서 제일 어려운 게 가난과 병고와 우환 등 여러 가지죠. 자식들을 이끌어 가는 데도 그렇고 또 부모가 자식들을 이끌어 가려면 움죽거리는 그 생활도 그렇고, 자기 몸 끌고 가는 것도 그렇고 참 여러 가지로 괴로움이 한두 건이 아니죠. 거기에 조금이라도 이 도리를 알고 공부한다면, 아주 편안하고 자유스러운 도리 또 생산적인 도리, 개발적인 도리를 공부하신다면 이것은 불가사의한 법으로서 그대로 편안하게, 언어조차도 붙지 않는 편안하고 자유스러운 생활을 해 갈 수 있는 거죠.

가만히 보면요, 사람들이 신경이 날카로워지면 바깥에서 유전성으로 오든 안에서 인과로 인해서 벌어지든, 영계가 들고 뭐, 안팎으로 그런 게 일어나거든요. 생활을 하다가도 뭐, 회사가 망했다든가 또 공부를 하다가도 그냥 지친다든가 하는 문제들은 도무지 내 능력으로는 따라갈 수가 없죠,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들은요. 그리고 생활 속에서 가정환경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 이런 거를 가만히 보면 여간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어떻게 해야만 그것을 다 물리치고 녹이고 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용도에 따라서 오는 대로 거기에 맡겨 놓고 ‘거기서밖에는 해결을 못 한다.’ 하고선 거기다 딱! 맡겨 놓고 지켜보는 그것이 관하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가 아니라 관하는 거다 이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켜보고 관한다’ 하면 그럼 어떻게 되느냐. 인과응보가 무너지고 습이 녹아지고, 나를 발견하게 되고 진짜 공부를 하게 된다 이겁니다. 또 한 가지는 바로 입력입니다, 입력! 컴퓨터에 입력하듯이 용도에 따라서 오는 대로 컴퓨터에 입력을 한다. 오는 대로 입력을 해 놓으면 그게 돌아간다. 자동적으로 돌아가게 돼 있는 자동기입니다. 물질적인 것을 떠나서 말입니다.

그러니깐, 예를 들어서 이제는 둘이 아니게 내 주인공에, 아들이 아파도 내 주인공에다가 모든 걸 맡겨 놓습니다. 그래서 웬만큼 해 나가서 완벽하게 이게 선다면,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그랬죠? 둘이 아닌 까닭에 물은 물대로 있고 산은 산대로 있죠. 둘이 아닌 까닭에 자식은 자식이고 나는 나다 이겁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병을 고쳐주려면, 예를 들자면 특히 정신질환은 더합니다. “네 주인공만이 너를 이끌어 갈 수 있다!” 네 주인공만이 너를 이끌어 갈 수 있다 하는데 거기에 무엇이 붙습니까? 그런데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묘한 생각이 있어요. ‘에이구! 이거는 무슨 어머니 조상이 붙었고 무슨 누구 영계가 죽었는데 여기 붙어서 이럭하고.’ 아, 요런 생각들을 한단 말입니다. 만약에 그렇다 할지라도 그 생각을 떠나야 할 텐데, 놔야 할 텐데 고런 생각들을 하니 이게 떨어집니까, 네? 뭐가 붙었습니까? 물 한 그릇에다 물방울 하나 넣은 거와 같은데, 항상 그렇게 일러 드려도 그것을 놓지 못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여북하면 이렇게라도 하겠습니까. 딴 영계가 들어왔다 합시다. 그러면 이렇게 이 컵의 물을 다른 컵의 물에 합치면, 그럼 물 한 그릇이 따로 있습니까? 여러분 마음은 체가 없어요. 그래서 의식이 들어와서 딴 영계가 내 집 주인 노릇을 하더라도 내가 부족한 것도 부족한 거지만 모두 한 그릇에 있어요. 같이 먹고요. 그러니까 이렇게 먹어 치운다면 상당히 좋을 것을 그렇게 하질 못해요.

