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이고 내는 데는 오직 내면세계 그 한 구멍밖에 없다

마음은 체가 없으니 마음을 넓게 갖는다면
우주 바깥을, 공기 바깥을 벗어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마음을 가지고 마음대로 못 하고 얽매여서
그냥 고인 물에서만 헤매고 도느냐 이겁니다.

마음의 차원을 높이려면

질문 일체가 다 다음에서 나온다 하지만 우리 무지한 중생들은 자기 마음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의 마음의 차원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변 보십시오. 역사를 본다 하더라도 나무때기로 도구를 만들어 쓰는 시대가 있었고, 또는 돌을 깎아서 도구로 쓰는 시대가 있었고, 또는 구리로 만들어서 쓰는 시대가 있었고, 철로 만들어서 쓰는 시대가 있었고, 금속으로 만들어서 쓰는 시대가 왔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누가 갖다 준 게 아니지 않습니까? 모두 생활을 하다 보니까 아쉬운 점이 나왔단 말입니다. 마음에서 ‘이거를 이렇게 하면 되겠다’ 하는 그런 생각이 나온 자체가 뭘 말하느냐. 여러분이 일체 만법, 그 무한의 진리를, 무한의 능력을, 창조력을 다 갖추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게.

그렇게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자꾸자꾸 발전이 되는 것입니다. 이날까지 발전이 돼서 지금 통신이라든가 무기라든가 또는 어떠한 회사의 기계라든가 이런 것도 다 그렇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창조를 해서 내놓고 이렇게 발전이 되는 것도 여러분의 마음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 하나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얘깁니다. 이 세상을 다 자유스럽게 살게 해 놨는데 왜 그렇게 자유스럽게 못 사느냐는 얘깁니다. 삼라만상이 다 자유스럽습니다.

그런데 모르니까 그렇다 하지마는 좀 마음을 넓게, 보고 듣는 대로 모든 것을 넓게 쓰세요. 우리는 색깔을 보고 저런 나무들이 어떠한 종류인가 하는 것도 밝혀내서 알고, 이렇게 잘 보고 삽니다. 그런데 빛보다 더 빠른 것은 이 마음의 심력입니다, 심력! 빛은 가다가도 물질이 있으면 반사가 돼서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 거기에서 또 늦춰질 수도 있고 중단될 수도 있어서, 빛이 그렇게 빠르다 해도 그런 한계가 있지만, 심력이라는 것은 은산철벽도 그냥 뚫고 나갑니다. 어떠한 물질이고 아랑곳없어요. 어디고 아랑곳없습니다, 정말. 멀고 가깝고도 없고 어떠한 물질이 앞을 가로막아도 그냥 뚫고 나가는 것이 바로 심력입니다. 그러니까 이 공부를 하시라고 이렇게 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내 집을 쓰고 다니면서, 내 집을 내 시자로, 내 종으로 이렇게 이끌고 나가면서 내 종 하나 다스리지 못해서야 어떻게 불자라고 하겠습니까? 모두 중심이 튼튼치 못하고 마음이 요변덕을 떨기 때문에 그렇지, 진짜 수억겁 광년을 거쳐서 나를 이렇게 진화시켜서 끌고 온 주인을 생각한다면 진짜로 믿어야 될 거 아닙니까? 잘 끌고 갔든 못 끌고 갔든 자기 주인이 끌고 온 것입니다, 여직껏.

그런데 주인을 의심하고 믿지 못해서 거기에 턱 맡길 수가 없다면, 여러분 몸도 역시 그렇게 흔들리는 겁니다. 엊그저께도 얘기했지만, 큰 트럭을 운전수가 막 요변덕을 떨고 앞을 가로막으면서 끌고 가요, 충돌할 듯이. 그래서 내가 옆에 앉아 있는 기사더러 그랬습니다. “저것 좀 봐. 저 안에 운전수가 개떡 같으니까 저 차도 개떡같이 구르잖아?” 하고요. 그거예요, 바로. 사람의 마음이 개떡 같다면 사람의 행동도 개떡 같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야, 우리 심력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하고 광대무변하고, 이 세상을 그 심력에다 다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는구나. 다 넣었다 꺼내도 줄지 않는구나. 이렇게 심오하고 이렇게 광대무변한 우리의 심력을 무시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좀 더 밀고 나갈 수 있는 그 힘이 있다면, 인내가 있다면….

