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육체에서 마음이 벗어나면 이 몸뚱이라는 물질도 굴릴 수 있다

더함도 덜함도 없는 그 가운데서
바로 자유스럽게 쓰는 마음씨가 있기 때문에 행동이 나오고
행동이 나오기 때문에 현실에 적합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

잘 놓아지지 않아요

질문 여태껏 마음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제 몸뚱이의 병에 대해서는 잘 놓아지지 않습니다. 이 어리석은 중생을 꾸짖어 주십시오.

답변 우리가 모든 것을 일차적으로는 그렇게 놓지 않으면 그릇이 비워지지 않는다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릇이 비워지지 않는 거를 그냥 비워지지 않았다고만 하지 마시고 한번 뒤집어 보세요. 뒤집어 보면 ‘야, 우리가 밥을 먹는 데도 그대로 있지 않더라. 똥을 싸더라. 먹으면 싸고 먹으면 싸고 그러더라. 그러니 항상 찰나 생활이지 우리가 고정되게 가지고 있는 게 뭣이 있나?’ 이걸 좀 이렇게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는데 아예 놓을 수가 없다는 거거든요. 놓고 가면서도 놓을 수가 없대요. 그 어떻게 된 일인지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냥 찰나찰나 살면서 응얼거리면서, 노래를 하면서, 아주 설거지를 하면서 탁탁 치워서 놓고 이렇게 돌아가면서도 “난 놓을 수 없습니다.” 이겁니다. 하하하. 다 놓으면 어떻게 사느냐 이거죠, 놓고 가면서도. 돈을 한 묶음을 쥐고 가더라도 그건 놓고 가는 겁니다. 금방 쥐고 있다고 해서 고정되게 그냥 그것만 쥐고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갖다가 놓습니다. 장 속에 넣든지 은행에 갖다 넣든지 증권에 갖다 넣든지 어디다 갖다 놓든지 하여튼 갖다 놓을 거 아닙니까? 쥐고 있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다면 그것은 놓고 가는 겁니다. 관리만 했다 뿐이지 놓고 가는 겁니다. 내 몸도 놓고 가고, 다 놓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도 놓고 갈 수 없다는 겁니다. 다 놓으면 어떡하느냐 그러는 거예요. 하하.

그러면 한번 바꿔서 생각을 할 때 내가 음식을 먹고, 먹고 싶은 대로 이거 먹고 저거 먹고 이러면서 이것도 소화가 되고 저것도 소화가 돼야 좋지, 놓을 수가 없다니, 그러면 그것이 잔뜩 고여 있으면 좋겠습니까? 소화가 되는 게 좋겠죠?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스스로 소화를 시켜서 스스로 소화가 된다는 거, 먹고 싶어서 우리가 먹으면 스스로 소화가 된다는 걸 아셔야 하고, 또 소화를 시키는 것이 바로 여기 공장에서 모두, 이건 우스갯소립니다마는, 위장이니 간장이니 직장이니 소장, 대장, 방광, 이자 이런 모두가, 심장이니 하는 모두가 공장에서 회전을 해 주기 때문에 우리가 건강하게 소화를 하고 살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한마음 주인공에 놔라. 거기다 딱 일임을 하면, 어디 신호가 왔다, 아프다 그런다면 이거를 거기다 딱 맡겨 놓아야 됩니다. 그 자리에서 아팠거든, 이 몸에서. 그 자리에서 아픈 거 아닙니까? 그러니 신호가 온 겁니다. “지배인, 이렇게 여기서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하하하. 그러니까 이 지배인이, “아, 그럼 그 안에서 해결을 해야지. 공장장이고 뭐고 다 이거는 서로 한마음으로 돌아가면서 파업을 막아라.” 하고서는 거기 주인공에다 탁 놨단 말입니다. 주인공이라는 건 한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파업이 일어나도 그 안에서 대처를 해야 금방 건강이 되찾아지죠. 이거를 들고선 여기가 아픈데 여기 이 형성시킨, 또 여기서 회전하고 있는 공장에다 맡기질 않곤 딴 공장으로 가요. 딴 공장으로 가서, 이 마음의 도리를 서로 벽이 없이 같이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닌데 갖다가 맡기니까 이것은 어디서 나온 줄도 모르는 병세가 많고, 유전성이라든가 업보로 나오든가 영계로 인해서, 인과로 인해서 나오든가 또는 몸에서 솟든가 이러한 것도 누구나가 다 이것을 알아낼 수는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70%가 모자란다고 봐야죠. 70%는 여러분이, 이 공부를 하는 여러분이 충당을 해야 되겠다 이겁니다. 그래서 70%만 갖는 게 아니라 100% 다 가졌지만, 우리가 외관상 부러지거나 어디 잘못되거나 이러면 딴 기술자를 들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70%를 다 가지고 쓰되 100%를 다 가져라. 왜? 의사의 손이 가더라도 그거는 남의 손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이 도리를 알면.

