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도 선도 다 근본에다 놓고 다시 거기에서 생산해서 써라

우리의 마음 하나가 헤아릴 수 없이 이 세상을 다 덮을 수 있는가 하면
이 세상을 다 좀먹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음 이 자체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묘하고 광대무변한 것입니다.

오늘 처음 오신 분도 계신 것 같습니다. 그동안 내가 초보적인 마음 다루는 공부에 대해서 항상 말씀해 드렸습니다. 이런 말씀을 안 드리고 그냥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처음 오신 분이 한 분만 있다 해도요. 그리고 열 번을 들었던 분들도 다시 한번 음미해 볼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또 되시길 바라고요.

첫째, 우리가 인간이라면 어디서 왔는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인간 모습이면 누구나가 다 인간이라고 보지만 탈만 인간이지 진짜 인간이 되지 못했을 때는 나중에 다시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나올 수 없는 형편에 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나는 죄를 안 지었는데 이렇게 고생을 합니까?” 이렇게 말하니까 부처님께서 “네 과거의 모든 걸 모르거든 지금 현재 살아가는 거, 각본대로 너한테 다가오는 거를 한번 생각해 보면 과거에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느니라. 그리고 지금 네가 하고 가는 걸 보면 미래에 올 것을 미리 알 수 있느니라. 그런데 누구더러 물어보느냐?” 그러셨거든요.

그것을 한번 잘 음미해 보세요.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거는 과거에 자기가 한 대로 각본대로 나오는 것이요, 지금 하고 돌아가는 거는 미래의 각본이 되어 그대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아주 세밀히 알아야 되지 않나 이렇게 봅니다. 사람이 이렇게 사는 것도 저렇게 사는 것도, 돈이 벌리는 것도 안 벌리는 것도 사실 우연이라는 거는 없습니다. 우연이라고 생각하시면 참말 어리석고 오산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 각자 사는 대로, 자기가 하고 있는 대로, 또 인연에 따라서 그렇게 모든 것이 자기한테 주어지는 겁니다. 각본대로 배역이 주어지는 탤런트처럼 말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거는, 이렇게 어렵게 인간이 되었는데 인간 사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고(苦)’라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인간 된 것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고집멸도 사제법에서 ‘고’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집’도 붙고 ‘멸’도 붙고 ‘도’도 붙고 이런 게 다 붙어요. 크고 작은 게 붙고, 좋고 언짢은 게 붙고, 언짢은 건 끊어 버리고 좋은 걸 붙게 해도 역시 언짢은 게 또 따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 자체가 어디서 왔고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지금 그렇게 각본대로 받고 있고 또 부딪치고 있는 것도 인간 자체, 생명의 근본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을 한다면 여러 가지 아주 기묘한 이치가, 우리가 모르는 일들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이 말은 꼭 하고, 또 한 번 하고 넘어가야만 속이 후련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사람의 육신 속에 미생물들이 수없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만 그 미생물들이 있기 이전 마음이라는 게 있어서, 여러분을 끌고 다닐 때 어떠한 아귀가 들어오려고 하면 자기의 능력으로 저항력을 발휘해서 필사적으로 버릴 건 버리고 들일 건 들입니다. 그건 왜냐. 자기 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하셔야 돼요. 자기 집이기 때문에 그토록 결사적으로 막는 것이고, 그렇게 침입 못 하게끔 하는 그 마음들이 아주 철두철미합니다.

그런데 이 마음들을 이끌어 가는, 수십억 마리를 이끌어 가는 대표인이 그것을 업신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자기 위주로 아무렇게나 산다면 거기에서 그렇게 정성스럽게 생각을 안 해 줍니다. 일을 하고는 있겠죠. 그러나 ‘에이! 알아주지도 않는데 구태여 우리가 뭐….’ 이런 사람이나 똑같죠. ‘구태여 뭐, 그렇게 결사적으로 우리 생명을 내걸면서까지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딴 데서 들어오면 들어오고 나가면 나가고 그러지, 뭐.’ 이렇게 생각하는 마음들을 엿볼 수 있는 거죠.

