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을 둘로 보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모든 것을 나로 보라

공부 하는 사람들은 남 탓 안 한다.
남의 말에 끄달려 돌아가지 않는다.
남의 참견을 안 한다.
모든 것은 안으로 굴린다.

마음공부의 자세

질문 요즘 유튜브를 통해 대행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걱정거리들이 끊임없이 올라오는데 모든 걸 주인공에 맡겨 놓는다면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는지요. 그렇다면 마음공부 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요.

답변 우리는 가정에서나 도량에서나 자기 범위 내에서 생각을 하고, 자기 차원에서 생각을 하지 남의 차원에서는 좀체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고가 벌어지는 거죠. 내가 좀 더 그 도리를 이해를 하고 그쪽 방면으로 한번 서 보는, 잘못됐든지 잘됐든지 내가 서 보는 그런 마음이 돼야 하고 그 마음이 됐다면 남들과 서로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을 하게 되는 자비심이 생겨서 가정도 조화를 이루고 또 생활 속에서 조화를 이루죠. 인간이 살아나가는 데, 부부가 만나서 사는 데도 간단하게 생각이 되지마는 사람 사는 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가다 보면 그것이 너무도 복잡하고 다단합니다. 

그러고도 생활에 의해서, 자기 인연에 의해서 천차만별로 자기한테 주어진 대로 생활을 하게 돼 있죠. 장사꾼은 장사를 하고 정치인이면 정치를 하고 말입니다, 뭐든지. 내 몸도 복잡다단하게 생긴 겁니다. 그래서 한쪽이 폐허가 되면 또 한쪽이, 즉 말하자면 공장장이 폐업을 하고 파업을 일으킨다면 몸 전체가 기울어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몸도 복잡다단하고 모든 생명들이 내 몸 안에 형성이 돼서 한 사람의 선장으로서 마음을 먹게 돼 있으니 얼마나 복잡합니까? 그런 데다가 가정도 그리 쉬운 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아나가는 사회도 복잡다단합니다. 세계는 물론이거니와 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과 마음을 전달한다, 마음과 마음을 서로 주고받는다는 뜻은 우리 마음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부되어야 하는 것을 말하죠. 그래서 우리가 그 마음의 보배를, 우리가 싱그럽게 공부할 수 있는 그 마음을 가질 때는 언제나 나를 세우지 말고 남에 참견하지 말고 주변의 어떠한 문제가 있더라도 남을 탓을 하지 말고 ‘남이 이렇게 해서 이렇다’ 이러지 마세요. 남의 탓이 절대 없습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놨을 때, 주인공에다 모든 거를 놨을 때는 스스로 돌아갑니다. 자기가 생각한 대로 스스로 돌아갑니다. 완화되고 그것이 아주 스무드하게 돌아가는데, 말로 이게 틀리다 저게 틀리다, 이 사람이 틀리고 저 사람이 틀렸다고 이런다면 공부하는 거는 틀려 버렸고, 또 한 가지는 자기가 생각한 대로 돌아가질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말만 벌어져 가지고 싸움만 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공부하는 데 심중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이라고 봅니다. 자기 생각대로 말하고 자기 생각대로 하는 그러한 관습적인 습을 몽땅 떼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마음의 근본을 가지고 있으니 주변을 둘로 보지도 마시고, 원망하지도 마시고 모든 것을 나로 보세요. 그리고 깨달은 사람이 말하는 거는 깨달은 대로의 법이 될 수 있는데, 이런 게 있습니다. ‘사람을 죽여도 자비다’ 이런 거 말입니다. 왜? 그건 무명을 치고 옷만 벗겼지 사람을 죽인 게 아니다라는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욕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욕이 아니라 자비가 될 수도 있거든요. 답답하면 욕을 한마디 해 놓고선 그 사람 마음의 근본을 건지려고 무척 애를 쓰는 그런 자비가 있습니다, 그 속에는. 