그러니까 우리가 열심히 지극하게 믿는 거, 첫째는 놓고, 둘째는 아주 믿는 거! 그 믿기 때문에 놓는 거거든요. 믿지 못하면 놓질 못합니다. 왜 자기를 믿지 못합니까, 글쎄? 아니, 남의 이름은 믿으라면 잘 믿으면서 왜 자기는 못 믿어요? 못났든 잘났든 자기밖에 더 있습니까? 누가 대신 죽어 주나, 대신 아파 주나, 네? 대신 누가 자 주나, 먹어 주나, 똥 싸 주나? 아, 이거 큰일이란 말입니다. 자기를 믿어요. 못났든 잘났든 자기밖에 자기를 끌고 다니는 건 없거든요. 그러니 믿고 그저 놔요, 거기서밖엔 끌고 다닐 수 없다라는 걸.

생활 속에서 어떠한 괴로운 게 닥치더라도 ‘아이, 이것도 거기서밖엔 해결 못 하겠지.’ 하고 탁 놔 버리란 말입니다. 그저 놓는 일밖에는 없어요. 그러고 돌아오는 일을 지켜보라 이겁니다. 돌아오는 일을 지켜보면 거기서 체험도 얻을 수 있고, 실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죠. 그래서 자기를 발견하고, 그럼으로써 물리가 터지고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지구 문제도 마음을 낸다면…

질문 요즘 지구에 일어나는 일들이 문제가 심각한 것 같아 우리 자손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고 불안한 마음이 생깁니다. 지구 문제도 우리가 마음을 냄으로써 방지할 수 있을까요?

답변 우리는 지금 몸뚱이라는 집을 짓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몸뚱이가 살고 있는 집은 지구입니다. 우리 몸뚱이가 수명이 있듯이 지구도 수명이 있다고 봅니다, 물질이기 때문에. 그러면 우리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전체 생명이라고 볼 때 그래도 고등 동물이라고 한다면 인간을 최고로 치죠. 인간이 돼야만이 부처를 이룰 수 있고, 한마음으로 전체가 돌아갈 수 있는 그런 영향력을 가질 수 있고, 지혜를 가질 수 있고 그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죠.

그런데 우리가 이 공부를 해서 그렇게 깨달아서 포용력 있게 지혜롭게 걸림 없이 갈 수 있다면, 저런 달세계나 저런 모든 혹성들에게도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될 수 있는 그런 영향력을 여러분이 다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건 어떻게 해서 가지고 있느냐. 여러분은 지수화풍에서 소생돼 가지고 지수화풍을 지금 쓰면서 살고 있고 지수화풍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또 지수화풍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수화풍에서 지수화풍을 먹고 삽니다. 그 속에서, 복합적인 재료가 다 거기서 나오는 거니깐요. 그 질량은 수만 개의 이름을 가졌다 하더라도 거기서 다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계발이 되는 것도 그렇고, 과학이 발전되는 것도 그렇고, 모든 것은 다 거기에서 나오는 거고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지금 계발이 되고 또 인간이 많이 늘어나고, 그것이 증강된다고 할까요? 우리가 먹고 사는 것도 또 생각을 안 해 볼 수 없는 거고, 그러니깐 그건 식량이라고도 할 수 있죠. 또 우리가 자원이나 식량을 더 만들지 않고 곶감 꼬치 빼 먹듯 빼 먹으면 그것은 마치 은행에 예금해 놓은 것을 꼬박꼬박 빼다 쓰기만 하고 벌지 않아서 나중에는 통장이 비는 것처럼 살림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마음공부를 해서 모두가 한마음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가 없을 때는 가져올 수도 있고 있을 때는 남에게 줄 수도 있는, 그런 영향력과 지혜로운 마음이 생길 수 있죠. 즉 이 육체에서 마음이 벗어나면 이 몸뚱이라는 물질도 굴릴 수 있다는 얘기죠. 그래서 ‘벗어나지 못하면 굴릴 수 없다’ 하는 것은 여러분이 독 안에 들어 있다면 독을 굴릴 수가 없고, 독 안에서 벗어난다면 독을 굴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독이 혹성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그 혹성 안에 있는 재료를 마음대로 용도에 따라서, 크나 작으나 앞에 다가오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얘기죠. 그러면 재료라든가 이런 거는 어디에서 어떻게, 그렇게 멀고 먼데 어떻게 조달이 되느냐. 구름 잡는 얘기라고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분명 우리의 능력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진리이고 길입니다. 또 그 길을 부처님께서 가르치셨고요. 또 나 역시 없는 거를 이렇게 말하는 것도 아니고요.

