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당말 오대 송초의 선종

중국선종 시작 달마선법 ‘동산법문’
二入四行論, 소의경전 〈능가경〉
집단체제의 승단 조직 구성 시작
당 말, ‘안록산의 난’ 후 남종 공인
마조 총림 건립, 백장 청규 제정

 

중국(한나라 때)에 인도불교가 전해진 지 2천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초기에 몇 사람의 주도하에 선수행을 하는 단체가 있었지만, 정식으로 선종이 수립된 시기는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후 5백여 년이라는 시차가 있다. 따라서 선종의 역사는 보리달마를 기점으로 1500여 년이라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선종이 지나온 역사적인 발전과 과정을 몇 단계로 나누어 회고해 보고자 한다.

당대에 성립된 선종은 신수 혜능 등의 활약으로 당시 사회의 각계각층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당대 초기까지 대부분 선종은 하층민 출신의 승려들을 중심으로 유행했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문인사대부 계층에서도 선법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대 통치자들도 역시 선종의 선사들에게 예를 다해 우대를 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궁내에 도량을 설치하기도 했다. 본래는 하층민에서 유행을 하던 선종이 상층부인 사대부 및 황실로 진입을 하면서 선종의 위세는 점점 높아졌다. 이러한 정황이 당나라 초에서 당말 오대까지 이어지면서 선종은 중국불교사에 한 획을 긋는 비약적인 발돋움을 하였고, 선종이 정식으로 성립되면서 비교적 넓은 지역으로 확장 발전해 갔다. 그 과정을 중국의 불교학자인 양증문 교수는 간략히 네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최초의 단계는 당나라 때 도신과 홍인이 전승한 보리달마의 선법으로 황매산을 거점으로 유행을 했던 ‘동산법문’이며, 이것은 중국선종이 정식으로 형성된 표식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즉 보리달마로부터 오조 홍인까지를 선종 발전의 제1단계로서, 시간적으로는 대략적으로 5세기 중엽부터 7세기 중엽까지이다. 보리달마가 남방에 도착해서 소림사 소림굴에서 면벽을 하고 있을 때 선법에 대해서 관심을 갖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달마선법의 이해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위나라의 효문제(孝明帝)가 일찍이 세 번이나 보리달마를 초청한 적이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혜가는 보리달마의 선법을 계승한 유일한 사람으로, 혜가가 전법을 실행하고 있을 때, 마침 남북조시대가 내리막길로 가고 있는 때로, 북위가 멸망하고, 북주무제(北周武帝)의 훼불 등으로 불교의 발전이 매우 저조한 상태로 침체일로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혜가와 승찬도 유랑생활을 하고 있었다(물론 선종 초기에는 고정된 수행처가 없었으므로 모두 두타행을 행했다). 승찬의 법을 계승한 도신은 호북성 황매현의 쌍봉산혹은 빙무산(憑茂山)에서 제자 홍인과 함께 도량을 건립하고 선법을 수행하였으며, 일명 ‘동산법문(東山法門)’을 창립했다(이때부터 고정적인 수행처가 생겼다). 동시대에 강남지역에서는 우두법융 선사가 선법을 전파하고 있었으며, 그의 영향도 매우 컸다. 선종의 사상적 발전과정으로 볼 때, 보리달마는 ‘자교오종(藉敎悟宗)’ 및 ‘안심법문(安心法問)’을 제창했고 구체적으로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을 제시했다. 소의경전으로는 〈능가경〉을 의지했다. 홍인 대에 이르러서도 기본적으로 여전히 보리달마 선법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이 시기가 바로 선종의 초기단계로서 선종의 제1단계로 명명한다. 이 단계의 특징은 〈능가경〉의 이론을 표준으로 삼았고, 최초로 선종의 집단체제인 승단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단계로, 혜능이 홍인으로부터 법을 전수해서 남방의 소주(지금의 소관) 조계에서 선법을 전한 시기 및 신수의 제자 보적(普寂) 등이 양경(西安 落陽)을 중심으로 광대한 북방에서 전법을 왕성하게 활동을 할 때이다. 혜능의 제자 신회가 북상을 해서 북종과 선종의 정통성을 두고 다툼을 할 때와 기타 제자들이 각지에서 선법을 전파할 때이기도 하다. 즉 선종이 남종 북종으로 병립할 때의 국면을 가리킨다. 즉 신수의 제자와 혜능 및 신회 등이 활약한 시점이다. 이 시기의 선종은 대략적으로 7세기중엽부터 8세기 말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오조홍인은 여전히 전통적인 달마선 즉 ‘능가’선을 위주로 하는 선법을 시행했다. 비록 신수와 혜능 모두 오조 홍인의 제자이지만 이 두 사람이 보는 선법의 관점은 아주 큰 차이점이 존재했다. 신수는 오조 홍인과 마찬가지로 달마선법을 기본바탕으로, 단계적 수행법인 점수법을 실행했다. 반면에 혜능은 달마선법을 개선해서 〈금강경〉을 위주로 하는 선법을 펼치면서 돈오법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단계적인 수행법인 점수와 단계를 초월하는 돈오적인 수행법은 수행상에서 각기 다른 인식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고, 자연스럽게 두 개의 파벌이 형성되는 구조가 발생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러한 현상이 발생되는 것은 곧 각 집단의 이익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점수 위주의 신수선법은 북방을 거점으로 하였기에 북방선이라고 명명하였고, 북방선은 통치계급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신수 본인은 측천무후 중종(中宗) 예종(睿宗) 등 3대 황제의 예경을 받았으며, 양도(兩都, 서안 낙양)의 모든 불사를 총괄하는 통솔자가 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정치적인 예우를 받기도 했고, 황가사원(皇家寺院)에 거주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당시 혜능의 돈오법은 남방에서 유전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영남(지금의 광동성 광주)의 법성사(法性寺)에 이르러서 법문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그의 영향은 당시 북방의 신수를 따라갈 수 없었다. 당나라 개원 22년(734) 혜능의 제자 하택신회가 선종에서 거행하는 활대(滑台)의 무차대회에서 남종의 돈오법을 알리고 선전함과 동시에 북종선의 숭원법사(崇遠法師)와 변론을 통해 승리하면서 정치계급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후 하택신회 및 남종선의 지위가 북방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때의 선종은 남종과 북종을 포함한 선종이 전국적인 범위로 확장되면서 중국 전역에 영향을 준 시기이다. 즉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선종은 황매현 쌍봉산의 동산법문을 벗어나서 전국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으며, 바로 이시기를 선종의 제2단계라고 한다.

