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따라 돌아가는 이 진리 속에 에누리가 하나도 없다, 자기가 한 대로지

이름 없는 그 정에 모두
일거수일투족 다 거기다 놓고 중심을 잡아라.
물러서지 말고 다 거기다 놓아라.
​​​​​​​팔정도를 실천하는 게 어려워요

 

질문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실천 수행 방법 중의 하나로 팔정도를 말씀하시는데 그걸 다 지킨다는 게 참 어렵게 느껴집니다. 좀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답변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 그런데 이 올바르게 보는 것, 어떻게 봐야 올바르게 보는 겁니까? 이건 틀리고 이건 잘돼 있고 이런 거를 보는데 그게 올바로 보는 겁니까? 아마 여기 계신 분들이 전부 하나를 봤을 때, 뭐, 구걸하는 사람을 봤을 때 한 가지로 생각하는 사람이 몇 안 될 겁니다. 여러 가지죠.

그래서 그 보는 것 때문에 한생각 하는 것도, 정사유도 동시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보는 걸로 돌아간다. 보는 걸로 생각을 하게 된다 이거죠. 보는 걸로 생각을 하게 되면 또 생각하는 대로 말을 하게 된다. 그 말을 그렇게 하게 되면 또 정업, 바른 행동을 하게 되지 않고 그냥 자기가 본 대로 행동을 하게 되는 겁니다. 여기선 “바르게 해라, 바르게 해라” 이랬는데 어떤 게 바르게 하는 건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바르게 하는 건지, 시시각각 달라지는데.

그래서 ‘정명’ 하면은 ‘바른 생활’ 이러는데 바른 생활이 어떤 것이 바른 생활인지 난처하죠. 어떤 것이 바르게 하는 건지. 그리고 정정진, 바른 정진을 하라고 그랬습니다. 어떤 것이 바른 정진인지 줄창 여러분들한테 말씀드려서 아시는 바와 같이 바른 정진이 어떤 것이 바른 정진인지 생각하시겠죠. 정념, 바른 의식입니다. 의식을 어떻게 가져야 하느냐.

이거 불편하고 산란해서 어떻게 삽니까? 첫 번에 정견, 보는 데서 벌써 정념으로 벌써 왔습니다. 보는 데서부터, 이게 처음에 단추를 위에서 똑바로 끼우면 아래까지 똑바로 끼워지는데, 위에서 하나를 어긋나게 끼우면 밑에까지 어긋나게 끼워지죠. 그렇듯이 이게 ‘정념, 정정’ 이렇습니다. 그런데 바른 의식을 하라고 그랬는데 의식이, 바른 의식이 어떤 건지 우리는 그거를 똑 잡아서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의식입니다. 정정! 이게 정정이라는 것이 “이름 없는 그 정에 모두 일거수일투족 다 거기다 놓고 중심을 잡아라. 물러서지 말고 거기다 놓아라.” 이런 뜻이죠. 그런데 우리가 항상 이 말보다도 이렇게 써 놓으신 것이 당연하다 이렇게 하죠. 그러나 우리가 생각 하나, 보는 거 하나 잘못해서 그 밑에까지 잘못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수좌들 다섯이서 공양을, 예전에는 공양을 구걸하러 다닐 때가 있었죠. 구걸을 하러 다니는데 보니깐 자기 외에도 구걸을 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더랍니다. 그래서 그 구걸하는 사람들을 보곤 “넌 저렇게 밥 얻으러 다니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까 한 사람이 “나같이 생각한다.” 했습니다. 그 ‘나’라는 의미 속에 여러 가지가 들어 있죠. 나같이 생각한다. 그런데 한 사람은 있다 “게을러서 그렇다. 우리는 공부나 하려고 그러는 거지만 저 사람네들은 공부도 하지 않는데 어째서 저렇게 얻어먹으러 다니느냐. 게을러서 그렇다.” 그러고, 또 한 사람은 “아주, 얼마나 없으면 저렇게 얻으러 다니겠느냐.” 하고 불쌍히 보더랍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같이 봤다는 사람이 옳습니까, 저건 너무 가난해서 참 안됐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까. 또는 저건 게을러서 그렇다는 하는 게 옳습니까. 그 보는 거 하나, 생각하는 거 하나가 그렇게 뒤끝까지 잘못되게 만들죠.

