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절차가 잘되어 있어야 외부의 절차가 다 잘된다

하는 것도 자기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아침저녁 자고 깨는 것도 실감 나지만 우리가 흩어졌다가 모이는 것도 실감 나죠. 허허허…. 이렇게 흩어졌다가 모이는 것도 일종의…, 우주 자체도 그렇게 흩어졌다가 모이고, 모였다 흩어지고 하는 작용을 쉴 사이 없이 하거든요. 먹고살기 위해서, 가정생활 속에서 내 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회 또는 내가 살고 있는 그 자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생각해 보지도 못하면서 살아나가는 수가 많습니다. 자기 죽을 날도 생각하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서도 죽을 날은 생각지 않죠.

이 몸 안의 의식들이
내마음 채찍의 다스림에 따라 나가서마음도 조절하는데
나쁘게 조절하느냐, 아주 좋게 해결사로서 조절하느냐

요새 난 ‘여러분이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부자유하게 살고 있구나.’ 하는 거를 생각할 때 너무나 딱해서 기가 막힐 때가 많아요. 참,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창살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창살 속에서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면서 구속을 받고 살고 있나. 자기 마음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우리가 폭넓게 생각을 해 보십시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체 천차만별의 사생(四生)들, 그 모두가 어떻게 살고 있나. 천차만별의 사생들이 모두 자기가 살아온 습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왜 벗어나지 못할까요?

한 가지 예를 한번 들어 봅시다. 연어인가, 은어인가? 하여튼 왜 그것은 자기가 태어난 자리를 떠나서 세상천지를 돌아다니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서는, 자기 모습을 형성해 놓고 자기는 없어지는 그러한 역할을 벗어나지 못하고 쉴 사이 없이 하게 될까요? 사람이라고 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우리의 모습들로 인해 먹히고 먹고 살아온 그 습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습이 쉴 사이 없이 반복되는 반면에, 누적이 되고 누적이 되고 그래서, 하여튼 그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려고 한 번도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왜 그대로만 따라갈까요? 그대로 따라가더라도 우리 마음은 발전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마음의 발전이 있어야만이 우리의 삶도 발전이 생기고, 또는 발전이 생기는 반면에 창조력이 생기고, 창조력이 생기면 물리가 터지고, 물리가 터지면 지혜로워지죠, 마음이 넓어지고. 그래서 우주 천지를 곳곳마다 심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자유스러운 사람이 되죠.

그렇다면 어떻게 넓게 봐야 하나. 첫째, 우리가 공기주머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죠. 그 사실만 알아도 그것은 아주 폭넓게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알고만 있어서도 안 된다고 했죠. 항상 얘기하는 것처럼 마음은 체가 없으니까 과거 현재 미래를 한 찰나에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고 행할 수도 있다. 삼천 년 전을 지금 현재에 일 초로 갖다 놓을 수도 있다. 미래를 일 초로 갖다 놓을 수도 있다. 이것은 못을 박아서 ‘미래의 어느 때에 이렇게 갖다 놓을 수 있다’ 이런 게 아니고, 시공을 초월해서 멀고 가까움이 없이, 또 가고 옴이 없이 자유롭게 가고 옴을 말하는 거죠.

이 모든 도력이 어디서 생기나. 마음이 폭넓고, 폭넓은 그 무리들이 사는 그 가운데에 바로 나도 더불어 함께 한마음으로 지금 생활을 하고 있는데, 나를 형성시킨 놈이 어떤 놈인가? 내가 나를 형성시켜서 지금 끌고 다니는데, 물론 혼자는 할 수 없어서 어느 부부를 등장시켜서, 정자 난자를 빌리고 몸을 빌려서 형성시키는 겁니다. 벌레가 나무를 의지해서 자기 몸뚱이를 붙들어 매서 진화를 시키는 것처럼, 우리는 기대지 않고는 못 살아요. 그래서 항상 여러분한테 해 드리는 말이 ‘공생(共生), 공심(共心), 공용(共用), 공체(共體), 공식화(共食化)하고 돌아가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먼 데로 가서 공부를 하겠다, 산으로 올라가서 공부를 하겠다, 홀로이 앉아서 공부를 하겠다 이런 것은 아주 어긋나는 일이죠.