그런데 거기 한데 들어갔으니까 천 명이 들어가도 두 명이 들어가도 한 명이 들어가도 ‘아이고, 죽은 사람이 이렇게 들어와서 우리 아들이 이렇고 우리 딸이 이렇고 무슨 내가 이렇고 무슨 누구가 이렇고’ 이런 생각일랑은 아예 하지 말라 이겁니다. 그건 왜냐? 여기 물컵에 들어갔으면 벌써 한 그릇이란 말입니다. 한 물이에요. 영에다가 영을 넣으니까 몇이 됩니까, 예? 그냥 영이죠? 허허. 스무 개를 넣으면 또 더 두드러집니까? 그냥 영이죠? 그런데 거기 뭐가 붙었다고 합니까? 참 이상스럽단 말이에요. 그렇게 생각들을 하니 십 년이고 몇 년이고 그냥 고통을 받고 애를 쓰는 거예요.

왜 각각 보십니까? 둘이 아닌 도리를 가르치는데 왜 각각 보시느냐 이겁니다. 요거는 내가 꼭 말을 하고 넘어가겠다고 다짐을 한 거거든요, 하도 애를 쓰니까. 그래서 영과 영이 열 개가 한데 합쳤어도 둘이 아닌 까닭에 아무가 들어왔더라도 주인은 주인 아니겠는가. 그러니 주인공이에요, 그냥. 당신이 그 마음속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바로 주인공 아닌가. 그러니 ‘이 몸을 이끌어 가는 것은, 정상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당신밖에 없어.’ 뜻으로다가 속의 주인공을 이렇게 탁 잡아주는 겁니다. 아셨습니까? 시식을, 제사를, 천도를 수백 번 드리는 것보다 그 한생각이 필요한 겁니다.

땀 흘리고 돈 벌어다가 허탈히 쓰는 법을 버리고 돈 쓰는 법도 배워야 됩니다. 돈 버는 것만 배우지 마시고 쓰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올바르게 써야지 올바르지 않게 쓰는 것은 귀신 놀음이나 한가지고 도깨비장난이나 한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못사는 것도 여러분의 차원 때문입니다, 모르는 차원. 죄가 있어서 그렇게 고생하는 게 아니라 모르는 차원 때문에.

그래서 거기서 ‘열 명이 들어갔어도 당신이 바로 주인공 아니겠는가!’ 하고 주인공만이 속의 뜻을, 말로 하지 말란 말이에요. 뜻으로서 주인공만이, 당신만이 이 애를 정상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신념과 믿음 그것을 가지고 그저 만날 적마다 그렇게 해 준다면 또 만나지 않을 때도 그렇고 만나서도 그렇고 먼 데 있으나 가깝게 있으나 똑같습니다,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주를 달린대도, 탐험을 한대도 둘이 아닌 까닭에 마음은 그저 어디도 갈 수 있다는 얘깁니다. 산이 높아서 못 넘는 게 아니고 물이 깊어서 못 건너가는 게 아니고, 은산철벽이 두꺼워서 못 뚫는 게 아닙니다. 사방은 툭 터졌습니다.

우리 마음이 넉넉하면 심봉이 돌아가는 것이 녹이 안 슬고 착착 돌아갑니다, 기름이 주어지니까. 넉넉한 마음은 기름을 주는 거와 같다 이겁니다. 심봉에 기름을 주는 거와 같아요. 그리고 넉넉지 못한 사람, 소견으로 마음을 쓰는 사람은 이게 자꾸 돌리질 못하기 때문에 녹이 슬고요. 그리고 뻑뻑해요. 잘 돌아가질 않아요. 그와 같은 거죠.

여러분도 기계를 잘 아시죠? 만약에 차를 끌고 다니는 데도 바퀴가 영 굴러가지 않아서 그냥 두면은 그 중심인 심봉이 잘 안 굴러가게 되죠. 양면으로 딱 조여 놓고선 이게 그냥 돌아가도 이 중심 심봉은 통 움죽거리지 않고 바깥에 있는 것들만 돌아가죠. 바깥에 붙어 있는 그 다섯 가지의 수레바퀴가, 즉 불바퀴가 돌아가는 거예요. 이것을 물바퀴라고 해도 좋고 불바퀴라고 해도 좋고 보통 그런 수레바퀴라고 해도 좋죠. 그렇게 돌아가는 이 자체, 바로 그것을 바깥에 서서 돌릴 수만 있다면 말이에요.