그런데 남의 속을 하나도 모르면서 자기 생각대로 막 해 버리는 그런 습이, 여러분이 다는 아니겠지만 어떤 때는 그 습관이 나온다고 봅니다. 다른 때는 아무 일도 없다가도 급자기 닥쳤을 때 그게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급자기 닥칠 때에 한번 찔러 보면 영락없이 예전의 습 그대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체 만법에 의해서 마음의 보배가 쓰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코드라면 큰 거를 쓰려면 큰 코드 하나에, 마음을 먹을 때 ‘나는 모터를 돌리겠다.’ 하고 코드를 꽂으면 모터가 돌아지고 ‘난 냄비에 찌개를 끓이겠다.’ 하고 코드를 꽂으면 찌개가 끓여지는 것이 바로 보배입니다. 이 세상에 우주의 섭리나 이 세계의 섭리나 나라의 섭리나 가정의 섭리나 복잡한 몸의 섭리나 모두 똑같이 행할 수 있는 그 자력이 여러분한테 다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대로 여여하니 부처니라.”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색에 끄달리지, 욕심에 끄달리지, 말에 끄달리지, 나에 끄달리지, 모두 끄달리다 보니깐 아예 그냥 철통같이 막힌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마음에 의해서 용을 하고 있으면서도 ‘용을 먼저 하는 것은 사법이고 정법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법이든 사법이든 어떤 거를 막론하고 다 놔 버려야 됩니다. 놔 버리고서 자기가 한생각을, 한생각을 하기 이전에 그냥 무심히 생각하면서 무심히 밥 먹고 똥 누고 잠자고 편리하게 살아나가듯이 큰일이든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스스로의 자기 한생각에 좋게 돌아올 수 있는, 좋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저 오다 가다가도 한생각 좋게 탁 내던질 때도 있고, 오다 가다가도 한생각을 좋게 내 주기 위해서 한번 찔러 볼 수도 있고, 오다 가다가도 한번 말을 푹 찔러서 남의 부아를 훌렁 뒤집어 놨을 때 그 사람의 행동이 어떨까 하는 것도 한번 해 봄으로써 거기에선 한마음의 도리에 큰 공덕이 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랬을 때에 속이 뒤집어지지 않으면서도 속이 뒤집어지게 남한테 말을 해 주는 거는 그것도 자비다 이겁니다. 그, 왜? 모르는 사람이 뒤집어지게 한다면 그것은 악으로 돌아가지만 이 도리를 아는 사람이 속을 뒤집어 놓는 거는 그건, 즉 말하자면 그 사람의 뜻을 보기 위해서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건 자비입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남 탓 안 한다. 남을 원망 안 한다. 남을 증오 안 한다. 남의 말에 끄달려서 돌아가지 않는다. 남의 참견을 안 한다. 모든 것은 안으로 굴린다. 참견을 안 하되 참견을 할 수 있는 거는, 내 앞에 닥친 참견은 해야지요. 이 도량에서도 만약에 뭐가 잘못 돌아간다 이럴 때는 자기 생각에, 주인공에 맡겨 놓고 돌아가게 해야지, 이걸 말로 발설을 하고 이 사람이 어떻고 저 사람이 어떻고 이런다면 일이 하나도 해결이 안 돼요. 오히려 바깥으로 더 커지죠. 

이런 건 다 놔 버리고 자기한테만 오로지, 자기 주인공한테만 맡겨 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소리를 들었고, 자기가 있기 때문에 상대방이 하는 걸 봤고,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눈에 거슬린 거지 내가 없이 어떻게 거슬립니까? 

그런 거를 놓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끝없는 옛부터 우리가 가지고 살아온 습을 녹일 수 있으며, 어떻게 내가 그것을 항복을 받을 수 있으며 또 항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항복을 받고 내가 항복을 하는 건데, 항복을 받는 사람도 나요, 항복을 하는 사람도 나다 이겁니다. 육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삼십이상이 구족하다’는 말이 있듯이 그대로 산 부처다 하는 겁니다. 산 보살이다, 산 법신이다 이거예요. 