어떤 선지식께 제자가 이런 말을 했다죠. “분주하고 시끄러워서 저는 도저히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산으로 올라가서 토굴을 묻고 살겠습니다.” 하니까 “그러면 너는 지금 곧바로 가되 길을 딛지 말고, 남이 짜 준 옷을 입지 말고, 남이 농사지은 밥을 먹지 말고, 남의 물을 먹지 말고 남의 땅에다가 오줌도 누지 말라. 그리고 남이 농사지어서 지붕을 만든 건데 그 지붕 밑에서 어떻게 자느냐? 남들이 다 해 놓은 데서 너도 더불어 같이 살면서, 더불어 같이 사는 너의 모습과 너의 생명과 너의 아픔을 다 버리고 무슨 공부를 한다고 하느냐!”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떠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뜻을 그때서야 알고 ‘어허! 이게 모두가 한도량이구나!’ 하고 가는 바도 없고 오는 바도 없이 공부를 했더랍니다.

그런 거와 같이, 이걸 말로 꼬집어서 어떻게 다 하리까? 말로 해서 마음이 승화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말로 꼬집어서 다 할 수가 없어요. 비밀문서라는 것이 정신세계의 비밀이니까요, 전부. 우리가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 것도 비밀이거든요. 예전에는 모습을 가지고 축지법을 했지만 정신계의 축지법이 지금 시점에는 필요하니까요. 지금은 정신을 먹고 살고, 정신을 잡아먹느냐 정신을 뺏기느냐 하는 문제들의 싸움이라고요. 지금 구순히 사는 것 같지만 전체가 전부 싸우고 있는 거죠. 이런 싸움을 안 하고 어떻게 평등하게 공법으로 대치를 해 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모두가 내 몸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고, 내 형상 아님이 없는데 모든 거를 밟고 먹고 이렇게 사는 것이 어떻게 인간의 도리를 다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법은 없을까? 그래서 삼천 년 전에 부처님께서 그 뜻을 일러 주셨고 지금까지도 일러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도리를 깨달았다 해도 각각 있는 게 아니에요. 이 도리를 자세히 들으세요. 마음은 체가 없어서 깨달은 사람들의 마음이 아무리 많이 마음을 통해서 들어와도 두드러지지 않고, 여러 부처님들의 마음이 여기를 통해서 바닷물 내놓듯이 다 내놔져도 줄지 않아요. 이렇게 광대무변하고 묘한 도리가 우리들에게 다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도 관습에, 습에, 인연줄에 매달려서 그냥 꼼짝을 못 하고 있는 거예요. 한 식구, 부부, 자식이다 할지라도 그 자식들의, 부부의 몸을 붙들고 매달리지 말고, 만약에 그 마음을 둘 아니게 놓고 슬기롭게 굴린다면 몸은 저절로 붙들어지고, 사랑은 저절로 화(化)해서 자비의 정이 되어서 뗄래야 뗄 수 없이 이어져 가면서 더불어 하나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묘법이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어떡하면 요것을 요리를 잘해서 잘 먹여서 그 맛을 알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도무지 쉽지가 않고 땀이 부쩍부쩍 나잖아요. 왜 그러냐 하면 지구에 붙어서 사는 사람 벌레는 화해서 한 발을 떼어 놔야만이 이 공기주머니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그래야만이 자유자재할 수가 있고, 그래야만이 내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가 있는 평등봉에 같이 한자리를 할 수 있어서 여래 자리라고 하죠.

우리가 옷을 벗었다고 해서, 이 모습을 벗었다고 해서 죽는 게 아니에요. 옷을 벗으면 자기 차원대로…. 아니, 내가 테레비를 보니까요, 배를 갖다가 놓고, 같은 배인데도 크고 작은 것을 가리려고 기계에 넣고선 굴러 떨어지게 합디다.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큰 것은 큰 것대로 굴러 떨어지게 해요. 그렇게 해서 같은 배건만 크고 작은 걸 가려내더라고요. 그러고는 작은 건 작은 것대로 큰 것은 큰 것대로 중간 것은 중간 것대로 놓고 팝디다.

그러니 천차만별의 그 모습들을 죄들 각각 놓고 우리가 경쟁을 하고 있는 거죠. 바로 여러분이 살아온 습, 그 습으로 인해서 오는 인과, 인연에 따라서 인과가 되는 거니까, 그것이 업이 되는 거죠. 이게 악업이 되느냐 선업이 되느냐. 사랑을 하다가도 어떠한 문제 때문에 헤어지면 악업이 되죠. 선업이 그냥 순간에 악업이 돼 버리고 말죠.