여러분이 살아생전에 몸이 있는 채로 그 도리를 알아야 이름해서 열반계에도 가는 거지, 아니, 죽기만 하는 것이 열반이 아니에요. 살아생전에 ‘내가 나온 게 없기 때문에 갈 곳도 없다’는 걸 알아야 열반이에요. 자세히 말하자면 ‘마음은 체가 없고 순식간에 나투면서 돌아간다’는 그 점을 알면 열반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인공을 정확하게 믿고 맡기려면…

질문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타신에 의존하지 말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이라는 개념도 제가 자꾸 바깥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주인공을 정확하게 믿고 맡겨 놓을 수 있겠습니까?

답변 아무리 주인공이다 할지라도 그 주인공을 형상으로 바깥으로 찾는다면 그것도 또한 도깨비장난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이해가 안 가시겠지만 이 지금 세상 돌아가는 게요, 일 초도 쉬지 않고 돌아가요. 그러면서 그 가운데 뭐가 있느냐 하면 찰나찰나 나투면서 화하는 거, 그러니까 모두가 그냥 여여하게 돌아가는 거죠.

그 도리만 안다면 우리가 자유인의 성취를 맛볼 것입니다. 어디에도 고통이 되질 않으니까요. 그러고도 능수능란하게, 괴롭지 않고 저절로 자동적으로 일이 되는 것은 자기 육체 속의 의식들이 내 마음과 더불어 같이 하나가 돼서 때로는 선신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보디가드도 될 수 있고 해결사도 될 수 있고, 어떠한 환경 용도에 따라서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이 해결하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무조건 모두가 부처다 이렇게 나옵니다.

부처가 못 되는 것은 단 하나, 모두 바깥으로 ‘주여!’ 하고 찾고 바깥으로 ‘하나님!’ 하고 찾고 부처를 믿는 사람은 ‘부처님!’ 하고 바깥으로 믿고, 이렇게 자꾸 찾는 것을 바깥으로 찾으니까 내가 성숙이 못 돼요. 성숙될 수가 없죠. 첫째는 나부터 성숙돼야 되는 건데 내가 성숙된 게 아니고 말로 요량껏 이론으로만 밝아져요. 그렇다면 실천은 못 하죠. 어때요?

제법무아와 윤회

질문 부처님의 가르침은 제법이 무아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윤회를 하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우리가 제법이라 하면 일체를 말하고, 이 무아라고 한다면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없는 그 가운데에 나, 자아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게 없어도 아니 되고 저게 없어도 아니 되고 그냥 꽉 차 있습니다. 있기 때문에 무아라고 한 것이지, 이러한 무아가 없다면 윤회가 어디 있으며, 윤회가 없다면 이러한 무아가 어딨습니까? 눈이 없는데 귀가 어딨고 귀가 없는데 눈이 어딨겠습니까?