그런데 보살행을 한다는 것은 그런 생각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옛날에 어느 사람이 어두운데 길을 바삐 가다 보니까, 아주 도둑놈이 바삐 뛰어가는 거하고 바빠서 사람이 뛰어가는 거하고 그렇게 다른데, 그 다른 걸 보는 게 아니라 보살행을 하는 사람들은 그냥 ‘얼마나 바쁘면 저렇게 뛸까?’ 하는 생각을 그냥 금방 하게 되죠. 근데 보살이 어째서 도둑이 저렇게 뛰어가는 걸 모르고 바빠서 저렇게 뛰어간다고 했느냐 이거죠, 인제.

그걸 여러분들한테 듣는다면 그렇게 인정 안 하는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도둑은 도둑대로 봐야 하고 바빠서 뛰는 놈은 바빠서 뛴다고 봐야 하는데 어째서 그렇게 생각을 하느냐 이러겠죠. 그거 옳지 않겠죠. 그러나 보살행이라는 건 무조건입니다, 무조건. 무조건! 도둑이든 도둑이 아니든 말입니다. 그래서 그 도둑을 그렇게 생각을 했더라면 그 도둑은 도둑이 없어지죠. 무주상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그 한생각으로서 스치기만 해도 그 무주상 보시로서 그렇게 공식이 된다 이런 뜻이죠. 그러니깐 무조건 둘로 보지 말고, 무조건 둘로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아픔도 나로 생각하고 둘로 보지 말라 이런 뜻이죠. 둘로 본다면 만약에 외부에서 내 몸에 병균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그건 둘로 돼서 싸울 것이고, 둘로 보지 않는다면 외부에서 세균이 들어와도 그냥 하나가 돼 버리지 둘로 되질 않습니다. 이 말로만 그런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렇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꼭 아셔야 합니다.

안에서 일어난다 하더라도 우리가 왜 “조복을 받아라, 조복을 받아라” 이런 뜻을 갖느냐 하면 이 몸속에 있는 모습들도 모두 과거로부터 인연에 따라서 다 몸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 인연에 따라서 같이 사는데, 공생으로 사는데 그거를 공생으로 산다는 생각도 없고, 또는 둘이 아니라는 생각도 없고, 또 더불어 같이 먹으니깐 내가 먹는다는 생각도 없을 겁니다, 아마. 내가 산다는 생각도 없고, 그 한마디에 말입니다. 둘이 아니라는 생각 자체로서 수없는 그 가지가지마다 아마 거기서 연결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살이를 살면서 사실, 생각을 해 보세요.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고 못났으면 얼마나 못났는가. 잘나도 한 철 살고 못나도 한 철 사는데 한 철 살면서 내가 산 대로 그 모습도 또 차원도 삶도 모두가, 또 한 생각 때문에 그렇게 차원이 벌어져요. 쭉 연 걸리듯. 하나 생각 잘못하면 끝까지, 죽을 때까지 생각이 잘못돼서 돌아가듯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모르고 단추를 그냥 여기까지 끼웠어도 잘못 끼웠으면 다시 다 빼서 다 다시 끼워야죠. 어떤 때는 ‘세상에 잘나고 못난 사람이 지금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저렇게들 들서거리고 사는데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고 못났으면 얼마나 못났는가. 그거를 알아야 우리가 세세생생에 자기의 근본 에너지를 가지고 자기가 맘대로 살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될 텐데….’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에너지도 자기가 맘대로 자유껏 쓰는 게 아니라 매여서 삽니다. 하나 매여서 사니깐 줄줄이 내려가면서 끝까지 매여서 사는 거죠. 하나의 보는 걸 잘못 봐서 생각도 잘못하고 말도 잘못하고 또는 행동도 잘못하고 생활도 잘못하고 모든 정진도 잘못하고 의식도 잘못되고, 정말 한마음 가운데다 한마음을 되놓듯이 그렇게 되놓아야 할 텐데 그렇지도 못하고 산란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은 즉석으로 들어갈 수가 없죠.

