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런 날아다니는 새들도 옥수수밭의 옥수수도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거늘
우리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조차도 몰라서야
어찌 부처님 제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 함이 없이 하라시는데

질문 모든 것을 함이 없이 하라 하시는데 도인도 아니고 스님도 아닌 저희들이 과연 함이 없는 행을 할 수 있을까요?

답변 그렇습니다. 도라는 건 생활이 도예요, 생활이. 딴 데 도가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들을 버리고 도가 있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우릴 버리고 부처가 있는 게 아니고요. 그러니까 부처도 우리와 둘이 아니고, 도라는 이름도 우리와 둘이 아니고, 그냥 평전한 생활에 다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깐 우리가 도를 깨쳤다, 깨치지 못했다 이거를 뛰어넘으세요. 이거를 버리고 뛰어넘으세요. 버리라니깐 그냥 아예 그냥 저 개천에다 꼬라박지 마시고 자기 원소에다가, 자기 주인공에다가 그냥 놔 버리세요, 그냥. 그냥 그렇게 하는 게 도예요, 그냥. 이게 도는 무슨 별다르게 해야만 되느냐. 그게 아니에요.

남을 원망 안 하고, 실질적으로 남을 괴롭히지 않고, 예를 들어서 여러말 할 거 없이 내 몸과 같이 생각하고, 내 아픔같이 생각하고, 그저 그렇게 하시면서 남을 존경하고…. 이렇게 그냥 알든지 모르든지 존경하시란 말입니다. 나쁘든지 좋든지 존경하란 말입니다. 무슨 좋은 사람만 존경하고 나쁜 사람은 존경하지 말라 이게 아닙니다. 뭐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생명이 있다 하면은 존경하란 얘깁니다. 존경하게 되면 그, 사람이 아닌 사람은 사람으로 화할 테고 또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화할 테고, 찰나찰나 바꿔지니깐요.

그걸 한번 응용해 보시면 이게 사람 마음이, 모습은 그냥 놔두고도 마음이 뭐, 한 찰나에 다른 혹성에도 갈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연관을 한번 지어서 잘해 보세요, 진짜로 믿고. 그러면 자기 주인공이 때로는 보디가드가 되고, 때로는 지장이 되고, 때로는 칠성이 되고, 때로는 허공신이 되고, 때로는 용신이 되고 그냥 당신이 필요한 대로 돌아가서 화하니깐요.

여러분이 다들 이 소리를 잘 들어서 행하신다면 우리가 도인 아닌 도인으로 사는 거죠. 알지 못하지만 행은 도인의 행으로서 우리가 살고 있다. 머리 안 깎았다고 도인이 아닌 게 아니에요. 우리가 입산할 때에 머리를 깎는데, 모든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저 덧없이 그냥 이렇게 자라는 풀들, 이거 깎아 버리고 원 하나만 남기려고 이렇게 머리 깎는 겁니다. 그런데 머리를 깎고 나면 뭘 합니까. 깎고 나면 또 자랍니다. 그 뜻을 알아야 돼요.

이 깎고 나면 또 자란다. 또 자라면 마찬가지가 되는데 또 자라도 나지 않는, 머리가 나지 않고도 남이 있다면…. 그래서 함이 없이 하고, 또 머리 깎지 않으면서도 깎고, 깎으면서도 깎지 않았다, 이런 문제들이 다 나오죠.

그러니깐 여러분들이 그 하나하나를 이해를 할 수 있고, 남을 욕을 하지 않을 수 있어야 됩니다. 남을 욕을 하는 것도 그 이해를 못 해서 욕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욕을 하게 되면 그만큼 자기 차원이 줄어드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잘하면은 공신이다, 부처님이 만 개라도 일 불이다 이렇게 되죠. 그러니깐 어떠한 신이든지 그저 부처님과 둘이 아니다 이렇게 하세요.

이 꽃 이렇게 핀 거 보면 좋죠? 보기 좋죠? 이 우담바라꽃이라고 하는, 이 연꽃이라고 하는 이 이름을 왜 그렇게 뒀느냐. 너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근데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그 부처님의 깨달음도 그만 못지않게 아름다우니깐 바깥으로 내서 방편으로 그거 말씀한 겁니다. 꽃입니다, 그게. 마음의 꽃. 그래서 우리가 행을 잘하면 이 꽃이 날아다니면서, 허공을 날아다니면서 행하신다고 그랬습니다. 그 꽃이 뭡니까? 그냥 보살의 마음이요, 부처님의 마음이 허공으로 다니면서 찰나찰나 행하신다, 함이 없이 하신다 이겁니다.