이 한생각은 체가 없어서 요기 요 법상을 생각하는 거나 저 달세계 생각하는 거나 둘이 아니다 이 소립니다. 그런 까닭에 그것도 서로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간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다 한 것은, 오고 가기만 하면 뭘 합니까? 교류가 돼서 우리가 맛을 봐야 하는 것이 원칙 아닙니까? 여러분이 장사를 해도 이익을 봐야 되고, 회향이 돼야 되는 거죠.

그와 같이 예를 들어서 본다, 듣는다 또는 가고 올 수 있다, 그 마음을 서로가 교환하고 알 수 있다, 또는 그것이 어디서 나온 건지 알고 있다 이럴 때는 거기에 통신력과 광력, 전력, 자력이 충만히, 우리가 지수화풍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충만히 교류가 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모든 재료나 우리 살아나가는 계발의 문제라든가, 또는 식량 문제라든가 이런 것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살아야 하는 건데, ‘깨달으면 한계가 없는 것도 알 수 있다’라는 얘깁니다. 한계가 있는 것만 알지 마시고 한계가 없는 것도 좀 아셨으면 하는 겁니다. 무한량, 한계가 없이 영원하다는 그 문제도 좀 생각해 보실 수 있는 그런 영향력과 지혜를 가지시라 이거죠.

그러면 만약에 그런 멀리 있는 것과 우리가 교류가 되지 않는다면, 벽이 쌓아진다면 우리는 어디로 피난을 가겠습니까? 내 집이 망가진다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또 한 가지, 우리가 식량이 부족하면 어디로 가서 얻어먹겠습니까? 또 재료가 없다면 어디서 나서 쓰겠습니까? 이런 거 세 가지만 말해도 우리는 이 마음 자체가 그렇게 충만하고 교류가 될 수 있고 벽이 없고 그렇다는 부처님 말씀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몸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제대로 지탱할 수 없는 것이 우리 몸인데, 그럼 몸하고 지구하고 우리가 비교해서 볼 때 ‘몸을 이끌어 나가는 데도 한계가 있다’ 하는 거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 몸도 주인이 없으면 얼른 망가질 거고, 내가 깨달아서 주인이 있다면 고쳐서 쓸 것입니다. 그리고 가고 싶으면 가고 그냥 벗고 싶으면 벗고 말고 싶으면 말겠죠. 그것이 자유입니다, 이 옷을 벗는 것도. 그렇게 한계가 있듯이 그럼 지구도 한계가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한계가 있겠죠. 그러나 이게 겉껍데기가 있고 속껍데기가 있고, 그 안에 셋째 번에 아주 그 얇은 껍데기가 우리 뱃가죽에도 있듯이 또 있습니다. 별성도 껍데기를 벗으면 새 빛이 나면서 다시 살듯이, 인간도 이 껍데기를 벗고서 다시 또 몸을 바꿔 가지고 다시 나오는 이치에 의해서 우린 살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몸이 없어졌다가 다시 나고, 났다가 다시 꺼지고 이러는데, 이러한 혹성이나 저러한 별성 같은 거는 이것이 꺼멓게, 예를 들어서 그 껍데기를 벗으면서 그대로 속에서 새 빛이 다시 날 수 있는 것이 그게 한계가 없다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음공부를 해서 같이 교류를 할 수 있는 그런 영향력이 있다면 그렇게도 할 수 있는 문제가 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 드리는 것이, 그러면 지금 당장 급하냐? 그렇진 않습니다. 우리가 오억 년이 가든지 십억 년이 가든지 일억 년이 가든지 그건 한계에 따라서 어느 때 이렇게 되고 어느 때에 요렇게 된다고 얘기하는 건 예언이 되니까 그거는 여러분이 공부하기에 달렸습니다.