생명이 없으면 육신이 보이지 않아서 무효고, 육체가 없어도 보이지 않으니깐 무효고, 또는 생각을 해내지 못해도 목석이니깐 무효예요. 다 갖추어서 생김생김이 잘생기고 잘 행할 수 있는 똑바른 사람이라야 그걸 제법의 무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뜻이 그렇단 얘깁니다. 그래서 세상 뜻이 모두가 공해서 찰나찰나 나투면서 화해서 돌아가는 경지이기 때문에 제법무아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없어서 무아가 아니라, 우리 몸뚱이 속에 너무 많아서 어떤 거를 내세워서 나라고 할 수 없고, 내가 먹었다고 할 수 없고, 내가 살림살이를 지금 하고 간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아입니다. 우리가 따지고 본다면 모두가 작은 것 큰 것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모든 법칙에 의해서는 하나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법이 무아인데 어찌 윤회가 있겠습니까?” 이런다면 우린 움죽거리지도 말고 목석이 돼야죠. 물도 파도도 없고 흘러가는 것도 없어야 되겠죠? 그런데 넉넉히 흘러가고 움죽거리고 자동적으로 아주 질서 정연하기 때문에 무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정된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냥 전체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도 만나는 것도 가고 오는 것도 먹는 것도 사는 것도 모두 고정되게 하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 육도윤회에 끄달리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치심이 올바른 거죠. “그 윤회라는 것이 알고 본다면 모두가 공했으니까, 거기다 집착하지 말고 거기에 매이지 말아라. 매이지 않는 게 상책이다. 매이지 말고 벗어나라.”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살아생전에, 몸 떨어지기 전에 알아야지 몸 떨어지고 난 뒤에 해탈을 하려면 해탈치 못합니다. 부딪침도 없고 더함도 덜함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습이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생전에, 윤회에 매이지 말고 모든 착을 떠나서 그대로 그대로 해라 이겁니다. 그대로 모두 하고들 계십니다. 그대로 하고 계신데 그렇지 않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지금. 너무나 기가 막히죠. 여러분이 모두 고정됨이 없이 공해서 돌아가는 도리로 생활을 하시면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서 뭐 하나를 생각하면 꼭 붙들고 늘어지고, 이렇게 마음이 장난을 하는 겁니다. 그 장난에 끄달리고 그러니까, 모두 하나하나 생각하는 게 입력이 돼서 바로 그게 악업 선업이 되는 거죠.

그러니 이 어항 속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바세계에서 살아나가면서 이 사바세계를 벗어날 수가 없죠? 그렇듯이 우리는 그 어항 속에서 한 발짝도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피안의 그 언덕을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체가 없으니까 마음을 넓게 갖는다면 우주 바깥을 벗어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공기 바깥을 벗어날 수도 있는데, 왜 자기 마음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하느냔 얘깁니다. 마음을 가지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왜 마음을 가지고 마음대로 못 하고 얽매여서 그냥 고인 물에서만 헤매고 도느냐 이겁니다.

그러니 지혜롭고 물리가 터져서, 점프를 할 수 있는 능한 마음이 생겨야 되겠으니까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참, 마음이 묘법이다. 마음이 묘하다. 마음이 악으로 떨어지게 할 수도 있고 선으로 떨어지게 할 수도 있다. 점프를 해서 이 지구 바깥으로 벗어날 수도 있고, 우주 세계를 한 찰나에 돌 수도 있다. 그런데 왜 마음이 마음을 가둬 놓고 있느냐.” 했습니다.

‘주인공’이라 하는 것은 한마음을 말하고, 전체, 안과 밖이 하나로 돌아가는 거를 ‘한마음’이라고 합니다. 그걸 즉, 다시 말해서 주인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마음을 내기 이전 마음은 바로, 다스리는 마음의 선장입니다. 다스려야 할 선장! 잘못되고 잘된 걸 뻔히 아는 선장 말입니다. 마음 내는 것을 이렇게도 내고 저렇게도 내니까 ‘요럭하면 안 되잖아. 이럭해야 되잖아.’ 하고 다스리는 선장이 있단 얘깁니다. 그렇게 선장이 마음을 다스리면서 마음을 내니까 육신은 덩달아 따라서 움죽거려 준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들이고 내는 데는 오직 내면세계 바로 그 한 구멍밖에는 없다. 빗장 없는 빗장을 쥐고 늘어져라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한생각이면 그냥 윤회에 끄달리지 않을 수가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아, 일체가 다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거니까, 윤회라는 것에도 매이지 말자.’ 하고 놓으라 하는 것입니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몸이 아파요

질문 제가 지금 일을 하지 않으면 식구들이 먹고살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식구들 먹여살리느라 몸을 돌보지 못해서 그런지 몸이 아프다 보니 마음이 불안합니다. 주인공에 관하기는 하는데 호전되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채찍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나가서 벌어먹여 살리게 한 놈도 그놈이고, 가난하게 사는 놈도 그놈이고, 믿는 놈도 그놈이고 안 믿는 놈도 그놈이에요, 다! 모든 것을 하나로 일치시켜서 확고하게 믿고, 죽든 살든 거기에 놓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나는.