화두 참선을 했었는데

질문 전에 어느 스님께 무 자 화두를 받고 화두 참선을 했었는데 진전이 없어 답답한 마음에 질문 올립니다. 참선을 바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답변 지금 각 절에서나 신도 여러분이나 스님네들이나 다 각자가 큰스님한테 화두를 받아서 좌선을 한다 하는데 한번 이런 말을 안 하고 넘어갈 수는 없겠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법의 언어로 말한다면 “사대(四大)와 오온(五蘊)이 공(空)했는데 무엇을 가질 게 있고 놓을 게 있느냐?” 이런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말만 알았지 뜻을 모를 때는 안 것 그 자체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참작해서 한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스님이 화두를 줬다 그러면 이차적으로 ‘이 화두를 끊어지지 않게 하고 들어야지’ 하는 생각이 납니다. 삼차적으로는 여기에다가 모든 것을 일임하고서 앉으나 서나 끊기지 않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좌선을 해도 이것을 꼭 가지고 ‘뭣고 뭣고 뭣고’ 하고 돌아갑니다. 자기가 스스로 벌써 공했기 때문에, 내가 공하고 세상이 공했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마저도 공했고 내가 가질 것도 가진 것도 공해 버렸으니까…, 모든 것이 가질 게 하나도 없다는 그 점은 뭐냐? 내가 본래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질 게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걸 한번 침착하게 생각을 해 보십시오. 내가 본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모든 거를 나쁘다 좋다 해 왔고, 여러분이 다 움죽거리고 있고 여러분이 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판단 못 하고 남한테 이끌려 가는 것도 바로 자기 중심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남이 준 화두, 바로 이것을 꽉 쥐고 굴리질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나는 일 초도 머무르지 않고, 그냥 머물렀다가 돌아가고 머물렀다 돌아가고 이것이 한정 없이, 어느 한군데 고정적으로 국한된 게 없이 전부 변천해 돌아가고 부서져 버리고 상해 버리고, 또 나는 만날 때마다 변하고 또 말할 때마다 딴 말 하게 되고 만날 때마다 딴 사람 만나서 딴 사람 생각하게 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공했다는 얘깁니다. 갖가지로 소소영영하게 가지고 소소영영하게 하면서도 공했다는 얘깁니다. 그대로 여여하게 우리가 간다는 얘기죠. 놓고 간다는 얘깁니다.

그랬으니 항상 그릇은 비어 있다는 얘긴데, 마음으로 만들어서 지어 가지고, 문도 없고 걸릴 것도 없는 것을 마음으로 지어 가지고 ‘그 큰스님이 이렇게 하시니까 이것이 불법이다’ 하는 걸 쥐고서는 그거를 놓질 못하고 가기 때문에, 되려 자기 마음이 자기 문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열지 못하고 닫지 못하는 그런 이치가 허다합니다.

그러면 참선이 어떤 것이 참선이냐. 참선은, 행선도 참선이요 좌선도 참선이요 입선도 참선이요, 모든 행 전부가, 일거수일투족 전부가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모두 ‘아, 결제가 되면 한 철 선방에 가서 나야지. 앉아서 좌선을 해야 그것이 으뜸이지.’ 요렇게 변경이 돼 버렸단 말입니다, 마음이. 육신 떨어지면 마음도 떨어지고, 마음 떨어지면 코도 떨어지고 입도 떨어지고 다 떨어질 것을 뭐가 그렇게 쓸모가 있다고 그렇게 이 육신을 가지고 매달리고 그렇게 해야만 됩니까?

마음이 주인공에 모든 걸 일임을 시켜서 놓는다면 모든 것이 편안하고, 편안한 반면에 반드시 내가 생각을 하면 바로 자가 되는 것이고 생각을 안 하면 부가 되는 것입니다. ‘부와 자가 둘이 아니니라’ 하는 뜻은 ‘부는 자로 가면 자가 돼 버리고, 자는 부로 오면 부가 돼 버린다’는 얘기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모두가.