사람이 죽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 자식들이 조르르 앉았든 뭐가 앉았든, 자기가 못해 놓고 가든 잘해 놓고 가든 하여튼 죽을 때 가서는 뭐, 아무 생각 없이 버려야만 하는 것이죠. 일단 그렇단 말입니다. 근데 그것이 의식화되기 때문에 버리지 못하고 가는 것이 되죠. 그거를 다 버리고 가는 것인데 말입니다. 뭐 남는 게 있다고 버리질 못하겠습니까. 인연도 말입니다, 인연을 모두 짚체같이 짚단 모이듯이 모여서 한 식구라고 살았는데 그것도 다 버리고, 자기가 살던 일생을 다 그냥, 자기가 하던 거를 다 놓아 버리고, 자기 몸도 다 버리고 그렇게 스러지는 마당에 무엇이 필요합니까? 무엇을 그렇게 아등바등해서 그렇게 그렇게 해야만 됩니까.

그렇게 한 까닭에 어떤 것이 나오느냐. 삶에 대한 차원도 모습도 인연 인과도 전부 가지고 나온단 말입니다. 자기 몸뚱이 속에 다 지니고 나오는 거죠. 이 말을 되하고 되하고 이러는 것은 잘 생각해서 들으셔야지 허탕허탕 이렇게 가다 보면은 그냥, 밥이 빨리빨리 한다고 해서 뜸을 안 들이고 그냥 푸면은 밥이 설죠. 그와 같이 우리가 뜸을 들일 만큼 들여야만이 밥이 제대로 돼서 맛이 있듯이 우리 인생도 그렇게 뜨내기 인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한 생각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얘깁니다. 한 생각이 그렇게 중요하고 한 번 보는 게 그렇게 중요하고요. 한 번 보는 데 생각이 동시에 거기서 벌어지는 거니까요. 생각이 잘못됨으로써 단추가 잘못 끼워지는 것처럼 바로 말도 잘못하게 되고, 바로 생활도 잘못하게 되고, 행동도 잘못하게 되고, 의식도 잘못 갖게 되고, 정진도 잘못하게 되고 그렇게 되는 거죠.

그 과정이 다 한데 합쳐서, 내가 얘기하죠, 항상. “공생인 줄 알아라. 공심인 줄 알아라. 공체인 줄 알아라. 공용인 줄 알아라. 또 공식으로 사는 줄 알아라.” 이렇게요. 이렇게만 할 수만 있다면 그대로 보살이죠. 그대로 보살행이며 그대로 보살로서 영원한 거죠. 거기에서 또 보살 중에도 또 보살로 돼 가지고도 그것조차도 놓아 버릴 수 있다면 그때는 그대로 자유권을 갖고 그대로 부처 아닌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낚시로 살생을 많이 했던 게 걸려요

질문 저는 머리가 복잡할 때면 낚시를 하러 가곤 했는데 불법을 공부하다 보니 제가 너무 많은 살생을 했다는 죄책감이 듭니다. 어떻게 참회해야 될까요?

답변 우리가 지금 제일 시급한 것이 뭐냐 하면, 모든 물에서 노는 거든지 날아다니는 거든지 들에 다니는 거든지, 그런 것이 전부 힘에 따라서 잡아먹히고 잡아먹고 이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으로 올라오면 사람의 고깃덩어린 먹지 않는데 그 대신에 정신을 뺏기고 정신을 잊어버린단 말입니다. 이거는 참 묘한 법입니다.