옛날에 이런 일도 있었어요. 다리가 아픈 놈이 와서 빨리 고쳐 달라고 야단법석인데, 끌고 온 놈이 또 빨리 낫게 해 주시라고 ‘빨리빨리’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빨리 낫게 해 주면 이 공부를 어떻게 하라고 빨리 낫게 해 줘?” 이랬는데, 그냥 그렇게 그렇게 해 가지고 가더니만 아, 다리가 나아서 겅중겅중 뛰어다니니까 이제 등한시하는 거죠. 그래서 “그것 봐라. 등한시하잖아?”라고 하니까 다시금 다잡아서 그 공부를 한다고는 하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미지수지요.

그러니까 진짜로 믿어 보세요. 이거는 말로만이 아니에요. 진짜예요. 그 맛을, 어휴! 그 맛을 알면 너무도 좋을 겁니다. 그 맛을 알면 하늘을 쳐다보고 백 번을 울어도 시원치 않을 것이고 땅을 치고 백 번을 웃어도 시원치 않을 거예요. 열심히 해 보세요.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인데, 뭘 그렇게 꽉 잡고 자기가 걸어온 발자취를 짊어지고 애를 써요, 그렇게? 아, 그냥 걸어올 뿐이지, 그 발자취를 마음으로 왜 또 뭉쳐 들고 다닙니까? 그럴 필요가 없어요.

우리 살림살이 살아나가는 거는 우리가 걸음 걸어오듯이 살고 가는 거예요, 지금. 발자취를 놔 버린 채 걸어 다니는 거와 같은 거죠. 내일 살 걱정 하지 말아요. 하루살이로 살라고요. 그냥 하루살이로 살란다고 또 다 갖다 팔아먹고 끓여 먹고 이러지 말고요, 하하하. 다 맡기고, 내가 가진 게 뭐 있나요? 내 몸뚱이도 가진 게 없어요. 내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니에요. 내 마음도 내 것이 아니고요. 그런데 거기에 뭐가 있다고 그냥 그걸 부여잡고 쩔쩔맵니까? 좀 그렇게 놔 보세요.

아버지로서의 마음

질문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살다 보니 아버지로서의 책임감이 무겁습니다. 저 자신보다 자식의 즐거움이 더 기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앞으로 자식에게 귀감이 되는 아버지가 되고 싶은데 자식을 대하는 마음에 대해 한 말씀 듣고 싶습니다.

답변 이 세상의 어떤 회사든 중역으로 돼 있는 사람은 중역이기 때문에 직원을 다스려야 한다는 책임이 있습니다. 또 댁도 아버지가 됐기 때문에, 아버지가 되기 전하고 아버지가 돼 가지고는 다릅니다. 아버지가 됐기 때문에 자식들한테 사랑을 베풀 수 있고, 더러운 것도 볼 수 있고, 망나니 같은 것도 볼 수 있고, 그렇게 너그러움이 있는 거지, 만약에 장가들기 전이라면 딴 자식들이 그럭하는 거는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됐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머니나 아버지가 돼서 자식들을 사랑하고 내 생명보다도 더 귀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니라. 그러니 곤충에 이르기까지 개개인이 다, 자식을 생각하고 사랑을 하는 그 부처의 마음은 모두 갖춰 가지고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마음은 찰나찰나 나투면서 아니 되시는 게 없기 때문에 청수에다가 비유를 하고 또 바다에다가 비유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이란 그저 내 자식, 내 재산, 내 것만 아는 개별적인 그릇으로서만의 얘기고, 부처님께서는 삼라만상 대천세계의 모든 생명들이 다 내가 될 수가 있고, 나로서 행할 수가 있고, 나로 나투면서 이끌어 주시는, 즉 말하자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뭐, 갖은 이름의 일체 보살이 다 될 수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또 일체 각계각층 중생들이 다 될 수가 있으니까 부처인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여서 그런 거니까, 그 아버지의 책임을 다하시라는 점에서 나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말로 행으로, 또는 돈을 잘 주거나 옷을 잘 입히거나 잘 먹이거나 이러는 것이 그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로 사랑을 하는 것은 정신력을 길러 주는 것이고, 그 보배를 찾게 하는 것은 전 세계, 전 우주를 맡겨 주는 거나 다름없는 겁니다. 재산 물려주는 것보다도 더 좋은 거죠.

