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마음속에 여러분을 끌고 다니는 자성 부처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생활 속에서도 지혜로운 마음으로써
둘로 보지 않는 사랑, 둘로 보지 않는 마음을 실천하십시오.
부드러운 마음과 부드러운 말,
이것을 떠나서는 화목을 가져올 수가 없고 사랑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대구의 여러분과 같이 한자리를 하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부처님 법이다 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체를 말합니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고 죽고 살고 하는 이 도리가 바로 부처님 도리입니다. 우리 삶을 떠나서는 부처님 법도 없을 것이고 우리 자체가 없이는 부처님도 없을 것입니다.

일체 만물만생이 다 한마음으로 공생, 공용, 공체, 공식화하고 돌아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어찌 달리 종교가 있고 생명이 있고 삶이 있다고 보겠습니까? 불자로 하여금 광대무변하며 더하고 덜함도 없는 이 진리 자체가 부처님 법이자 우리들의 법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마음을 넓게 써서 모든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와 고정됨이 없는 사랑을 줄 수 있고 받을 수 있는 그런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일체 만물만생이 다 마음과 마음이 전달이 돼서 돌아가고, 과일나무도 10리 안팎으로, 아니 20리 30리라도 서로 말 없이 말을 주고받으면서 사랑을 하고 열매를 맺고 합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일체가 다 그렇게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자녀들을 키우면서, 부모를 모시면서 말로만 그르니 옳으니 시비를 해서야 어떻게 잘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린 마음과 마음의 전달로써 자녀들과 부모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고 잘 모실 수 있는 그런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들이 살아나가는 살림 속에,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겁니다. 생명의 근본과 마음을 내는 거와 육신이 움죽거리는 그 자체가 같이 돌아가는 것이 바로 주인공입니다. 부처님 법이라는 것이 따로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여러분이, 일체 만물만생이 다 지수화풍으로 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수화풍을 또 먹고 삽니다. 우리가 지수화풍을 먹고 살기 때문에 그 지수화풍으로 인해서 광력이나 자력 통신력 전력, 이것이 항상 우리들한테 재료로 주어져 있는 겁니다. 재료로 주어져 있으니 마음과 마음이 삼천 년 전이든 삼천 년 후든 언제든 전달이 가능한 겁니다.