그러니 여러분이 공부하는 데에 조금도 애착이 없이 남의 걱정 하기 이전에 나부터 아시라는 얘깁니다. 그리고 남의 걱정이 있걸랑 내 마음에다가 맡겨 놓으시라는 얘기지 걱정 안 하라는 게 아닙니다. 진짜로 사랑하고 진짜로 자비한 마음이 있걸랑은 안에다가 굴려 놓으십시오. 거기에 맡겨 놓으신다면 오히려 내가 뛰어다니면서 일을 해 주는 것보다 백 곱쟁이 천 곱쟁이 아마 좋은 결과를, 씨를 거둘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가정에서 살면서도 좀 더 사는 데에 괴로움이 없이 사시라고 이러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걸 다 놔 버리고, 못났든 잘났든 문이 아니든 문이든 한번 엎드러져 보고 돌아가는 것이, 이것이 큰 경험이며 보배를 크게 이루는 지름길입니다. 

주인공을 자꾸 놓치게 됩니다

질문 주인공을 잘 잡고 가다가도 어느 순간 습에 끄달려서 자꾸 놓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여일하게 주인공을 잡고 갈수 있을는지요. 어떤 의정이 있어야 할까요?    

답변 만약에 속이 상해서 와락 소릴 질렀다고 합시다. 그것도 바로 그대로 놓은 겁니다. 그냥 한순간 뛰어넘어야 합니다. 한순간 뛰어 넘어야지, 그것을 붙들고 ‘아이구! 또 놓치고선 또 악을 썼구나.’ 이런다면 허, 그럼 사람이 뭐, 말도 못 하고 뭐, 악도 못 쓰나요? 악을 쓰되 쓰지 말고 쓰지 않되 써라 이겁니다. 그냥 악쓴 것도 놓은 거고 악 안 쓴 것도 놓은 겁니다. 그런데 왜 자꾸 걸립니까? 아, 그렇게 걸려 가지고야 은산철벽을 어떻게 뚫고 넘겠습니까. 옛날 사람 같으면 은산철벽을 뚫는다고 온통 야단이고 그냥 뭐, 여기도 걸리고 저기도 걸리지만 아, 지금 사람이 얼마나 잘 머리가 돌아가는데 여기저기에 다 걸립니까? 

또 뭐, 이 의정 내는 것도 그렇습니다. 나를 찾아 가지고, 찾을 게 없는 걸 찾아 가지고 정말 진짜 보임하고 돌아갈 때, 체험을 하고 돌아갈 때 참, 미지수의 그 문제가 거론됐을 때 ‘아, 이게 뭔가? 야, 이게 뭔가?’ 하고 아주 대의정이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이게 뭔가’ 하고 돌아갈 때 그 이게 뭔가 하는 것도 놓는 것이요, ‘이거 또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또 놓쳤구나.’ 하는 것도 놓은 겁니다. 놓쳤다고 하는 것도 놓은 거고 붙들고 있다 하는 것도 놓은 거니깐 다 놓으십시오. 
그러니까 내가 잘 안다고 해서 뻣뻣이 굴지 말고 항상 녹신녹신하게, 겸손하게 순응하고, 자기 마음이 자기 마음한테 순응하라 이겁니다. 자기가 자길 모르면, 자기한테 순응 못 하면 항상 남한테도 순응을 못 합니다. 그리고 부처도 발견을 못 하고요. 항상 뻣뻣하니 아니, 부처가 나올 수가 있나요? 흙이 딴딴하게 굳어 보세요, 싹이 나오나. 물을 녹녹하게 칠해야 고 싹이 호봇하게 나오죠. 안 그렇습니까?

믿는 친구한테 사기당했어요

질문 얼마 전에 믿었던 친구한테 사기를 당해 억울하고 분한 마음 참을 길이 없습니다. 모든 게 내 탓이라는 걸 알면서도 친구를 원망하는 마음이 사라지질 않아 괴롭습니다. 제게 정신 차릴 수 있게 일침을 가해 주십시오.