이 보이지 않는 마음들이라는 게 극히, 두렵다면 두렵고 무섭다면 무섭고 자비하다면 자비하고 너그럽다면 너그러운 겁니다. 한마음의 도리라는 것이 그렇게 너그러운가 하면 그것을 또 한번 뒤집어 본다면 그 체 없는 마음들이 악을 수없이 이룰 수가 있는 겁니다. 악을 수없이 이루어서 그저 인연이 조금이라도 닿으면 닿는 대로 끌어다가 우환을 일으키고 가환을 일으키고 병고를 일으키고 이렇게 합니다.

체험을 해 본 사람은 그걸 알겠지만 체험을 해 보지 못하고 그 도리를 모르는 사람에 한해서는 “내 팔자야. 왜 내가 이러냐.” 하고선 한탄, 하소연만 하지 어찌해 볼 수가 없는 겁니다. 한탄하기 이전에 처리할 수 있는 그 원력이 필요한 거지 한탄하는 말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한탄을 하다 보면 암도 생기고 고혈압도 생기고 여러 가지 병도 생기는 거죠.

그러니 그게 누구 탓이냐 이겁니다. 전부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받는 자기 업보죠. 그걸 과거의 업보라고 하지만 과거도 현실입니다. 왜? 자기가 현실에 몸을 가지고 나오면서 과거에 자기가 한 짓을 짊어지고 나왔으니 과거가 어딨습니까? 과거가 어딨느냐구요. 그래서 현실에도, 내가 항상 말씀드리듯이 “고정관념도 없고 고정됨도 없고 시간과 공간도 없다. 그러니 생사에도 끄달리지 말아라.” 하는 겁니다. 죽었다고 하지만 죽은 게 아니라 영원한 겁니다. 몸뚱이가 가을 이파리 떨어지듯 헤딱 떨어졌지만 생명이 영원하기 때문에 그 물질도 영원한 거죠.

그 물질이 영원하다는 것은 지수화풍의 바탕으로 인해서 생겼기 때문입니다. 지수화풍도 물질이기 때문에, 물질이 허망하다 그러지만 바로 그 물질이 없다면 무효입니다. 물질이 없다면 보이지 않으니까 바로 생명의 영혼도 무효입니다. 아예 무질서한 무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도 아주 섬세하고 영원한 겁니다. 그러니 허망하게 생각하는 것은 상당히 어리석다고 봅니다.

저 불이 밤이나 낮이나 켜져 있다면 ‘꺼진다, 켜진다’ 이런 언어도 붙지 않는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생멸이 없는 줄을 여러분의 자성불은 다 알고 있을 겁니다. 여러분의 본래 자성은 수억겁을 거쳐 오면서 체험을 하고, 구르고 구르며 피나는 경험을 쌓고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아주 세밀히 알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갖추어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생멸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고 윤회에 끄달리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청정이라는 것도, 더럽고 깨끗한 것이 귀합돼서 돌아가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의 여러분은 그것을 모르면서 사량적으로 이론만 가지고 사는 처지가 돼 버리고 말았죠. 그러니 여러분은 백지장 한 장 사이, 한 찰나에 알 수 있는 법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계발을 해서 문화 문명으로나 과학으로나 의학으로나, 이렇게 돌아가면서 발전이 되는 시점에 와 있는데 여러분이 왜 그걸 모르시겠습니까?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모르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 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등잔 밑이 어둡지 않나 이런 생각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몇백 년 전부터 내려오는 화두 수행은 이미 시대에 맞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우리가 계발이 되고 발전이 돼서 마음이 넓어진 데다가 과학적인 문제를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방편은 벌써 과거의 것이 되었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고 있는 거는 건너뛰어라 이거지요. 알고 있는 건 건너뛰어라! 하나와 하나가 딱 맞아서 돌아가야 곡식이라도 갈 수 있는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다면 어떻게 물질이 갈려집니까?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먹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정신력으로는 벌써 알고 있는 게 너무 많은데 지금 수행을 옛날 그대로 하게 되면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게 된다 이거죠. 이거는 너무 크고 이거는 너무 작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본래 알고 있죠. 지금 수행하는 시점에서도 벌써 짐작하고 알고 있어요. 그런 데다가 ‘이 뭣고, 이놈이 뭣고’ 하고 있으니 그것이 여러분한테 해당되느냐 이겁니다.