그건 어디에서 말하느냐 하면은 서산 대사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했습니다. 그건 왜 그랬느냐. 자기 마음이 새 마음으로 들어가서 새가 내려오고 싶으니까 내려왔다 이겁니다. 둘이 아닌 까닭입니다. “영, 영” 해 놓으면 그게 몇이나 됩니까? 그냥 영이죠? 이 모두가 연결돼서 인연 따라서 돌아가는 이 진리 속에서 에누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가 한 대로지.

살생이라 했는데 그것이 두 가지가 있는 겁니다. 이 도리를 모르고, 관하는 것도 모르고, 자기 아닌 자기가 있다는 것도 모른다면 그냥 살생이 되는 겁니다. 업보가 되고. 그렇지만 그거를 알고 나오는 거나 들어가는 거나 그 한자리에 모든 것을, 나쁜 게 나오면 ‘너만이 해결할 수 있어.’ 그러고, 좋은 게 나오면 ‘감사해.’ 하는 그것으로 다 그게 업이 되지 않고 유전이 되지 않고 또 복수가 되지 않고 그러는데, 그걸 모르니깐 복수로 연결이 돼서 끝끝내 10대(代)고 20대고 30대고 그냥 쭉 계속해서 복수를 낳죠.

그리고 지금 젊은 사람들이, 다들 그런 건 아니지만 더러더러 많은 사람들이 부모의 속을 썩이고, 또 나라에 누가 되게 하고, 자기가 그냥 볼품없이 쓰러져 버리고 이렇게 하거든요. 자기를 자기가 누가 되게 이름을 손상시키고 그러거든요. 그것이 뭔 일이냐 하면 보이는 자기가 보이지 않는 자기를 무시하고 이 운전을 하려니까 그거밖엔 못 살아요. 그거밖엔 못 하거든. 그냥 바깥으로, 물질세계로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마구 해 버리니까. 그러나 이 도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저절로, 저절로 그렇게 자기가 그 에너지를 베풀 수 있기 때문에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에너지가 나가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이 세상을 다 주고 바꾼다 하더라도 난 못 바꾼다 이런 뜻입니다. 이 세상이야 비구빈천에 돌고 돌면서 찰나찰나 변함이 오고 찰나찰나 화해서 나투면서 돌아가는데, 나투는 거 아세요? 나투는 거는 표현을 할 때, 즉 말하자면 한 발짝 떼 놓고 나면 한 발짝 없어지는 거예요. 찰나찰나 나툰다. 이거 보면 저거 봐야 하고 이거 들으면 저거 들어야 하고, 매사 게 다 그렇습니다. 일거수일투족이 다 고정된 게 하나도 없으니 바로 그것이 부처가 가능하다. 99% 가능하다. 그런데 무명이라고 그랬죠? 나무에 흙 덮인 것처럼 그렇게 덮여 있기 때문에 자기를 못 본다. 그런데 마음의 눈으로 보시면 그게 보아진다 이겁니다.

이 모두가 과학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연구해서 내나 또는 농사를 지어서 먹으나 또는 할 줄 아는 거를 하는 거나, 전부가 과학 아닌 게 없습니다. 살다 보면 좀 더 어려운 건 ‘요렇게 잘해야지’ 하고 돌아가게 되는 것도 과학입니다, 그게. 어디 과학이 따로 있나요? 심성 없이 어떻게 과학이 따로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도리를 아는 분들은 그저 저절로 자기 아닌 자기가 물질적인 자기를, 일로 간다면 일로, 일로 가다가 잘못 낭떠러지가 나온다 이러면 낭떠러지 없는 데로 끌고 가거든요. 그래서 자동적으로 지켜 주고 보디가드가 돼 줄 수 있는 거죠. 자기가 생각 내는 대로예요.