그러니 모든 걸 그렇게 입력을 들어오는 대로 용도대로 잘된 건 감사하게 입력을 해 놓고 또 안 되는 거는 ‘안 되는 것도 거기서 한 거니까 되게 하는 것도 거기서 하는 거 아니야? 거기서 해 봐.’ 하고 거기다 입력을 해 놓으면 그대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실험하고 체험하면서 당당하게 생활을 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꿈이 신경 쓰여요

질문 제가 요즘 생각이 많아서 그런지 꿈에서도 계속 시달리게 됩니다. 좋게 돌려놓으려고 하는데도 기분 나쁜 꿈을 꾸면 계속 신경이 쓰이게 됩니다. 제가 어디에도 끄달리지 않고 중심 잘 잡고 갈 수 있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꿈도 꿈이고 현재 생시도 꿈입니다. 저 달이 말입니다, 강에 비쳤다 이겁니다. 강에 비쳤을 때에 그 강에 비친 달은 하늘에 있는 달과 둘이 아니면서 그림자예요. 내가 지금 몸뚱이를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내 모습을 내가 마음으로 요렇게 생겼고 내가 요렇게 있다 하는 걸 알고 그것이 바로 잠재의식 컴퓨터에 책정이 된 겁니다. 그래서 꿈을 꿀 때는 항상 그 모습으로 나갑니다. 그렇게 나가서 하루 온종일 살다가 들어왔는데도 한 시간도 안 됐더래요, 온종일 살았는데. 꿈에서는 하루 온종일 살았답니다. 그랬는데 저녁에 밥 얼른 달라고 그러는 바람에 깨 보니까는 한 시간밖에 안 됐더라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마음으로 자기 모습을 지어 가지고 돌아다니다가, 돌아다니는 일은 지금 육신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거하고 모습 없는 모습을 가지고 다니는 거하고는 빠르기가 여간 다르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있으면서도 없으니까, 진실은. 그러니 이 육신을 끌고 하루 종일 산 거하고 꿈에 한 시간을 산 거하고 차이가 얼마나 납니까? 그래서 꿈을 꾼다고 하는 것도 모두, 생시나 꿈이나 자기의 모습이 다니는 거니까 자기에다 놔라 이겁니다. 진짜 씨가 있기 때문에 콩나무가 나고 잎과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거기다가 그렇게, 놓을 데 없는 데다가 놓을 게 없는 것을 놔라.” 하는데 진실히 믿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생시에 만나면 일가친척이고 누구고 간에, 애들의 친구든지 내 친구든지 또는 어떤 회사든지 상업을 하는 사람이든지 천차만별로 살아나가는 데 거기서 만남이 있지 않습니까? 그 만나는 사람마다 나하고 저 사람하고 각각 보니까 상대가 생기죠? 그러니깐 업보를 짓는 겁니다, 상대로 보니까. 우리가 여여하게 살면서도 상대를 마음으로는 둘로 보지 않아야 그게 업보가 되지 않는데, 업보에 끄달리지도 않을 거고 말입니다. 현실에 끄달리지 않는다면 꿈에도 끄달리지 않을 것이고 이것도 꿈이요 저것도 꿈이라면, 꿈에 또 끄달리질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면 내 진짜의 마음 그 자체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억겁을 거쳐오면서 별의별 모습을 다 가지고 자기가 살던 그 습성이 모습과 함께 자기한테 자꾸 나타나는 거거든요. 짐승이 와서 나한테 덤볐다, 또는 뱀이 나한테 덤볐다, 꽃이 화창하게 핀 걸 봤다, 또 무슨 도둑이 들었다, 강도가 들었다, 강도가 나를 죽이러 쫓아다닌다 이런 문제들이 여간 많지 않죠. 또 꿈에는 훨훨 날아다니는 사람도 있구요. 그러한 문제가 어디에서 나왔느냐 이겁니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죠. 콩 심어서 콩나무가 났으니까 그 작년 콩은 없어진 거죠, 아주. 없는 거죠. 그런데 미생물이 있기 이전부터, 또 미생물이 생겨서 오기까지 그것이 수백 수천 년, 수만 년 그 헤아릴 수 없는 억겁을 거쳐오면서 여기까지 왔어도 온 사이가 없다는 얘깁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이 억겁을 거쳐 나온 바로 그분들이에요. 그런데 생각으로서 살던 그 습이 남았단 얘깁니다. 짐승으로 다니던 습과 천차만별로 거쳐 온 그 습이 남았단 얘깁니다.