그게 못 미더우면, 예전에 이런 말이 있죠. 정감록에 말입니다, “물에서만 배가 다니는 게 아니라 땅으로도 배가 다니고, 땅 위에는 거미줄이 얽히고, 그 거미줄을 따라서 배가 둥둥 떠다니고 공중으로도 나중에는 배가 떠다니느니라.” 이렇게 말을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미친놈, 미친 소리, 허공 잡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걸 믿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록을 했던 겁니다. 그런데 기록을 해 놨어도 반이 다 타 버리고 말았죠. 누설이 된다고 해서 그랬답니다. 그런데 또 박사들은, 몇백 년 전 박사들이 ‘지구가 돈다’고 하니 미친놈이라고 했다죠. 여러분은 더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지금 미쳤던가요? 너부터 믿고 너부터 알라고 한 소크라테스도 미쳤나요?

그런데 그렇게 미쳤다고 하는 그러한 사람들이 말한 대로 지금은 그 배를 타고 다니지 않습니까? 우리 지금 비행기를 타고 왔다 갔다 하는 그런 것이 다 우리가 발전이 되고 능력이 생겨서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너와 나와 둘이 아니니라.” 한 뜻이 무엇인가도 우리가 이 공부를 안 했든 했든 스스로서 알게 되고, 스스로서 계발하게 되고, 스스로서 그런 심성 과학이 발전이 되고, 천체물리학이 발전이 되고, 천문학이 발전이 되고 이래서 만약에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둘이 아니다.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네가 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갖추어서 가지고 있느니라.” 했다면 그건 인정하셔야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 집이 망가지거나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중생들의 생명이 살 수 없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하고 있는데, 그 지구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다 보니까 ‘아, 이제 그런 것을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사람들이 모두 그런 것을 알고 생각하고 그래도 거기다가 놓을 줄 아니까, 우주 천지에 직결이 돼 있으니까 다 알고 다 수습하겠구나. 괜찮겠구나. 부딪치지 않겠구나. 줄지 않겠구나. 팽창되지 않겠구나. 에너지가 없어서 못 살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나 참 거룩하고 고마운 일입니다.

여러분은 그냥 공부한다고 하면서 그거는 모르고 계시지만, 여러분이 그 마음을 쓰는 데서 연방 직결이 돼 있거든요. 연방 직결이 돼서 가설이 돼서 통신이 되거든요, 우주하고도요. 여러분은 그걸 모르고 하지만 차차 공부를 더 하면 알게 될 것입니다.

부처도 집어삼키라는 뜻은

질문 선지식들께서 부처도 집어삼키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저의 그릇으로는 그 뜻을 헤아리기가 어려워서 이렇게 질문 올립니다.

답변 어린애를 낳아 놓으면, 처음 걸음마를 배울 때 발자국을 떼어 놓기 위해서 천방지축 걸어가죠. 그럴 때 그 어린애가 ‘내가 가다가 넘어지면 어쩌나. 내가 낭떠러지에 떨어지면 어쩌나.’ 하지는 않겠죠. 아무 생각 없이, 오직 내가 발걸음을 떼어 놓는다는 기쁨에만 그냥 뗄 뿐이죠. 그런 반면에 우리 인간 자체는 살아가면서 항상 ‘낭떠러지에 떨어지면 어쩌나. 잘못돼서 넘어지면 어쩌나. 구덩이에 빠지면 어쩌나. 잘못되면 식구가 다 죽을 텐데….’ 하는 생각 때문에 한 발짝도 떼어 놓지 못하는 경향이 많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렇게 돼서는 안 되죠. 마음이 우선입니다. 마음이 우선적이기 때문에 내 마음으로 인해서 바깥으로 작용이 나오고, 작용이 나오면 바로 어떠한 경계가 완전히 나타나죠. 망하든지 흥하든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항상 이런 말도 하죠. “더하고 덜함도 없는 그 가운데서 바로 자유스럽게 쓰는 그 마음씨가 있기 때문에 행동이 나오고, 행동이 나오기 때문에 현실에 적합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 하고요. 그래서 “크고 작은 것이 둘이 아니다. 둘 아닌 가운데에 내 마음이 스스로 자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만이 할 수 있다.”라는 얘기죠.