왜냐하면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진리와 같이 부처님의 마음도 그렇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4월 8일에만 부처님이 오셨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죠. 그러나 여러분이 살아 계신 한 그 마음속에는 항시 부처님이 계신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 앞에 어떻게 말을 해야 될는지 모르겠지만, 아까 네 가지 재료가 다 있다고 그랬죠? 전력이나 자력 통신력 광력이 전부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다고요. 주어져 있는 그 자체가 바로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만약에 우주 삼천대천세계가 한 바구니에 담긴 꽃다발 하나라 한다면, 부처님께서는 그거를 다 꿰뚫어서 맛을 알고 보고 감촉하고 그 모두를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 마음 하나로 합쳐 여러분으로부터 곤충에 이르기까지 다 나투면서 응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어 보지 않아서 맛을 모르는 것은 생각도 나지 않듯이, 중생들은 마음을 널리 낼래야 낼 수가 없습니다. 내 몸 안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그 자체가 바로 중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마음을 널리 내시기 때문에 어느 거 하나 아니 되시는 게 없고, 어느 모습 하나 부처 모습 아닌 게 없고, 어느 자리 하나 부처 자리 아닌 게 없고, 어느 생명 하나 부처 생명 아닌 게 없습니다. 그렇게 한생각으로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일체 만물만생을 다 내 마음 아닌 게 없이 나투시는 데 대하여, 내 몸 바깥을 벗어나지도 못하는 그 사람들 자체가 바로 중생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저 기도나 하고 이러는 게 부처님 법인 줄 아시고 칠성 찾고 독성 찾고, 또 약사 찾고 지장 찾고 이렇게 갈갈이 나누어서 찾는데 말입니다, 모두가 한마음 속에서 나오는 겁니다. 한 가정에서 한 아버지나 한 어머니가 자동적으로 어머니라는 이름을 갖고, 자동적으로 아버지라는 이름을 갖고 때에 따라서 “여보!” 하면 남편이 되고 “아무개야!” 하면 아들이 되고 “여보게!” 하면 사위가 되고 “형님!” 하면 형님이 되고, 이렇게 자동적으로 뜻과 말과 행이 화해서 바꿔지면서 생활을 여여하게 해 나가듯이 그렇게 해 나갈 수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여기다가 놓고 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 자체, 부적을 안 하면 이사를 가지 못한다는 생각 자체, 여러 가지 문제가 다 여러분의 관습에 의해서 주어진다고 봅니다. 이제는 개선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마음 한생각을 잘 돌린다면 너무도 광대무변한 도리에 의해 밝고 자유스럽게 살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뜻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면서, 느끼고 체험하면서 살아나가는 것이 진짜 우리들의 법이며 우리들의 자유스런 생활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항상 해야 할 다섯 가지 일이 있습니다. 절에서 예불을 모실 때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항상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말로만 그렇게 염불을 하라는 게 아니라 실천하라는 겁니다. 꽃을 공양 올릴 때도, 여북하면 꽃공양입니까? 일체 만물만생이 다 같이 돌아갈 수 있는 아름다움을 꽃공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초를 켜는 그 마음 자체를 바로 밝은 마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다기 물을 떠서 공양을 올리는 그 마음이 바로 지혜로운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지혜로운 마음으로써 향을 피우는데, 악한 것은 다스리면서 선하고 아주 똑바른 마음을 내서 굴리는 것이 바로 향을 피우는 것이며 마음의 향입니다. 그래서 이 모두가 우리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마음을 떠나서는 절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상대가 생겼고 부처님도 생겼고 종교도 생겼고 상대성 원리가 모두 생긴 것이지,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지 않았다면 어찌 부처님 법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바로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러분을 발견하라 하는 겁니다. 내 집에 전화를 놓지 않는다면 전화를 할 수도 없고 전화를 받을 수도 없는 것과 같으니 바깥으로 찾지 말고 내 마음속에서 찾으세요.

법당에 가더라도 부처님 형상이 내 형상이요 그 마음이 내 마음이요 그 생명이 내 생명이니 둘로 보지 말고 하나로 모든 것을 둥글려서 내 주인공에 놓고 ‘뗄래야 뗄 수 없는 내 친구여! 나를 관리인으로, 시자로, 또는 심부름꾼으로 삼아 이렇게 몸뚱이를 끌고 다니니 모든 것은 다 당신이 하는 거야.’ 하시라는 겁니다.

이거 보십시오. 집이 헐어지면 집에 들어 있는 주인이 고칩니까, 헐어진 집이 고칩니까? 반드시 집주인이 집을 고칩니다. 그렇듯이 제 손가락이 제 손가락을 끊어 낼 수 없고 이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여튼 여러분 마음속에 여러분을 끌고 다니는 바로 자성 부처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여러분의 몸속에 들어 있는 자생 중생들을 다스리면서 제도해야 여러분이 제도가 되고 깨친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첫째 “계향” 할 때 말입니다, 먼저 내가 태어난 까닭에 계향이라는 것도 있고 계율도 생겼고, 또 스님 노릇도 하고 부처님 법도 배우고 이럴 수 있는 거죠. 여러분이 머릴 깎고 안 깎고 이걸 떠나서, 가정에서 살림을 하실 때에 남의 탓으로 돌리니까 화도 나고 미움도 생기고 증오도 생기고 이런 거지 내 탓으로 돌린다면 하나도 밉지가 않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난 탓이지 누구 탓이겠습니까? 첫째는 내가 이 세상에 난 탓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향” 할 때는 ‘모든 것이 내 탓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거나 안에서 일어나는 거나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고 거기에 놨을 때에 미움도 사라지고 증오도 없어지고, 남의 탓으로 돌아가질 않기 때문에 화목이 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은 내가 이 세상에 난 탓이니 잘못했든지 잘했든지 내 탓으로 돌린다면 그게 바로 화목을 가져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요, 또는 깨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요, 업보를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계향이지 그냥 입으로만 부르라는 계향이 아닙니다. 250계든 280계든 일일이 개수로 따져서 어떻게 계를 지킵니까? 나 하나만 죽는다면 계 전체를 다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향 하나만 잘 지켜도 천차만별의 그 뜻을 다 헤아릴 수 있으며 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향이니, 이 세상 모든 만물만생이 근본에 따라서 하나로 돌아갑니다. 내 마음속에 바로 주인공 선을 세워서 안에서 일어나는 것도 거기 놓고 밖에서 일어나는 것도 거기 놓고 ‘잘못 일어나게 한 것도 너니까 잘 일어나게 하는 것도 너지.’ 하고 잘못되는 거는 한생각 잘 내서 돌려놓으면서 물러서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 정향이라고 봅니다.