지금 그렇지 않아도 어저께 말한 것뿐만 아니라 아까 말한 것도, 벌써 백 년이 흘렀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시공이 없이 돌아가서 빛보다 더 빠른 시점에 있습니다. 그런데 길잡이도 어리석어서 뛰어넘을 줄 모르는 데다가 그런 길잡이에 딸려 가는 사람들도 모두 장님이고 귀머거리라면 어떻게 앞으로, 정말이지 마음의 인등을 켜고 밤과 낮이 없이 밝게 인도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겠느냐 이겁니다. 남들까지 이끌어 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자기 몸뚱이와 자기 가정, 자기 조상은 이끌어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수십 년을 공부해 가지고도 자기 몸뚱이 속에 있는 중생을 건질 수가 없다면 어찌하겠습니까.

그걸 건진다 안 건진다를 떠나서 자기란 말입니다. 우선 요 몸만 생각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자기와 둘이 아닌 까닭에 자기 생각 하나에 의해 수십억 마리의 자기 중생들이 지금 자기를 따르고 있는데도 자기가 아차 잘못 생각하겠습니까? 그리고 아차 잘못 생각하기 이전에 또 바깥으로 미신처럼 찾겠습니까? 여러분이 바깥으로 찾는다면 임시적인 위안은 될 수 있을지언정 공덕은 이룰 수 없죠.

또 한 가지 애로점이 있는 것은 여러분이 바깥으로 찾아서 그 의식 자체, 이미지에 단편적이고 기복적이고 미신적인 것이 너무 쌓여서 뭉쳐지면 거기에선 악의 존재밖엔 안 나옵니다. 악의 존재에 따라 수억 마리로 번지게 됩니다. 이게 정말이지 무서운 도리입니다. 우리가 잘못하든 잘하든, 벌을 받든 안 받든 물질 하나에만 한정되면 좋은데 그게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 하나가 헤아릴 수 없이 이 세상을 다 덮을 수도 있는가 하면 이 세상을 다 좀먹을 수도 있는 겁니다. 마음, 이 자체가 그렇게도 무서운 겁니다. 그러면서도 묘한 거고 광대무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 없는 그 마음이 그렇게 악의 존재를 풀 수도 있고 선의 존재를 풀 수도 있습니다. 무한의 그 진리가 그렇게 돼 있기 때문에 여러분한테 항상, 그저 우리가 수행할 때는 악을 버리고 선으로써, 또 우리가 마음을 깨달을 땐 악과 선을 다 놓고 가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한국, 조막대기만한 나라에서 산다고 하시겠지만 이게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한자리라고 생각을 할 때 이 자리가 조그맣다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우리 몸뚱이가 작다고 인간이 아닌 것도 아니고 몸뚱이가 크다고 인간이라는 법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초기에 이 마음의 도리, 한마음을 진짜로 믿고 들어가야 합니다. ‘주인공’ 하면 이름은 주인공이지만 뜻으로 벌써 삼천대천세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마음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조상, 부처, 중생 모두, 풀잎 하나, 애벌레 하나 버리지 않고 한마음으로 뭉쳐서 조화를 이루며 돌아가는 이 평등 진리의 근본이 바로 주인공이라고 진짜로 믿을 때에 바로 주인공 속에 일체가 들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일 배를 해도 만 배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만 배를 해도 일 배도 안 되는 사람이 있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일 배를 해도 백팔 배가 되고 삼 배를 해도 삼만 배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한생각을 해서, 만약에 ‘그 일 배도 없으니 어디 가서 찾느냐? 일 배는 어디로 갔느냐?’ 이렇게 찾을 때에 바로 말로 헤아릴 수 없는 그러한…. “일 배는 어디로 갔느냐?” 이렇게 할 때에 “모두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일 배 할 것도 없지 않느냐.” 이런 소리가 나올 수밖엔 없죠, 너무 가까워서. 여러분이 저기 법당에 부처님이 있다고 생각을 하니까 둘이 되죠. 꼭 법당에 들어가야만 하는 게 아니라 항상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내가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 여기 계신다’ 하는 걸 아셔야 돼요.