답변 우리 몸뚱이에서 정맥 동맥이 쉬지 않고 돌아가는 것, 숨 쉬는 것, 한 발짝 떼어 놓았으면 또 한 발짝 떼어 놓는 것, 찰나찰나 바뀌면서 돌아가는 것, 이런 걸 누가 하고 있는가. 우리가 그걸 실질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말로는 다 잘 알고 있는데 말로만 알았지 실천을 통해서 감응이 되질 않는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데 잘되는 것은 어느 틈에 잘됐는지도 모르고, 잘못되면 또 내가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니까 ‘이거 조상이 잘못해서 이렇게 됐는가, 부모가 잘못됐나, 남이 뭘 어떻게 해서 잘못됐나, 그놈이 그렇게 해서 잘못됐지’ 이러곤 이것이 다 남의 원망이고 증오고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그 증오나 원망을 왜 하게 되느냐. 그것을 각각 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가는 것을 옳게 못 보고, 나쁜 것도 옳게 못 보고, 좋은 것도 옳게 못 보고, 진리를 제대로 못 봤기 때문에 그런 증오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잘못하는 게 그만 자기한테로 돌아가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은 남이 그렇게 생각을 안 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생각대로 자기 멋대로 판단하고 자기 멋대로 증오하고 자기 멋대로 원망하고 자기 멋대로 괴롭다고 하고 자기 멋대로 아주 속상해서 애를 씁니다. 그렇게 꼬부장해서 애를 쓰는 그 마음이 바로 누구한테 가느냐 하면 결국 자기한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만약에 공을 던지지 않았다면 공이 튀어오지 않듯 자기는 지금 한 발짝 한 발짝 걷는 대로 바로, 과거가 따로 없이 미래가 따로 없이 지금 이 자리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체가 없어서 영원한 대진리가 바로 소진리고 소진리가 대진리인 것입니다. 그거는 왜냐. 여러분한테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마는 여러분 몸뚱이가 지수화풍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그 능력이 생기는 것이고, 그 능력이 생겨서 작용을 하게 되고 분기도 일어나고 잔잔하게 자비도 생기고 또는 여러분의 그 무한의 능력도 생기는 법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고 만약에 지수화풍이 합쳐서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걸 개별적으로 생각한다면 바람, 물 또는 흙, 태양, 이거 개별적으로만 생각한다면, 능력이 생길 수가 없죠. 불이 일어날 때 반드시 물이 없다면 끌 수가 없듯이 그러한 관계상 사대가 한데 합쳐서 이렇게 능력이 인다는 그 점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생명체, 모든 유정물이나 무정물 또는 동식물이 다 지수화풍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만 지수화풍으로 돼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더불어 같이 움죽거리지 않는 것들도 다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들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움죽거리고 있습니다. 사람과 같이 움죽거리고 있지만 사람의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리고 들리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가 일본말 모르고 일본 사람도 우리 한국말 모르듯이 이렇게 서로 모르고 돌아가고 모르는 것이 많기 때문에 여러분한테 ‘방하착을 하라’ 했습니다.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자기 멋대로 판단을 할 것 같으면 자기한테 업보가 되고 유전이 되니까 절대로 자기가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자기 주인공에다가 모든 것을 놔 버려라’ 이런 것입니다. 자기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일임하고 믿고 돌린다면 거기서 바로 자기가 걸리지 않는 법이 생기는 겁니다. 그리고 마음에 감응이 오고 말입니다. 

생활의 어떠한 것도 그 오온 속에서 다 나오는 겁니다. 손을 보십시오. 손가락을 볼 때는 다섯 개가 이렇게 뚜렷하지만 주먹을 쥐었을 때는 한 주먹입니다. 이 세상도 그렇게 한 세상입니다.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바로 한 세상이죠. 여러분이 이렇게 살아도 한세상, 저렇게 살아도 한세상이라면 좀 더 우리가 인간의 삶에 대해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영원 불생불멸 할 수 있는 그런 각오를 하시고 불심을 좀 더 돈독하게 가지시고, 진실하게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내가 진실한 믿음을 가질 때, 부처님 앞에 와서 진심으로써 삼배를 올릴 때 부처님 마음이 내 마음이고 부처님 몸이 내 몸이요 바로 부처님의 그 무한의 능력이 내 능력이기도 할 터인즉, 내가 아프다면 바로 내 지극한 마음 속에서 바로 의사가 나올 것이고, 바로 지극한 마음에서 가난을 물리칠 것이고, 지극한 마음 속에서 유생 무생이 다 한마음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마음이 나빠서가 아니라 여러분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잘못 써 가지고 유전이 되기도 하고 현실에도 바로 자꾸자꾸 다가옵니다. 그렇더라도 여러분은 걸리지 마세요. 주인공에 모든 걸 일임시키고 아는 건 알아서 감사하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일임해서 놔 버리세요. 그런 법을 아신다면은 감사해도 놔 버리고, 또 괴로워도 놔 버리고, 외로워도 놔 버리는 겁니다.
‘이거는 꼭 돼야 할 텐데, 부처님 앞에 가서 절을 하고 정성을 들여 시주를 했는데 왜 안 되나.’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안 되는 것이 나한테는 아주 좋은 일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아니 자기 자부처가 이렇게 안 되게 했구나.’ 하는 걸 믿으면 돌아서 다시 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거를 납득을 잘하셔서 인과응보를 겪지 마시고 유전에 말리지 마시고 윤회에 끄달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어떠한 괴로움이 생긴다고 해도 거기다가 바로 놔 버리세요. 자기가 색이자 공이고 공이자 색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이 둘이 아니다라는 얘깁니다. 바로 자기 실상이라고 볼 수 있겠죠. 자기 실상이 공이니까 공에다 모든 것을 놔 버리세요, 진실하게 믿고. 믿지 않으면 놔 버릴 수가 없어요. 