그러니까 주인공에 모든 것을 놓고…, 참 그 도리를 안다면 어떠한 거든지 못 할 게 없고, 어떠한 거든지 주인공이 하는데 내 거라고 할 것도 없고 남의 거라고 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는 내 것도 아니면서 전체 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따로 내 것이 있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으로써 일체 한생각에는 나도 건질 수 있거니와 남도 건져 줄 수 있는 그런 여건의 능력이 바로 샘솟듯 한다 이겁니다.

그래서 감로수가 돼서, 그 감로수로써 양식을 삼는다는 얘기입니다. 감로로써 양식을 삼는다면 어떠한 사람이든지, 내 중생이든지 남의 중생이든지 모든 것을 이끌고 나갈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생겨서 주인공이 모든 것을 내고 들입니다. 그럴 때 만약에 여러분이 내가 알지는 못하나 내 주인공이 전체를, 상하를, 전체 동서남북을 다 가지고 있다는 거를 알게 되자 믿어지고 바로 거기에 어떤 여건이 있다면 거기에다가 상응한다 이거죠. 그러면 ‘당신이 전부 하시는 거니까 당신이 이것도 해결을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즉시 그것이 반영된다는 얘깁니다. 우리가 성냥불을 탁 켜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성냥불을 하나 탁 켰는데 왜 안 되는가. 안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재판소에 가서 일을 하려면 서류를 꾸미고 도장을 맞고, 그게 다 끝나도 또 그 서류가 돌아서 통과가 되어야 해결이 나듯이, 이런 것도 있는가 하면 그것이 즉시 되는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되고 안 되는 것을 생각해서 여기 오는 게 아니라, 되고 안 되는 것을 다 놔서 능력을 기르려고 여기 오시는 겁니다.

선방에 가서 육신을 구부러뜨리고, 무릎 관절이 상하도록 앉아 있는 것만이 참선이 아닙니다. 그건 ‘앉아서 내가 참선을 해야지.’ 생각을 했기 때문에 참선을 하지 않는 거고, ‘참선을 다 했다.’ 하기 때문에 벌써 그것은 아닌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참선이 자꾸 끊어졌다 붙었다 끊어졌다 붙었다 하는 생각으로 하기 때문에 그건 백 날 천 날을 해도 아마 자기 부처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 능력을 생활에서 한 가지 한 가지 체험하고 또 가다보면 그것이 커지고 커져서 마음의 사리가 온 우주를 덮고, 온 우주를 받들고도 온 우주를 둥글리고 살 수 있는 그런 여건이 되면서 바로 대장부인 것입니다. 그러니 참선이라는 게 어떤 종류의 것이 참선인가를 생활하면서 체험해야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일할 때나 변소에 가서도 자기가 있는 곳에 부처가 있고, 법당에 들어왔으니까 거기 부처가 있습니다. 부처님을 조성해서 이렇게 모셨습니다. 그러면 저분도 코 있고 눈 있고 귀 있고 몸이 있습니다, 손 있고 발 있고. 여러분이 다 같이 둘이 아니라는 걸 표시하기 위해서 조성해 놓은 겁니다. 그리고 그 마음도 또 둘이 아닙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여기서 정중하게 몸으로써는 모든 걸 살펴서 계법을 그대로 지키면서 질서를 문란치 않게 하면서 옳게 생각을 하고 옳게 행을 하시면서, 또는 무위로는 마음의 주인공에 모든 것이 살고 죽는 거, 윤회가 되는 거, 인연이라는 것조차 또 시간과 공간 이런 모든 걸 놔 버리고 믿는다면, 거기서 다 하는 거니까 다 놔 버린다면 바로 그것이 참선으로 돌아가서 모두 나 아님이 없이, 내 자리 아님이 없이, 내 아픔 아님이 없이 돌아가는 그런 도리를 알게 되실 것입니다.

전생 후생이 정말 존재하나요?

질문 우리가 윤회를 한다면 과거의 전생과 현생과 미래의 후생이 있다는 것인데 전생과 후생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나요?