전에 어느 스님께서 화장실에 갈 때는 가사 장삼은 물론이거니와 두루마기를 벗고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을 따르면서도 나는 오지게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봤죠. ‘내가 변소에 가더라도 부처가 거기 있는 거고…, 허허허, 더럽고 깨끗하고가 어딨어? 내가 지금 용변 보러 가면 거기 부처가 용변을 보고 있는 거지.’ 속으로 이러면서도 어른의 말씀을 거역 안 하고, 또 형님의 말씀을 거역 안 하고 깍듯이 받들었죠. 그쪽에서 모르든지 알든지 나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나 공부하는 데는 그 사람이 위대하고 위대하지 않고 그게 상관이 없어요. 또 그 사람이 깨쳤고 안 깨쳤고가 나하곤 상관이 없어요. 우리가 지금 현실에 나왔으니까 오직 전체와 함께 무의 법, 유의 법을 같이 동등하게 해 나가도록 하는 데 전념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둘 아닌 자비의 행, 참선의 행을 하며 그대로 행선으로서 나갈 수 있도록 자기의 마음을 굳혀야 하는 거지, 남이 잘하든 우리가 무지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러니까 형님의 뜻을 깍듯이 받들어 모시는 그 마음이 그토록 진하죠.

왜냐하면 나를 다지기 위해서 저 몸뚱이를 빌려 가지고 나에게 오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니 누가 나를 때렸다 해도 그 사람을 통해서 나를 때리게 했으니, 그 사람을 괜히 수고하게 만들었으니 더욱 미안하고 감사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니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바가지를 긁더라도 ‘아하, 감사하구나.’ 또 뭐라고 야단을 치더라도 ‘아유, 감사하구나. 이것이 바로 저 몸을 빌려서 수고롭게 하니 내 이거 미안해서 견딜 수 있나. 참, 주인공이 나를 다지기 위해서 이렇게 하시는구나. 얼마나 감사한가. 고가 없으니 모두가 자비요, 지혜요, 바로 사랑인 것을….’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겁니다.

부처님 법이 부처님께서 말씀해 놓으신 경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전으로 결집해 놓은 것은 부처님께서 그때 시절의 방편을 써서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때 그 방편은 지금 시대의 방편하고는 또 차이가 납니다. 나는 경전은 못 봤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는 당시에 ‘내가 이 방편을 쓰는 거는 현시점에서 돌아가는 대로 맞춰서 쓴 것이니, 이다음에 세상이 바뀌어서 돌아갈 때는 다시금 그 시대에 맞게끔 방편을 바꿔 써도 좋으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부처님의 그 뜻, 깨달아서 말씀하신 자유인의 그 뜻이 너무도 철두철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분도 철두철미하기 때문에 그분이 만약에 똥을 누었다면 밑을 안 씻을 이치가 없어요. 똥을 누는 대로 그분이 밑을 씻고 일어나시리라고 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걸 알고 있습니다, 믿고.

내가 그전에 할 말이 없어서 ‘이거 뭐라고 말을 해야 되나. 아니, 날더러 무슨 말을 하라고 그러는 거야? 아, 자기네들이 지금 살고 있는 게 그것인데….’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말입니다, 만나면 얘기가 나오고 만나지 않으면 할 얘기가 없어요. 참 묘하죠? 그러니 어떡합니까?

그래서 내가 항상 말씀해 드리듯이 주인공을 진실히 믿고 모든 것을 거기에 일임해 놓고 사세요. 잘되는 것도 거기 못되는 것도 거긴데, 잘되는 것도 금방 돌아가고 못되는 것도 금방 돌아가니 어디 붙을 자리가 있겠습니까. 공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잘됐으면 잘된 대로 감사하고, 안됐으면 안된 대로 거기서 또 잘돼서 금방 돌아가니 그것도 또 감사하고, 그러니까 감사한 것뿐이라. 그런데 뭐가, 뭐가 잘못돼서 믿지 못하고…, 자기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겠죠.

엊그저께 스님네들과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계율, 이런 거 생각해 본 예가 없다.” “어째서 그러십니까?” “나 하나 죽으면 아무것도 붙지 않는다.” 죽는다는 건 아주 극치적인 얘기입니다. 죽었다 할 때는 아무것도 붙지 않는 겁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냥 죽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살다가 죽는 게 아니고요. 무섭고 두려운 거, 누가 뜯어 먹을까 봐, 무슨 귀신이 나올까 봐, 내가 뭐, 병이 들까 봐, 이런 것은 다 나 하나가 죽으면 붙지를 않는다 이겁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로 믿는데 어찌 그렇게 방황하고 그러느냐 이겁니다. 하늘이 무너져서 내가 가루가 돼서 죽는다 하더라도 그 죽는 것도 걸리지 않을 때, 내 몸이 죽는 것도 걸리지 않을 때 아무것도 걸리지 않습니다. 그만치 그냥 죽고 사는 것도 다, 거기를 믿어 버리는데 뭐가 거기 붙습니까? 아픈 거, 뭐, 이런 것이 어디에 붙습니까?