어떤 집은 ‘주인공, 나는 지금 급해서 집을 그냥 두고 나가는데 집에 도둑 안 들어오게 지켜 줘.’ 하고선 나갔더랍니다. 그런데 들어와 보니 문은 열렸는데 아무것도 없어진 게 없더랍니다, 하룻밤을 자고 왔는데.

그 모두가 보이지 않는 데에…, 생각해 보세요. 보이지 않는 데서 몽둥이를 들고 철퇴를 들고 ‘너 죽여 버린다!’ 하고 와도 대책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다가 놓고 거기서 지키게, 보이지 않는 거는 보이지 않는 데서 지키게 하고, 보이는 데서는 보이는 걸로 지키게 하는 것이죠. 항상 둘이 아니니깐 말입니다.

색경에 비치는 것도 내 그림자, 여기서 그 색경을 보고 내 모습을 비치게 하는 놈도 그놈이고 그런데, 이놈이 하자는 대로 색경 속에서는 하지 않습니까. 그거와 똑같이 자기가 안 보이는 자기가 하자는 대로 흉내를 내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지금 여러분들 모습이. 근데 악이냐 선이냐, 잘못하는 거냐 잘하는 거냐 하는 것은 자기가 마음에 따라서, 마음을 운전하는 걸 알아야 된단 얘깁니다. 어느 누구가 잘못 살려고 하고 그럽니까, 잘못하려고 하고. 모두들 번연히 알면서도 잘못 저지르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들은 과거로부터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업보가, 수없는 갖은 각색의 업보가 다 있건만 그거를 없애는 도리가, 바로 그것이 정수에 입력이 돼서 자동적으로 나오는 거니까 나오는 걸 거기다가 되입력을 한다면 앞서 입력된 건 없어진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팔자 운명도 붙지 않는다. 살생도 붙지 않고 모든 게 다 붙지 않는다. 내가 잘못했다고 ‘내가 이렇게 잘못했으면 어, 앞으로 내 죄가 많은데 어쩌랴.’ 하지마는 이 마음의 도리를 공부하는 분들하고 기복으로 그냥 하는 분들하곤 다릅니다. 기복으로는 형상이나 이름을 보고 기도를 하고 믿고 다니지만, 그리고 거기다 살려 달라고 빌고 그러지만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거는 도깨비장난밖에 안 되느니라.” 양 무제더러도 “너는 그렇게 했기 때문에 공덕이 하나도 없느니라.” 했던 거거든요.

그러니 그저 인으로, ‘웃을 땐 웃고 웃지 않을 땐 웃지 않으면서도 인으로다가 다루고 섭섭하게 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가 바로, 나는 찾았는데 모두를 다 귀합을 시키지 못할 때는 그때는 대승이 될 수가 없다 이런 뜻이에요. 모두가 그래요. 그리고 사람이, 지금 한마음을 말입니다, 관으로 생각을 하고, 예를 들어서 좇아 들어가는데 보이지 않는 자기를 좇아 들어가면 죽으러 가는, 죽은 세상에 가니까 죽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진데 죽으러 가는 사람이 이것 참견하고 저것 참견할 수가 있나요? 그러면 죽은 세상에는 가 볼 수가 없죠. 죽어야 가 보는 데니까요. 그러니까 마음이 그만큼, 내가 곧장 그냥 길을 가야지, 그게 도의 길이건만, 가다가도 얼뜻 쉬고선 여기서 참견하느라고 산란케 굴거든요. 그러면 점점, 20년이 가도 30년이 가도 그것은 귀합을 시킬 수가 없죠.