답변 이런 말이 있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그런 식물을 봐도 우리 인생의 진리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또는 과학자들이나 의학자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가만히 생각해 봐도 전생이 있고, 전생이 없다면 지금 현생이 없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전생과 현생이 없다는 것은 전생이 바로 지금 현생과 더불어 한데 합쳐졌기 때문입니다. 즉 말하자면 과거심이 현재심과 동시에 합쳐졌다는 겁니다. 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거를 아시면 전생이 반드시 있죠.

작년에 콩씨가 있었기 때문에 올해 심어서 콩나무가 난 거죠. 그걸로 비유를 해 두고요. 그런데 콩나무가 났기 때문에 콩씨가 또 열리죠? 그 콩씨로 인해서 콩나무가 나고요. 연방 되풀이하게 되지요.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 콩나무가 자기라고 하기 때문에 콩씨는 여차가 된 거죠. 콩씨가 있는데도, 본래 콩씨가 자기한테 있는 것도 모르고 콩나무가 자기라는 겁니다. ‘콩나무가 자기라고 하지 말고 콩나무가 있기 때문에 콩씨가 있고 콩씨가 있기 때문에 콩나무가 있는 거니깐 둘이 아니다, 그러니 공했다, 공한 데서 나오는 거 공한 데다가 일임해서 놔라, 믿어라, 물러서지 말라’ 이러는데도 그걸 믿지 못합니다.

콩나무가 나라고 할 때는 바람에 맞고, 모든 것이 아주 좋지 않습니다. 왜 좋지 않으냐. 너무 끄달리기 때문입니다. 끄달리기 때문에 쫄쫄이가 되죠. 사는 데 그건 부자가 못 되고 아주 가난합니다. 마음이 가난하면 생활도 가난하고 육신도 가난하고 모든 게 가난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에 빠져서 허덕이면서 자기에게 본래 창살이 없건만 마음으로 창살을 만들어 놓고 그 감옥에서 헤매고 돌죠.

그럴 때에 자기 마음으로 지어 놓은 업보가 바로 넝마의 차원이냐 금의 차원이냐 무쇠의 차원이냐 그 말입니다. 마음으로 지어 놓은 그 업보의, 인연 지어 놓은 것이 깡통 인연을 지어 놨다면 깡통끼리 모여서 부딪칠 거고 넝마 인연을 지어 놓았다면 넝마끼리 모일 거고, 그리고 만약에 금의 인연을 지어 놨다면 금끼리 모일 겁니다. 이 세상을 잘 보십시오. 금끼리 모이고 넝마끼리 모이고 깡통끼리 모이고 무쇠끼리 모이고 이 세상 사람들도 자기 배운 것만치 자기 차원대로 전부 모이지 않습니까? 상인은 상인대로 모이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경험하고 행하고, 배우고 듣고 보고 이런 차원에 의해서 바로 우리는 오늘날 그대로 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한 식구로서 살면서도 그렇고, 깡통은 깡통끼리 모였기 때문에 소리가 분잡하게 나죠. 소릴 안 내려고 가만히 했는데도 소리가 나는 거예요. 말다툼이 되는 거죠. 그래서요, 금이라는 거는 조그마하면서도 항상 속에다 지니기 때문에 말도 없고 부딪칠 필요도 없고 항상 몸에 지니지 않으면 장 속에 넣어 놓고 이러니 부딪칠 리가 없어요. 그것이 한 차원의 마음이라고 볼 수 있겠죠.

자기가 보이지 않는 데 마음으로 지어 놓은 것은 보이지 않게 받을 것이고 또는 보이게 육신으로 저질렀다면 육신으로 받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 놓고 우리가 받는 것이지 누가 갖다 주고 뺏어 가는 것이 없죠.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 돌아가는 거를 잘 파악해서 잘 생각해 보신다면 우리는 견성 성불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게 공해서 돌아가되 자기가 지어 놓은 대로 깡통이 되려면 깡통이 되고 자기 마음먹는 대로 자기가 마음먹고 행하는 데에 달렸으니 전생 후생을 따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내가 전생에서도 그러한 차원에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요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기에 태어나서 요렇게 차원대로 모였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내가 지어 놓은 것만치 가지고 탤런트처럼 팔자 운명이 거기 붙어 돌아가고 윤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전성’ 하는데 아니 글쎄, 할아버지께서 목병을 앓아서 돌아가셨는데 아래 손주 대에 손주가 목병을 앓는단 말입니다.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게 왜 그러냐? 아까 얘기했죠? 차원이 깡통이라면 깡통끼리 모여서 살기 때문에 그 가정에 모인 인연들이 전부 깡통이란 말입니다. 인연 따라 만나서 보는 사람도 고고 당하는 사람도 고입니다. 그러니까 고가 있다 없다, 윤회가 있다 없다 이걸 떠나서 우리는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팔자 운명도 없을 것이고 유전성도 없을 게 아닙니까. 그건 왜? 자재할 수 있으니까요.