내가 아까 어린애 얘기를 왜 했느냐 하면, 여러분은 관습이나 습관에 젖어서, 고정관념에 젖어서 영 옴치고 뛰질 못해요. 이론만 가지고 세상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만 가지고 사는 게 아닙니다. 결국은 행하는 겁니다. 이론만 가지고 사는 게 아니라, 묵묵히 한생각을 했으면 그대로 묵묵히 걸어갈 뿐이고 작용을 할 뿐이죠. 그렇기 때문에 조그만 거든지 큰 거든지, 진실로서 한 발짝 떼어 놓고 행을 하는 것이 문제지 아무리 말과 이론으로, 아무리 지식으로 안다 하더라도 그건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고 한 겁니다. 일체 모든 부처님들, 즉 말하자면 부처님 이름도 허다하게 많죠? 그 많은 이름의 부처님들도, 역대 조사들도 다 “그저 부처님이 이 앞에 있어도 집어삼켜라. 역대 조사들이 있다 하더라도 집어삼켜라. 중생이 있다 하더라도 집어삼켜라. 일체를 다 닥치는 대로 집어삼켜라.” 하신 뜻은 무엇이냐.

마음이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어떠할는지 모르겠지만 첫째, 마음먹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 마음은 체가 없어요. 체가 없기 때문에 수만 명의 선지식들을, 부처님들을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아요. 한 찰나에 이 세상을 다 집어넣는다 하더라도 두드러지지 않아요. 들고 나는 문은 한 문이자 한 구멍이에요. 그게 문 없는 문이에요. 한 세상을 다 집어넣고, 가정을 다 집어넣고, 역대 조사 역대 부처님들을 다 집어넣어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 소립니다. 다 집어넣었으니까 다 내놓아야죠? 그래서 “다 버리고 나니까 다 얻더라. 얻고 나니까 버릴 것도 없더라.” 이렇게 되죠. 모든 걸 집어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고, 다 집어넣었으면 다 내놓을 줄 알아야 그게 보살행이라고 볼 수 있겠죠.

항상 얘기하지만, 변화하고 화(化)하면서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변화!’ 이 말이 두 글자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는 세상이 엄청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변화가 어떻게 돼 돌아가나? 천차만별의 만물만생이 변하고 화하고, 또는 고정됨이 없이 나투면서 찰나찰나 돌아간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또 공생, 공용, 공심, 공체, 공식화하고 돌아가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이 다 공동분담으로 돌아가니까, 나를 세울 게 없으니까 공덕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이치를 다 알기 위해서는, 내가 지식으로나 이론으로나 학식으로나 아는 거를 다 놔 버려야죠. 그것을 놔야 모든 것을 다 얻을 수가 있죠. 그래서 한 구멍에다 놓는다면 놓은 그 자리에서 다시금 생겨나니까, 역시 한 구멍으로 들이고 내는 그 작용이 그대로 법이죠. 나 혼자만이 안다고 세워 봤자죠.

여러분이 잠시 생각을 해 봐도, 몸뚱이 속에 수많은 중생들과 더불어 자기 마음의 부처가 둘이 아닌데, 어떻게 나 혼자 살고 있다고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아무리 잘 알고, 이론으로 잘 알고, 한마음 공부를 잘하고 간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둘이 아닌 까닭에 ‘내세울 게 없다’는 얘기죠. 내세울 게 없는 자기 몸뚱이를 존재로서, 관리인의 시자로서 둘 아니게 절대적으로 나갈 수 있다면, 그대로 하나하나 어떠한 부분이든지 맡아 가지고 있는 거기에서 다 합니다. 그놈이 다 하는 거지, 딴 데서 하는 게 하나도 없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 묘한 도리로 볼 때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악업 선업으로 입력이 됐던 것이 지금 나오는 거니까 거기다가 되입력을 한다면 앞서 입력이 없어진다, 그릇은 항상 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입력된 그 자리에다가 다시, 그 뿌리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것을 믿고, 자꾸 누적되지 않게 그 뿌리에다 그저 닥치는 대로 넣으세요. 부처님이 닥쳐도 ‘둘이 아니다’ 하고 넣고, 그저 어떤 게 닥쳐오더라도 ‘둘이 아닌 까닭에 너만이 할 수 있어.’ 하곤 다 그냥 놓는단 말입니다. 그럼으로써 바로 새로 입력이 들어가니까 앞서의 입력은 없어지는 거죠. 그래서 ‘오간지옥도 무너진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자꾸 새 그릇에 담기면서 그릇이 비고 하니까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새로이 넣는 것이 현실에 나오고, 현실로 나오면 즐거움이고,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화나게 하는 놈도 그놈이니까 안 나게 하는 놈도 그놈이죠. 매사를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진짜 사랑할 수 있고, 진짜 다복할 수 있고, 진짜 잘 살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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