그러니 이 악업 선업이라는 자체가 어디에 있느냐? 여러분은 짐작도 못 하실 겁니다, 아마. 여러분 몸뚱이 속에 다 들어 있어요. 가지각색의 모습을 해 가지고, 의식을 가지고, 하나도 벗어날 수가 없는 그 업식의 굴레에서 그냥 그대로…. 컴퓨터에 넣으면 그대로 나오듯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 업식이 딱, 아주 기정사실로 들어 있거든요. 그렇게 뺄래야 뺄 수 없고, 끼울래야 끼울 수 없이 그대로 입력이 돼서 그렇게 나오는 것을 팔자 운명이라고 하죠. 그리고 영계성, 세균성, 윤회성, 업보성, 인과성 이 모두가, 거기에 속해서 나오는 것이 전부 몸 안에 들어 있어요. 부인 못 할 겁니다, 아마.

그래서 나로부터 이 세상이 벌어졌고, 나로부터 상대가 생겼고, 나로부터 업식이 있는 거니까 내 탓으로 돌리라고 하는 거죠. 묘한 거는, 과거에도 이렇게 살았다는 겁니다. 과거에도 이렇게 살았어요. 인과라든가 유전성이라든가, 세균성, 업보성 또는 영계성까지도 모두 종합해서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인과가 되는 거죠. 그래서 자동적으로 입력이 된 겁니다.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가 없어요. 입력이 된 대로 여러분을 지금 이끌어 가고 있죠. 그런데 말입니다, 아주 한 치도 벗어날 수 없게 녹음이 돼서, 입력이 돼서 나오도록 되어 있는데, 사실 그대로 입력이 돼서 나와요.

그런데 이 입력된 것을 어떡하면 없앨 수 있을까?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입력이 된 데다가 되입력을 하면 앞서 입력된 것은 없어지는 것 아니에요? 그렇죠? 그러니까 그렇게 빨리 인식이 되고 동감이 될 수 있도록 얘기해 드리는 겁니다, 지금. 그러니까 그 속에서 그냥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나오는데 거기에 말려서 그것이 습성으로 돼 버리고 말았죠. 그렇게 모두 살아나가고 있죠. 그런데 “그 자리에다가 믿고 되놔라. 제 나무는 제 나무 뿌리를 믿어야 되느니라.” 했습니다. 제 나무는 제 뿌리를 믿어야 수분과 에너지를 흡수해서 모두 올려보낼 수 있어서 나무가 푸르르게 살 수 있는 것이지 남의 뿌리, 남의 나무를 믿고 잘 살게 해 달라고 아무리 빌어도 그건 기복이며, 그건 이익이 하나도 가지 않는 것이며 공덕이 될 수가 없죠.

천체가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이 진리를, 하나로 묶여서 더불어 같이 돌아가고, 같이 살고, 같이 말과 마음이 이어지고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바로 여래라고 하죠. 그리고 공덕이라고 하고요. 일을 할 때에 한 사람이 하는 것도 있겠지만, 문제가 생기면 거기에 관여가 된 사람들은 전부 모여야 해결이 돼요. 모이지 않곤 혼자 해결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더불어 같이 모여서 공동 분담으로 해결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주인공’입니다. 주인공! 우리가 공(空)해서 전체가 다 이어져서 돌아가니까, 내 주인을 근본으로 치고 그 내 마음의 주인으로 인해서 모두 보풀어져서 더불어 같이 돌아가는 그 자체를 주인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몸뚱이 속의 모든 중생들이 의식들을 꼭 그렇게 가지고 있으니까, 이 몸뚱이가 배라면 내 마음의 선장이 그 자생 중생들을 다 태워 가지고 지금 다니는 거거든요. 이 배에 탄 중생들은 다 선장의 그 마음을 따르게끔 돼 있거든요. 즉 말하자면 그 마음의 선장에 따라 질서 있게 행동과 작용을 하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악하게 “어휴! 저놈을 죽였으면 좋겠다.” 하면 이 안에서도 ‘저놈 죽였으면 좋겠다.’ 하니까, 그쪽으로 음파가 그냥 가 버려요. 그래서 그쪽에서도 그냥 더 마음이 부풀어지면서 ‘두고 보자.’ 하게 또 만들거든요. 그러니까 이 몸 안에서 의식들이 내 마음 채찍의 다스림에 따라 나가서 마음도 조절하는데, 나쁘게 조절하느냐, 평화스럽고 아주 좋게 해결사로서 조절을 하느냐 하는 것도 자기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이건 기정사실이에요.