그러니까 내가 항상 이렇게 말을 하죠. “여러분 가정에서 부부지간에 사랑이 없고 어떠한 문제가 있더라도 그대로 사랑하면서, 그대로 부드럽게 행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부드럽게 하면서 거기다가 다 맡기면, 서로 남편이다 부인이다 하는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바로 거기까지 불이 들어오게 돼 있다. 그래서 망하게 하는 모든 나쁜 습성을 고칠 수 있게끔 돼 있으니까 그렇게 하라. 또 자식도 몸을 잡아서 되는 것도 아니고 말로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잘해 줘서 되는 것도 아니다. 단 하나, 그 모든 업식을 녹여 주면 스스로 밝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거를 당신 주인공에 둘 아니게 맡겨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만이 부드럽게 행하게 하고, 아주 정말 보배스러운 인간으로서 자유인이 되게끔 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게 하고, 모나지 않은 사람이 되게 하고, 자비하게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뿌리를 싱싱하게 키워 주고 보배를 찾게 해 주는 것이 원칙이죠. 그건 거짓이 하나도 없어요. 그렇게 연방 해 보세요.

나가서 뭐 어떻게 하고 다니더라도 절대로 욕하거나 때리지 마세요. 부부지간도 그렇고 다 그래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마시고, 저 사람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 저 속에 들어 있는 업보가 그러는 거니까, 바로 의식들이 그러는 거니까 ‘주인공! 그 뿌리는 너하고 나하고 둘이 아니야. 그러니까 주인공만이 그걸 해결할 수 있다.’ 즉 말하자면 뿌리만이 싹을 푸르르게 살게 할 수 있다 이 소리죠. 그러니 그렇게 해 주면서 겉으로는 부드럽게, 진짜 진실로써 그렇게 해 주고 한다면 정말 이 고(苦)의 테두리에서 몰락 벗어날 겁니다. 정말입니다. 그리고 착한 자식이 되고 화목을 가져오고, 질서를 문란치 않게 할 수 있고, 아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어떤 분이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아주 앙숙이었답니다. 그래서 서로 보려고 하질 않았답니다. 그런 분이 한두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도리에서 ‘어휴, 아버지도 내 마음과 둘이 아닌데, 내 뿌리하고 아버지 뿌리하고 둘이 아닌데 그저 아버지가 사랑을 베풀게 당신만이 할 수 있다.’ 하고 항상 그렇게 했답니다. 그랬더니 어느 날은 아버지가요, 딱 껴안고는 “이제는 너하고 나하고 둘이 이렇게 살자.” 하더랍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하면, 아들이 어떤 일을 하다가 망해 가지고 아주 그냥 들어앉은 사람인데, “이제는 너도 살아야지!” 하고 반을 뚝 떼어서 주더랍니다.

어때요? 모두 자비를 베풀게끔 스스로 이렇게 돼야지 스스로 부처를 만드는 거고, 스스로 보배를 만드는 거고, 자유인을 만드는 거지, 어떻게 그냥 입으로만 말을 하고…, 이것 보세요. 막 그냥 말을 악착같이 하면요, ‘어휴! 나는 저 사람만 만나면 아주 지겨워.’ 하고 달아나가요. 달아나가게 돼 있다구요. 그러니까 좋다 좋다 해야 그저 따뜻한 데로 고이죠. 추울 때는 따뜻한 데로 고이고 더울 때는 시원한 데로 고이게 마련이거든요.

그러니까 부부지간이나 자식지간이나 부모지간이나 그 모든 걸 거기다가 ‘둘 아닌데’ 하고 맡겨 놓을 수 있고, 거기에서만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세우신다면 바로 이심전심으로 다 통하게 돼 있어요. 정말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편안하고 즐겁게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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