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부처’ 지각하는 패스트 트랙 ‘화두선’

팔정도 근본으로 하는 수행은 다 훌륭하고 위대해
해탈 하려는자 불교 근본 중도 공부로 정견 세워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교토 용안사 선원에서 화두 참선하는 불자들. 이들은 필자와 함께 참선 수행하는 도반들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교토 용안사 선원에서 화두 참선하는 불자들. 이들은 필자와 함께 참선 수행하는 도반들이다.

‘간화선은 최상승법이다’라는 말이 있다. 화두 참선이 깨달음에 가장 빠른 길이라는 말이다. 깨달음을 수행하는 불자라면 누구나 빠른 깨달음으로 생사의 괴로움에서 해탈하고자 한다. 어째서 화두선은 생사 해탈의 가장 빠른 길이라 하는가? 오늘은 이 이야기를 살펴보자. 

중도에 근거한 수행법은 다 좋다

불교 경전에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바로 깨달음을 성취하는 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나온다. 또 깨치는 방법도 너무나 다양하다. 

하지만, 불교에서 깨달음은 중도(中道)이다. 부처님은 깨치고 첫 설법에서 당신이 중도를 깨쳤다는 중도대선언을 하였다. 중도가 깨달음이다. 중도에서 벗어난 것은 불교의 깨달음이 아니다. 중도에 부합하는 것이 깨달음의 길이요, 중도에서 이탈하는 것은 외도(外道)이다.

불교의 근본은 중도이다. 부처님의 친설과 그 직계 제자들의 말씀을 모아 놓은 초기 경전과 부처님과 수많은 제자들의 말씀을 담은 대승 경전, 그리고 동아시아 조사 선지식의 말씀을 모아 놓은 조사어록이 모두 중도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 

부처님의 첫 설법인 초전법륜을 기록한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은 당신이 깨친 중도를 팔정도라 하였다. 중도 = 팔정도인 것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지 2600년 가까이 되었고 이후 사방 팔방으로 그 가르침이 전파되어 변화 발전하여도 불교의 근본은 중도 팔정도인 것은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남방 승가 전통의 위빠사나 수행법이나 대승의 티벳불교 수행법이나 한국 조계종의 화두선이나 염불이나 일본의 묵조선이나 중도 팔정도를 근본으로 하는 수행법이라면 다 좋다. 남방이든 북방이든, 대승이든 소승이든, 화두선이든 위빠사나든, 염불이든 주력이든, 보살행이든 보시이든 상관이 없다. 부처님과 역대 조사 선지식들이 깨치고 설한 중도 팔정도를 근본으로 하는 수행이라면 다 훌륭하고 위대한 깨달음의 길이다.     

중도를 깨치려는 수행 방법은 다 평등하다

부처님이 깨친 중도에 근거한 모든 수행법이 다 좋다면, 어째서 화두선은 가장 빠른 공부라 하는가? 

남방 상좌부 승가의 전통 수행법인 위빠사나를 공부하는 불자들은 위빠사나가 부처님이 행하시고 가르치신 수행법이라 믿고 그 외의 수행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부처님이 깨치고 첫 설법에서 당신이 중도를 깨쳤노라 하였고 어떤 수행을 해서 깨쳤다고 하지는 않았다. 경전의 기록으로 보아도 부처님 이후 처음으로 깨친 수행자 꼰단냐(한문역 교진여)도 부처님의 중도, 팔정도, 사성제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깨치는 언하대오(言下大悟)를 하였다. 지금 남방과 북방을 대표하는 위빠사나나 화두 참선법으로 깨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초기 경전이나 대승 경전에 보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깨치는 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므로 ‘위빠사나만이 부처님이 가르친 수행법이다’라고 하거나 ‘간화선이 최고의 수행법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부처님은 중도를 깨달았고, 중도를 깨치는 길은 수없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서울로 가는 모든 길이 통하듯이 중도의 깨달음으로 가는 모든 수행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니 다 평등하고 우열이 있을 수 없다. 

만약 불교 수행법에서 어느 수행이 좋고 어느 수행이 나쁘다고 말한다면 그렇게 보고 말하는 이는 정견(正見)이 서지 못하여 아직도 분별망상 속에서 말하는 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깨달음 중도로 가는 수행법이라면 다 평등하니 좋고 나쁨이 없기 때문이다. 