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의식을 가지고 있고 천차만별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또 악업, 선업의 천차만별의 업을 가지고 있으니까 거기서 하나하나 나오는 대로 ‘으음, 거기서 나온 거니까 거기서 해결할 수 있잖아!’ 하고 거기다가 놓아야죠. 그러면 통신이 돼서 다 결정이 되지만, 그렇지 않고 자꾸 바깥으로 끄달리고 자꾸 생각을 하게 되면, 그 생각에 의해서 작용을 해 주거든. 오늘은 요런 자세한 말을 하기 위해서 내가 이렇게 얘기를 하게 되는군요.

그러니까 하시라도 마음을 넓게 가지면서 거기다가 놓으세요. 만약에 꿈을 꾸었다든가, 상대가 어떠한 문제로 인해서 잘못돼 돌아갈 기미가 보인다든가, 나를 그냥 꼭두각시로 만든다든가, 또는 적대시한다든가 이런 문제들이 허다할 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될 기미를 알게 되면 ‘너만이 그렇지 않게 할 수가 있잖아! 그 마음들과 둘이 아니게 내 마음으로 쓸 수 있게끔 너만이 할 수 있잖아!’ 하고 모든 것을, 신호를 거기다 맡겨 놓을 때에, 이건 의학적이기도 한데, 대뇌를 통해요. 그리고 그다음에 소뇌를 통하고 중뇌에서 결정을 지어요. 결정을 짓게 되면 하달이 돼요. 사대(四大)로 통신이 돼요. 통신이 돼서 제각기 소임을 맡아 가지고 그때는 뛰는 겁니다. 가만히 있는 게 아니에요. 안과 밖으로 다 뜁니다. 그래서 내면의 절차가 다 잘되어 있어야 외부의 절차가 다 잘된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안에서 깨진 바가지가 바깥에 나가면 새지 않느냐는 속담이 있죠. 그러니 내 안에 들어 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의식이 바로 내 주인이자 내 하인이고, 내 육체가 또 그네들의 주인이자 바로 심부름꾼이고, 관리인이자 집합소가 되죠.

그러니까 더불어 같이 사는 거지, 개별적인 혼자가 없어요. 모두들 살아나가는 데 내가 했고, 내가 살고, 내 것이고…, 이러는데 천만의 말씀이에요. 내 것이 없다면 바로 욕심이 다 떨어지는 겁니다. 보세요. ‘내가 벌어 놨다’ 하면 그게 조금만 없어져도 그냥 안타깝고 그렇지만 ‘더불어 내 거다, 더불어 한마음의 거다’ 한다면 가지고 다녀도 무겁지도 않고요, 도둑맞을 일도 없고요. 하하하…. 또 생짜배기로 돈이 나가지도 않을 거고요. 모두의 돈이라고 그러는데, 더불어 같이 공유하는 돈이라고 그러는데 어떻게 생짜배기로 나갑니까? 그러나 내 거라고 그런다면 무슨 핑계를 대더라도 이놈의 돈이 나가거든요.

그러니 오늘은요, 여러분이 허심탄회하게 질문들 하시길 바랍니다. 질문하다 보면 세세한 것도 그 속에서 나올 수 있으니까요. 우리가 세계적으로 볼 때도요, 전부 상대를 놓고 기도를 하게 만들어 놨고, 전부 상대를 놓고 하고 있죠. 참, 그것도 기적이지. 어떻게 그렇게 상대를 놓고 빌게끔, 기도하게끔 만들어 놨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에요. 자기가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그 사실을 안다면…, 이건 누가 대신해 줄 수가 없어요. 집 안에 들어가서도 말 못 할 일이 생기고, 말도 못 하고 자기 혼자만이 알고 있어야 하는 일들이 한두 건이 아니죠. 남을 위해서도 그렇고…, 모든 일에 다 그렇지요. 혼자 먼 산 보고 울어야만 하고, 자기 혼자 새겨야 하고, 혼자 참아야 하는 일들이 건건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래서 올 때도 혼자 왔기 때문에 갈 때도 혼자 가야죠. 그런데 내가 가르치는 건, 혼자 온 것이 없기 때문에 혼자 갈 것도 없다 이런 말입니다. ‘우리의 삶이 영원하다’ 하는 것은 아까도 얘기했듯이, 자기가 태어난 그 자리에 다시 와서 자기를 다시 형성시켜 놓고 자기는 옷을 벗듯이 그냥 벗어 버리는 거니까 영원히 사는 거지요. 우리가 죽었다, 살았다 하는 것이 바로 저녁이면 잠자고 아침이면 깨고 이러는 거와 같은 겁니다. 말씀하세요.