믿어야 열쇠를 맡기죠? 믿지 않으면 열쇠를 맡길 수가 없듯이 말입니다. 내가 ‘참나’인 주인공을 진실로 믿는다면 몸이 아프고 괴로워도 거기를 믿고 맡길 수가 있죠. 주인공이라는 그것 자체도 이름이고 실(實)은 아닙니다만…. 그래서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라 실상 그 자체를 믿는다는 것인데 바로 거기다가 놓아 버린다면, 믿고 놓아 버린다면 해결이 될 수가 있죠. 

우리가 살다 보면 수많은 사람한테 속기도 하고 사기도 당하고, 또 안 당한 사람도 있고 사기를 친 사람도 있겠죠. 그러나 주인공에 놓는, 방하착 할 수 있는 진실한 마음을 갖는 그런 분들은 나중에는 참자기의 감응이 와서 그걸 그렇게 하라 그래도 안 그럴 겁니다. 또는 안 그런다 하는 마음조차도 없고 한다 하는 마음조차도 없이 슬그머니, 보이지 않는 데서 다, 오온에 칠보가 가득히 차 있듯이 그 모든 것이 다 저절로, 가난도 면할 것이고 병도 물러날 것이고, 자기의 뿌리로서 모든 것이 해결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만 가서 되는 것이 아니니 될 수 있으면 모든 것을 공에다가 놓아 버리세요. 모든 것을 공에다 놔 버리라는 것은 왜냐. 예를 들어 만약에 장님이 있다고 한다면 장님은 지팡이 없이는 못 갑니다. 그러니 공에다 놓지 않는다면 장님의 눈을 밝게 할 수는 없고 겨우 지팡이 하나 쥐여 주는 것밖엔 안 되죠.

그래서 공에다가 이름을 붙여서, 주인공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거기다 다 놔 버린다면 바로 여러분에게도 그 뜻이 풀려 공 도리도 알 수 있으며, 바로 인에 의해서 연도 생기고 그렇게 돌아가는 자체가 바로 연기법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마음을 쓰면서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연이라고 할 때, 그 연에 따라서 인연의 결과가 나온다는 걸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고 행하고 듣고 보고 하는 그 결과가 바로 여러분한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절에 다니면서 건성 다니지 마시고 정진 열심히 하시고 진실하게 믿으셔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고행하신 이유

질문 부처님께서는 이미 수억겁 전에 깨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왜 굳이 그렇게 고행을 하셔야 했는지 의문입니다

답변 하이고, 참 내!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다 깨치셔서 이 세상에 났다 할지라도 이 모습을 타고 났지 않습니까?  모습을 가지고 나왔고 모습을 가지고 나온 그 자체를 어느 누구가 그 깨쳤다고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방편으로서 그렇게 하신 거죠. 말하자면 보여 주려고요. 여러 사람들이 인식을 해야 따르지 않습니까? 여러 사람들한테 가르쳐 줘야, 그게 보여 줘야 알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보여 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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