살아온 것이 자기 마음의 컴퓨터에 쟁여 있으니까 그것이 때로는 습에 의해서, 인연에 의해서 자꾸 인과응보가 돼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나 나오는 대로 그냥 주인공에 모두가 둘이 아니게 놓았을 때에는 다 녹아 버립니다. 인연법에 의해서 그 인과응보가 다 녹아 버리고 유전성이 다 녹아 버린단 말입니다.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그런 습성을 기르지 않았더라면, 기르려고 그래서 기르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날까지 오면서 습성을 놓고 왔더라면, 지금 현재에 놓고 가는 건데, 그대로 여여하게 놓고 가는 것을 홀연히 깨달았다면, 억겁을 거쳐 오면서 이날까지 그 습을, 남은 것도 없고 앞으로 또 쟁여질 것도 없고 전자에 쟁여진 것도 없고 이랬을 텐데 아니, 마음으로 지어서 습에 의해서 그냥 착착 쟁여 놨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돌아가면서 어머니 만날 때 아버지 만날 때, 이런 일 할 때 저런 일 할 때 나투어서 돌아가듯이 그런 업보도 인연 따라서 올 때에, 그렇게 자꾸자꾸 나투면서 지은 것이 진화…, 즉 ‘발이 없어. 발이 없으니 어떻게 되지?’, ‘아니, 내가 네 발로 걸어 다니기보다 서서 다니는 게 편리할 거야.’ 이런 생각을 한 것도 진화력이거든. 그 생각에 의해서 진화되는 거지 몸뚱이로 다니게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돼요. 여러분도 다 꽁지 떨어진 자리가 있죠. 방뎅이 좀 보라구요, 꽁지 떨어진 자리가 없나.

이 세상의 모두가 다 그렇게 거쳐 온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모습을 마저 벗기 위해서, 끄달리지 않고 마저 벗기 위해서 지금 이렇게 공부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나오기만 하면은 큰 고(苦)든지 작은 고든지 고는 고니까. 만약에 깨달으면 고가 아니지만 깨닫지 못하면 고예요. 항상 고예요. ‘나는 뭐, 고가 될 것도 없어. 그저 모든 걸 주인공에 맡기고 놓고 사니까.’ 이렇게 말들은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진짜로 깨달아 스스로 나올 수가 없는 사람들은 그대로 속상한 일이고 자꾸 끄달리죠.

그런데 한 소식을 얻은 사람들은 금방 일어났다가도 금방 가라앉습니다. 금방 일어났다 금방 그냥 가라앉아 버리고 없어지죠. 그런데 그렇게, 깨달은 거하고 한 소식, 뭐, 한 소식이라는 게 두 소식이 있고 세 소식이 있어서 ‘한 소식’ 하는 게 아니거든요. 이 과정도 우리가 애 적이 있고 젊을 적이 있고 늙을 적이 있듯이, 한 몸이 그렇게 자꾸 변해서 가듯이 마음으로 공부하는 것도 두 소식이 한 소식이고 세 소식이 한 소식이 돼야 됩니다. 그 한 소식마저도 없어서 내세울 게 없어야 열반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계단 없는 계단을 걸어야 하고 걸을 게 없는 길을, 발 없는 발로다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