그 귀합이라는 것도 본래 그렇게 하면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본래 진리가 그러하단 얘깁니다. 공생이며, 이 몸속에 있는 것도 공생입니다.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죠. 한 개체가 그냥 공생, 공심, 공체, 공용, 공식으로 살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한생각에 모두가 이렇게 통신이 된단 얘깁니다. 그러니깐 거기에 집착을 하지 마시고 관습에 의해서 자꾸 걱정하지 마시고 모든 거를 주인공에다 맡겨 놓고 ‘너만이 할 수 있어!’ 하고 거기다가 그냥 다 맡기세요. 그리고 감사하게 생각하면 모든 살생도 모든 잘못됨도 다 붙지 않습니다.

위패를 봉안해 놓지 않는 이유

질문 다른 절에서는 49재 동안 위패를 봉안해 놓는데 선원에서는 그때그때 소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답변 내가 항상 ‘위패를 정해 놓지 않는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살 때에 자유스럽게 사는 것과, 죽은 사람도 체가 없이 사는 도리를 알게끔 된다면, 관습과 습이 없어진다면 자유스럽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스럽게 하기 위해서 위패를 정해 놓지 않습니다, 우리는. 왜냐하면 천리만리라도 손가락 하나만 끄덕하면 다 모이는데 왜 그것을 거기다 묶어 놓고 있습니까? 그러면 공부하는 데도 지장이 있고 스님네들한테도 지장이 있고 여러분들한테는 물론이고, 그렇게 된단 얘깁니다.

그러니까 또 여러분들이 그렇게 공부를 못 하고 그런 것만 알면 연방 찰나찰나 이렇게 영령들이, 이렇게 조상님들이 댁에 들었다가도 그 도리를, 댁의 마음을 읽어 보고 가시는 거예요. 마음을 읽어 보시는데 마음이 그런 걸로다가 이렇게 접해서 집착이 돼 있으니까 똑같이 그렇게 하는 거죠. 그래서 아예 위패는 당일 해서 당일 소하고 또 고다음에 할 때 또 위패를 새로 해서 또 당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어떠한 자식들이 바깥에 나가 살거나 부모들이 바깥에 살거나 이럴 때 부모를 모셔왔으면 잘해 드리고 노비 드려서 잘 모셔다 드리는 게 자유 아닙니까. 또 부모가 찾아와서 저거 하면 노비를 줘서 잘 먹여서 이렇게 해서 보내면 되는 거지, 그 자유를 갖다 강타하고 그냥 매어 놓는다면 그 뒤 문제는 어떻게 하리까?

답답한 마음에 사주를 봤는데…

질문 사업이 위기에 처해 있어서 저의 집 보살이 답답한 마음에 사주를 봤는데 그 사업을 더 하면 안 된다고 했답니다. 그러니까 보살이 불안해하면서 저를 말리는데 저도 그 말을 듣고 나니 괜히 마음이 흔들립니다. 이럴 때는 어찌해야 좋을는지요.

답변 그거는 누가 하란다고 하고 하지 말란다고 하지 않고 그럴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마음들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권한을 모두 가지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냥 이렇게 할 수는 있죠. 보살님의 마음을 좀 편하게 하려면 그냥 하는 척하면서 그냥 모든 걸 놓고 그렇게 가는 거고, 또 그렇지 않으면 글로 가느냐, 이걸 올바르게 이렇게 믿는냐 이러고 하는 것도 댁의 마음에 들어 있어요.

모든 게 자유예요. 자유롭게 살자고 이렇게 한 거죠. 여러분들의 마음에 달렸어요. 그 마음에 달렸다는 그 문제가 그렇게 무섭고 너무나 커서 태산 같다고 했습니다. 한 생각이 태산을 버리느냐, 한 생각이 태산을 만드느냐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거죠. 그러니깐 부처님 말씀을 잘 들으시고 그대로 하신다면 우리가 편리하게 살 수 있고, 그 사주 보시는 것도 그 한마음 거기다 놓으시고 모든 거를 다, 생활할 때 모든 거, 풍기는 거 모든 거를 거기다가 관하시고 그렇게 그냥 편리하게 사신다면 차차 나아지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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