이 세상을 한번 보세요. 우리가 거기까지 생각지도 않고 있지마는 팔만대장경 법구경이 다 어디 있나. 이 세상 돌아가는 게 바로 삼각원형을 이루고 돌아가는데,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가. 다양하게 색색 가지로 이렇게 천차만별로 돌아가는 이 자체가 바로 법구경 아닙니까? 그 법구경을 누가 이루고 다니나요? 자기가 바로 마음을 내서 이 생명과 육신이 움죽거리고 돌아가니까 삼각원형을 이루고 돌아가는데 우주의 섭리도 다른 혹성도 은하계도 모든 게 삼각원형을 이루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자체가 바로 샛별이며, 샛별을 보고 깨달았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 마음의 샛별을 말하는 것입니다. 별성도 옷을 입고 있어요. 별성이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별을 볼 수가 있는 거지 옷을 입고 있지 않다면 우리가 별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별성도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옷에 의해서 반사가 돼서 마음으로부터 생명으로부터 반사를 이루고 또 그 보이는 모습으로 인해서 물에도 비치는 겁니다.

우리도 마음의 근본인 자기의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에 마음을 낼 수가 있고, 낼 수 있기 때문에 육신이 움죽거릴 수가 있고 또는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전달할 수도 있고, 지혜로운 마음을 비춰 줄 수도 있고, 스스로서 보이지 않는 데 서로가 서로에 상응할 수 있고, 무수한 천차만별로 돼 있는 보이지 않는 생명들에게 서로 상응할 수 있고, 보이는 마음들하고도 같이 상응할 수도 있고, 모습하고도 같이 모이면서 헤어지고 헤어지면서 모이는 이러한 진리를 우리가 세세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돌아가는 이 이치가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하나하나가 만약에 지혜로운 마음이 없고 자기 깨달은 바가 없다면 모든 것이 겉돌아가고 항상 걸리고, 이것도 걸리고 저것도 걸리고 그럴 겁니다.

저런 날아다니는 새들은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를 알고, 옥수수밭의 옥수수도 내일 어떻게 될지 내년이 어떻게 될지도 알고 있거늘, 우리는 인간으로서 어찌 내일 일을 모르고 모레 일을 모르고 어저께 일을 몰라서 눈이 캄캄하고 귀가 먹고 어떻게 할 줄을 모르고 전생이 뭔지 후생이 뭔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거조차도 몰라서야 어찌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 제자라고 하기 이전에 인간이라고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믿는 것은 오직 자기의 깊숙한 마음, 그 주인공뿐입니다. 깊숙이 주인공을 진실로 믿으면서 ‘세상이 이렇게 천차만별로 돌아가는구나. 이렇게 천차만별로 돌아가니 어떤 거 할 때 나라고 할 수 있겠나. 그러니 바로 주인공, 내 주인공이 제일이지. 모든 그 마음이 공했을 때에 공생의 그 능력이 나에게 공심으로 돌아와서 공행을 하게 될 때에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바로 그 액을 공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물질적인 약만 있는 게 아니라 물질이 없는 액 자체의, 그 에너지 자체의 약이 있습니다. 무의 세계에서 공식하는 거, 유의 세계에서 공식하는 것이 둘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무의 세계에서도 물질이 보이지 않는 무체액, 그 자체가 바로 공해서 공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넓게 쓰시고 항상 주인공에서 나온 거, 공에서 나온 거 공에다가 놔야 되겠다 하는 믿음을, 물러서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진짜로 진실하게 깊숙하게 믿어 보세요. 싸움할 것도 없고, 괴로울 것도 없고, 굶었다고 배고플 것도 없고 내가 발버둥 치지 않아도 바로 스스로서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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