그런데 야유하듯이 말입니다, 내가 그냥 발발발발 떨고 하는 데는 착착 더 붙어요. 그런데 ‘허, 그런 거 붙거나 말거나다.’ 이럴 때는 심심해서도 안 붙어요. 심심한데 그게 붙습니까? 재미있어야 붙지. 하하하. 아등바등하고 그래야 붙는 건데, 그저 그러거나 말거나 이따 죽으나 더 이따 죽으나 그냥, 그저 너나 나나 뭐, 다 그냥…. ‘나’가 죽는데 뭐가 그래요? 그러다 보니까 여기 붙어 봤자 심심해요. 그리고 여기 붙어 봤자입니다. 둘이 아니라는 걸 벌써 알고 있기 때문에 성가시게 할 수도 없고 나쁘게 할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아예 그냥 싱긋이 웃고 말아 버리는 거죠.

그러니 물질은 너는 너고 나는 나지마는 마음은 한마음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 또한 내 몸이어서 보호를 하기 때문에 보신이 항상 따라다닌다 이거예요. 보신이 따로 있나? 십대 제자도 내가 가지고 있지, 오방신장도 내가 가지고 있지, 호법신장도 내가 가지고 있지, 화신도 가지고 있지, 뭐, 모두 가지고 있잖아요. 만약에 유전성이나 영계가 들어오면 여기에서 탁 밀치면서 ‘야, 내 말을 들으려면 들어오고 내 말을 안 들으려면 들어오지 마라!’ 이럭하고서는 탁 잡으면, 붙기만 하면 다 그냥 하나로 요리가 돼 버리니 그거 또한 묘한 법이라.

그러니 악은 악을 낳고 선은 선을 낳는데 ‘선과 악을 다 죽여라’ 이렇게 하는 것은 ‘바닷물을 다 삼켜라’ 이거거든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너무 욕심이 많았죠. 나부터도 욕심이 많은 것 같은데, 여러분도 욕심을 내려면 그런 욕심을 내세요. 왜? 내가 아무리 선을 추구해서 선을 닦고 선을 행한다 하더라도 어디쯤 가다가 보면 악도 범해요. 마음이 달라질 때가 있어요. 그러니 그 악을 또 받게 되고 이러다 보면 윤회에 말려서 사생 속에서 좌천이 되거나 승진이 되어 돌아가면서 윤회에 끄달리는 거죠. 그러니 얼마나 휘달리겠어요.

그러니 선도 놓고 악도 놓으면, 악도 모으지 않고 선도 모으지 않는 거죠. 한 찰나예요. 선도 한 찰나요 악도 한 찰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두려운 게 없어요. 왜? 그렇게 한 찰나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운전대는 여러분이 다 가지고 있거든요. 악도 한 찰나고 선도 한 찰나인데 운전할 때는 그저 악도 선도 다 놓고선 다시 거기서 생산해서 써라 이거죠.

용광로에 별별 쇠가 다 들어가지만 녹아서 다시 넓적하게 네모반듯한 철판으로 턱하니 나오거든요. 그러면 그걸 잘라서 그냥 생산을 해서 써라 이거예요, 굴려서. 그러니 이것저것에 다 끄달리지 말고 그렇게 하는데…. 이제 기초적인 거는 여러분이 좀 더 공부하세요. 벽을 치면 봇장이 울리듯이, 좀 아시겠죠?

참, 요거 한마디 하고 갈까요, 또? 내가 한 소식을 얻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어린애를 낳아서 키우듯이 그렇게 키워야 어른이 되죠. 그렇듯이 내가 나를 낳고도, 터득을 했다 나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건 발견한 게 아닙니다. 키워져야 발견했다는 뜻이 나오죠. 근본 자체, 그 참자기를 발견했을 때는 그 자기가 지금 현재 자기의 스승이 됩니다. 그런데 스승은 수억겁을 거쳐 나와서 경험이 많아요. 이 몸을 끌고 다니면서 가르치려니까 별짓 다 하는 겁니다.

※위 법문은 대행 선사 법문집 ≪허공을 걷는 길≫ 중 1988년 7월 10일 국내지원법회 법문의 일부를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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