이것을 그냥 하찮게 듣지 마세요. 가정에서도 꼭 필요합니다.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린다.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부드럽게 말해 주고 부드러운 행동과 부드러운 말을 해 줄 때에 서로 조건 없는 사랑을 같이 할 수 있고, 화목을 가져올 수 있고, 재수도 있을 수 있고, 공덕이 있을 수 있고, 모든 생활을 바로 여여하고 자유스럽게 할 수 있다 이 소립니다.

혜향이니, 지혜로운 마음으로써 둘로 봄이 없이 관찰하고 둘로 보지 않고 다스려 나가는 것이 바로 혜향입니다. 그리고 느끼고 실험하고 체험하면서 이렇게 가는 것이 바로 혜향입니다. 그러니 스님네들만 ‘정향 혜향’ 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의 가정생활 속에서도 지혜로운 마음으로써 둘로 보지 않는 사랑, 둘로 보지 않는 마음을 실천하십시오. 부드러운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씨, 부드러운 말, 이것을 떠나서는 화목을 가져올 수가 없고 사랑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신계의 나 자체를 물질계로 내놓으면서 우리가 서로 둘 아니게 굴리면서 참다운 삶을 보람 있게 누릴 것입니다.

해탈향이니, 만물만생 그리고 내 몸속에 있는 자생 중생들 모두가 무명 굴레에서 벗어나 항상 밝아서 여여하니 바로 그것이 해탈향입니다. 항상 마음과 마음이 일체 만물만생하고도 전달이 되면서, 내 몸속에 들어 있는 자생 중생들과 더불어 같이 무명 굴레에서 벗어나게 돼서 여여하니, 항상 밝아서 안팎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여러 중생들을 둘로 보지 않고 제도하게 돼서 가고 오면서도 그대로 제도가 되는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말입니다.

해탈지견향이니, 삼라만상 만물만생을 생각하고 보살피되 밝게 보살핌이 항상 걸림 없이 구족한 까닭에 더하고 덜함도 없이 여여함을 바로 해탈지견향이라고 일컬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부처님께서 “세 가지 조건이 있느니라. 너는 해탈지견향까지 이루었다 하더라도 첫째에 믿음이 있어야 하고 둘째, 다 버려서 다 얻을 수 있어야 하고 셋째, 너는 누가 보시를 해 달라고 하든지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다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이 있어야만 조건 없는 사랑으로서 일체 만물만생에게 나투어 줄 수도 있거니와 내 도량 아님이 없이 나투면서 아픈 사람에게는 약사가 돼서 응해 주시고, 가난한 자에게는 관세음이 돼 주시고, 명이 짧은 자에게는 칠성이 돼 주시고, 좋은 데로 못 가는 사람에게는 지장이 돼 주시고, 물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용신이 돼 주시고, 길을 가다가 어려움을 겪을 때는 지신이 돼 주시고, 관청의 일이 벌어졌을 때는 독성이 돼 주시고….