세 번째 단계로, 당나라 말엽 ‘안록산의 난’이 지난 후에 조정에서 남종이 선문의 정통이라고 선포하고, 북종은 쇄락의 국면에 접어들 때이다. 남종이 서서히 득세를 해서 마침내는 남종 천하가 되는 시기이다. 대략적으로 8세기 중엽에서 13세기에 이르는 시기이다. 혜능의 제자인 청원행사 및 남악회양이 활약한 시기에서 원대까지를 포함한다. 즉 하택신회가 필생의 노력으로 수립한 남종선(혜능선)은 남방의 강서 호남일대에서 남악회양과 청원행사 두 사람의 제자들이 온힘을 다해서 전파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비록 이 두 사람과 하택신회는 모두 혜능의 제자로서 같은 법을 전수받았지만, 남악회양과 청원행사의 선법은 상대적으로 혜능선과 하택선 보다는 비교적 더욱 다채롭고 융통성이 있었다고 한다. 즉 단도직입적이면서 간단명료하고, 개방적이면서, 기봉(機鋒, 날카로운 말), 봉(棒, 때리다), 할(喝, 소리 지르다) 및 부처님을 꾸짖고 조사를 욕하는 등의 방편을 썼다고 한다. 이시기의 선종은 이론적으로 불교내부 각파의 사상을 융합하였고, 또 유교와 도교의 사상도 회통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사상을 흡수하고 융합한 선풍의 흐름 속에서 점차적으로 위앙ㆍ임제ㆍ조동ㆍ운문ㆍ법안종이 수립되었다. 이후 양기파와 황룡파가 생겨났다. 이때 마조는 총림을 건립했고, 백장은 청규를 제정하면서 선종은 경제적 자립과 자체 계율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에 선종은 상당한 세력을 가졌지만, 당나라 말엽 오대 송초에 이르러서 점점 쇄약해지기 시작하였다. 또 이 기간에는 공안선이 유행을 했다. 이시기를 선종의 제3단계라고 한다.

네 번째 단계는 당무종이 훼불한 후의 당나라 말과 오대시기를 가리킨다. 선종의 오종(五宗, 五家)이 성립된 시기이다. 물론 이 네 가지의 관점은 학자마다 약간의 이견이 존재한다.

그림, 강병호

선종은 비록 기타 종파와 같이 판교의 이론은 없었지만, 다만 선종이 흥기한 후에는 스스로 기타 종파와 비교를 시작하면서 선종 스스로 우월성을 강조했다. 물론 기타 종파들이 수용한 것은 아니지만, 선종이 크게 유행을 하자 그러한 관점은 점점 더 완고해져 갔다. 선종은 ‘宗’이라고 자칭하였고, 기타 제종파를 모두 ‘敎’라고 칭하였고, 제종파를 싸잡아서 ‘교종’이라고 폄하하였다. 선종이 선종의 우월성을 내세우는 논리는 이러하다. 선종은 위로 부처님 법을 전승한 유일한 전승자로서, 선법의 내용은 ‘佛心’ 혹은 ‘心地法門’이라고 했다. 신회는 “육대조사가 이심전심으로 문자를 여의었고, 위로부터 서로 전승하였다.”고 했으며, 〈고전숙어록(古尊宿語錄)〉에서는 “비로소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아는 것은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다. 언설에 있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벽암록〉에서도 “이른바 교외별전은 오직 심인(心印)을 전해서 직지인심 견성성불하는 것이다.”고 했고, 〈치문경훈〉에서도 “고로 달마가 서쪽에서 와서 문자를 세우지 않은 것은, 직지인심 견성성불하기 위함이다. 이른바 교외별전은 교 밖에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의 도리로서 오직 이 마음을 밝히는 것이며 교상(相)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이러한 내용은 모두 선종의 우월성 내지 교종을 폄하할 때 사용하는 전문 어구들이다. 이러한 어구들은 선종이 유행을 하면서 아무 비판 없이, 즉 펙트 체크 없이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전해져 온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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