불자라면 잘 아는 바와 같이 부처님 법은 중도 불이(不二)다. 나와 너, 선과 악, 부처와 중생, 간화선과 위빠사나가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이 되어 양변에 집착하면 분별망상이 일어나 중도 정견이 서지 못한다. 중도 정견이 확고하려면 일제 만물, 일체 존재를 중도 정견으로 보아 불이(不二)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 남방과 북방, 대승과 소승, 간화선과 위빠사나, 화두선과 염불 등을 볼 때 상대 분별에 빠져 좋고 나쁨으로 본다면 삿된 견해인 것이고 다 좋고 평등한 수행법이라 보는 것이 정견이라 하겠다. 

불교 수행을 하려면 정견을 세워야 한다

부처님의 지혜로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해탈하여 영원한 행복을 성취하려는 이는 반드시 가장 먼저 불교의 근본 중도를 공부하여 정견을 세워야 한다. 불교의 정견이란 중도로 보는 안목이다. 

부처님이 깨친 중도의 정견이란 바름과 삿됨을 바로 보는 안목이다. 바름과 삿됨을 구분하는 인목이 서면 지혜가 나온다. 불교의 정견 지혜를 밝히지 않고 깨달음을 향해 수행하는 이는 금강산을 구경하려는 이가 금강산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찾아가는 격이다. 이렇게 정견 없이 수행해서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정견 없이 수행하는 사람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 하는 격이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행위다. 당장 멈추고 불교의 근본 중도, 팔정도 공부를 해서 정견을 세워야 한다. 

부처님의 깨달음 중도를 공부해서 정견이 확고한 이라면 자기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며, 세상 만물의 존재원리를 바로 아는 사람이다. 이렇게 불교의 바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세운 이라야 바른 깨달음의 수행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정견은 수행의 시작이자 끝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의 중도 정견이 선 사람은 어떤 수행을 하더라도 깨달음으로 갈 수가 있다. 화두선, 염불, 주력, 절, 지계, 봉사, 보시, 위빠사나, 자비명상 다 훌륭하고 좋다. 불교 수행법에서 우열은 없다. 다 평등하고 존중받아야 할 깨달음의 길이다. 

어째서 화두선은 가장 빠른 공부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두선은 어째서 가장 빠른 깨달음의 길이라 하고, 직지(直指), 돈오(頓悟), 최상승(最上乘)이라 하는가?

불교의 근본 중도를 깨치려는 수행 방법은 다 좋고 평등하지만, 그 깨달음의 수행이 빠르고 느린 차이는 있다. 비유하자면, 서울에서 부산 가는 방법은 너무나 다양하다. 하지만, 가장 빠른 방법과 천천히 가는 방법이 있다. 가장 빠른 방법은 비행기고, 그 외에도 기차나 버스, 자전거, 걷기 등 다양한 방법이 있다.  

이와 같이 중생이 부처 되는 수행 방법에도 빠르고 느린 차이는 있다. 화두선은 그 중에서 가장 빠른 비행기에 비유할 수 있다. 위빠사나나 화엄종 같은 대승 교학에서는 중생이 부처가 되는 과정을 4차제나 9차제 또는 52단계를 말한다. 중생이 부처 되는 깨달음 수행에 복잡하고 다양한 과정과 단계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화두선은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것을 방편일뿐 중생이 본래 부처라 한다. 우리가 중생이 아니라 본래 부처이니 중생이란 착각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된다. 그 착각을 깨는데 화두가 가장 빠르고 탁월한 효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에서는 깨달음을 직지, 돈오, 돈수, 일초직입여래지라 한다. 

화두선이 빠르다고 불교가 아닌 것이 아니다. 화두선도 부처님이 깨친 중도를 깨치는 것이다. 중생이니 부처니, 생이니 사니, 선이니 악이니 하는 양변에 집착하는 분별망상을 화두로 차단하여 바로 중도를 체험하며 실천하고 깨치는 수행법이다. 

화두선은 본래 부처가 부처되는 수행을 말하지만, 그 수행도 닦음 없이 닦는다 하여 무수지수(無修之修)라 한다. 물론 화두선이 빠르다고 염불이나 위빠사나 등 다른 수행법을 낮춰보면 아직 정견을 세우지 못한 것이니 화두 공부할 자격이 없는 분이다. 화두보다 먼저 중도 정견 세우는 공부가 먼저다.


▶한줄 요약 
부처님의 깨달음 중도로 가는 수행법이라면 다 평등하니 좋고 나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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