천차만별로 어느 거 하나 아니 돼 주시는 게 없고, 아니 나투시는 일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천백억화신이요, 천백억응신이요. 가만히 있으면 부처요 생각을 하면 법신이요 움죽거렸다 하면 화신이요 응신이라. 마음 하나가 이렇게 구족하고 이렇게 광대무변한, 평등공법이면서도 활궁공법이고 활궁공법이면서도 수레공법으로서 이 세상을 다 통치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 누구나가 그렇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가만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이 컵도 흙을 물에 개서 바람에 말려서 불에 구운 것으로 어느 것 하나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거는 누구나가 다 알고 계시겠죠. 그래서 컵이라는 이름이 이 세상에 등장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지수화풍으로 그렇게 돼 있어서 만약에 살다 돌아가신다 하더라도 그것이 한데 합쳐져서 합성체로서 등장이 됐다가, 흩어지면 물로 갈 거는 물로 가고 불로 갈 거는 불로 가고, 바람으로 갈 거는 바람으로 가고 흙으로 갈 거는 흙으로 갑니다. 그랬다가 또다시 모이게 되면 또 모습을 바꿔 가지고 형성돼서 이 세상에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마음에 따라서 모습이 바꿔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현실이 주어지고, 현실에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미래가 주어집니다. 미래가 주어지는 자체가 바로 오늘인 것입니다. 미래가 따로 있고 과거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지옥도 천당도 바로 현실에, 지금 이 시점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수화풍이 대두가 돼서 광력이나 전력 자력 통신력이 여러분 앞에 충만히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시점에도 마음과 마음, 정신계의 50% 물질계의 50%가 서로 상응하면서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우리가 한시도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정맥 동맥이 뛰듯이 말입니다.

지구가 우리를 끌고 지금 어디로 돌아가는지 우리가 모르듯이, 우리 몸뚱이 속에 있는 중생들도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왔다 갔다 하는지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뚱이 속에 있는 자생 중생들부터 제도하라 이런 말입니다. 안팎으로 생활을 하면서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고 내 주인공에 맡겨 놓아야 합니다. 어떠한 문제가 닥쳐올 때도 내가 생각해 보고 내가 내 마음으로 나를 다스리면서 상대방을 원망 안 하고 돌아간다면, 바로 상대방에서도 불이 켜지고 자기한테도 불이 켜져서 다 밝게 살 수 있는 지름길이 생길 것입니다.

자꾸 이런 말을 하는데 말입니다, 광력 전력 자력 통신력이 우리한테 주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과 마음이 통신이 돼서, 부처님과 중생들이 둘 아니게 어떠한 문제도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꽃나무들도 무정물들도 생물 전체가 다, 어떠한 문제를 생각했다 하면 같이 통할 수 있는 그 자체가 되는 것은 바로 우리한테 광력 전력 자력 통신력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것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마음은 항시 어디에나 아니 나투는 데가 없어서 금속과도 같고 전력과도 같다 이 소립니다.

부처님이란 뭘 가지고 부처님이라고 하는가. 내가 어느 거 할 때에 나라고 할 수 없는 그 자체가 바로 부처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거 할 때에 여러분이 했다고 하시겠습니까? 엄마가 됐을 때에 나라고 하겠습니까, 아내가 됐을 때에 나라고 하겠습니까? 아버지가 됐을 때, 형님이 됐을 때, 남편이 됐을 때 나라고 하겠습니까? 나라고 할 수 없는 게 부처인 것입니다. 여러분한테 어떻게 요리를 해서 드려야만이 맛있게 집어 잡술는지….

우리 마음은 지구 바깥을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도 마음은 여러분의 가정에 가서 뭐가 놓여 있고 뭐가 어디 있고 이런 것도 다 캐치해 가지고 지금 한순간에 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그렇게 광대무변하고 그렇게 크고 작음이 없이 여여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생각지 못하시고 항상 물질적인 문제에 의해서, 요것은 못 한다, 요것은 한다, 요것이 간다 온다…, 이러는 관습에 의해서만 살아나가고 계십니다.

좀 껑충 뛰어넘어 보십시오. 내 한생각에 의해 내 몸속의 모든 자생 중생들을, 즉 말하자면 일체 생명들, 의식들을 한마음으로 리드해 나갈 수 있고 바깥으로는 바로 마음과 마음을 조절하면서 모든 것을 한마음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서로 조건 없는 사랑으로 이어지게 선행을 하고 실천할 수 있는 아주 정말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 안 되십니까?

마음에는 산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높지 않고 물이 아무리 깊다 하더라도 깊지 않습니다. 마음은 어디고 통하니까 그 속을 통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아무리 산이 높고 아무리 은산철벽이다 할지라도 마음은 통하는 겁니다. 마음은 어디고 걸리는 데가 없습니다. 마음을 넓게 쓰십시오. 둘로 보지 않는 눈으로 보고, 둘로 보지 않는 귀로 듣고 마음을 넓혀서 모두를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가 옹졸하게 ‘요거는 요거고 조거는 조거다’ 하고 적대시하게 되면 그 크나큰 진리를 타파하지 못하며 깨치지 못할 것입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여러분은 지구에 붙어 있는 생물인데 이 지구가 어디로 돌아가는지 아시기나 합니까? 지구가 버스라면 우리는 그 버스 안에서 네 집 내 집, 내 걸상 네 걸상, 네가 잘했느니 내가 잘했느니 하고 온통 네 것 내 것을 따지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복이 들어오다가도 나가요. 돈이 들어오다가도 ‘아이구, 이 집에 들어가 봤자 괴로움만 가져올 거야.’ 하고 나간다구요.

또 가만히 보십시오. 모두가 내면의 정신세계로 들어가야 된다고 하는 이유도 내부에 있는 생명들, 의식들은 내 몸뚱이가 어디로 돌아다니는지, 어디로 헤매고 돌아다니는지 하나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구가 어디로 돌아다니는 줄을 모르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소가 잘못 가면 “이랴!” 하면서 고삐를 잡아당기듯이 하나하나 다스리면서 거기다가 다시 놓아야 합니다. 나왔던 구멍에다 자꾸자꾸 다시 놔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예전에 한 말을 그냥 되합니다만, 예전에도 항상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지금 현실에 나온다고요. 물질 컴퓨터에서 나오는 것은 사람들이 입력을 해 넣었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살아나가는 것은 자동적으로 입력이 되는 거지 누가 입력을 해 넣고 안 해 넣고 그게 아닙니다. 자기가 어떻게 행동을 했느냐, 어떻게 말을 했느냐, 어떻게 살아나가느냐에 따라서 입력이 그냥 자동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누가 해 주고 뺏어 가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 입력이 돼서 현실로 나오는 팔자 운명과 고통, 유전성 영계성 업보성 세균성 인과성, 이 모두를 그 나오는 데다가 되맡겨 놓으면 되입력을 하는 게 됩니다. 되입력을 한다면 앞서 입력됐던 것이 다 없어지죠.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나오는 데다가 놓는다면, 한 구멍에서 나오는 거 한 구멍에다 되놓는다면 바로 앞서 입력됐던 것이 다 없어짐으로써 현실의 그릇이 비었다가 찼다가 비었다가 찼다가 하면서 항상 밝게 돌아갑니다. 그러니 여여하게 살 수밖에 없겠죠. 그리고 자유스럽게 살 수밖엔 없겠죠. 그리고 자생 중생들이 다, 내가 마음먹고 하는 것을 다 알게 됨으로써 한마음으로 뭉쳐 준다 이 소립니다.

우리가 이 모두를 잘 안다면 참으로 말로 형용할 수 없으리만큼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마는, 오늘은 어째 이 말을 좀 하다가 저 말을 하다가 이렇게 되는군요. 아마 여러분이 이러고저러고 이러고저러고 하니까 나 역시 그런가 봅니다. 하하하. 할 말은 너무도 많은데 왜 이렇게 할 말을 제대로 못 할까요? 여러분한테 커다란 드럼통으로 기름을 퍼붓는다 하더라도 작은 그릇으로 받는다면 그냥 밖으로 쏟아질 테니까 그렇겠죠. 그러니 여러분이 각자의 그릇에 채워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스스로 받아질 겁니다, 아마.

1993년 6월 6일 국내지원법회 법문의 일부를 정리

※위 법문은 대행 선사 법문집 ≪허공을 걷는 길≫ 중 1993년 6월 6일 국내지원법회 법문의 일부를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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