질문자1(남) 우리 불자들이 어디를 가거나, 혹 절 앞을 지날 때에는 불전에 참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이때에 어떠한 마음을 내어야 합니까? 부처님도 내 한마음에 계시며 바로 나의 실상이니 주인공에 감사해야 되는지요, 아니면 부처님께 ‘원력을 주십시오.’ 하는지요. 참배를 하면서도 주인공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요. 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그게 간단해요. 만 개의 사찰을 돌아다닌다 하더라도, 그 만 개가 단 하나도 없어요. 거기 가서 참배를 올릴 때, 내가 그랬죠? 이 법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법당에서 참배를 올릴 때 왜, ‘일체제불의 마음’이라는 노래 있죠? 그와 같습니다. 즉 말하자면 저 형상이 내 형상이요, 저 마음이 내 마음이요, 저 생명이 내 생명이니 둘 아니게 ‘주인공’ 하면 전체가 모두 하나로 돼 버립니다. 그러니까 그저 어디를 가셔서 참배를 올리든지, ‘주인공!’ 하면 그냥 그 부처와 나, 일체가 다 하나가 돼 버리니까요. 주인공에 감사히 생각하고 하면 그대로 그 부처님 마음도 거기에 함께 하게 돼 있습니다. 그게 비밀이죠. 하하하….

질문자1(남) 식사를 할 적에는 합장을 하는데 이럴 때는 주인공과 더불어 감사하는 마음만 가지면 되는지요.

큰스님 예. ‘주인공’ 하면 나와 더불어 주인공이지 개별적인 주인공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식사를 한 그릇 먹을 때에 혼자 먹습니까? 아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러 생명들이 같이 먹습니다. 그렇죠? 지금 이 몸속에 내가 얼마나 많이 들어 있습니까? 그러니 내가 밥 한 그릇을 먹어도 공식(共食)하고 있죠? 그런데 그 밥 한 그릇이 또 뭡니까? 농사지은 사람, 밥 지은 사람, 뭐뭐, 전부 거기 손길이 갔으니 모두 한데 합치면 전부 공식이에요. 그러니 공식했다는 것은, 즉 말하자면 공양(供養)입니다. 공양! 그래서 “공양을 올려라.” 이럽니다.

어느 한 부처님에게 올리는 게 아니고 우주 삼라만상 전체에 한 그릇으로 공양을 올리고도 그 한 그릇은 되남더라 하는 겁니다. 되남아서 또 올리고, 먹어도 또 남고, 또 먹어도 또 남고 이렇게 되풀이되는 끊어지지 않는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혼자 먹어도 공양입니다. 그래서 공양! “공양하셨어요?” 이러죠, 절에서? “밥 먹었소?” 이러지 않고 “공양하셨어요?” 이러죠?

질문자1(남) 공부는 많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끌고 다니는 것도 바로 주인공, 당신이 끌고 다니는 것이지. 이 고통 주는 것도 다 당신이 하는 것이지.’ 이렇게 믿고 해도….

큰스님 ‘당신이 하는 것이지.’ 해 놓고 뒷마무리가 없으면 안 되죠. ‘당신이 한 거니까 당신이 해결해야지! 당신이 구정물이 나오게 했으니까 당신이 새 물이 나오게 해서 쓸 수 있게 해야지!’ 하는 그 대치가 있어야죠. 똥을 다 누고 밑을 씻어야만이 개운하고 깨끗하죠? 그와 같은 겁니다. 형제 법우님들이 공부가 부진해 가지고 내가 한 번 더 이렇게 만남을 갖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열심히 하셔야죠. 나는요, 사실은 여러분이 자고 있을 때도 그대로 자는 게 없고, 낮에도 여러분 못지않게 일하고 있습니다. 한시도 쉬는 사이가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생각을 깊이 좀 하세요.

질문자2(남)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장문의 편지로 큰스님께 올렸습니다. 단 제 마음자리가 아직 부족해서 뭔가 좀 부족하고, 요새 말로 좀 튀는 것 같습니다. 일이 잘되면 그걸 진득이 참고 있어야 되는데, 마음보다 몸이 앞서고 몸보다도 마음이 앞서고 그래서 좀….

큰스님 아니요! 이런 묘법이 있어요. 말을 해도 함이 없이 하고 또 행을 하되 함이 없이 행을 한다면 그 비밀이 아무 데도 누설되지 않아요. 사람이 내놓는 것만 알지 들이는 것을 모른다면 아니 되듯, 내놓고 들이는 것이 모두가 철두철미해야 되겠죠. 그렇기 때문에 이 음파라는 것은 여기에서 달나라를 가도 그냥 요기서 저 문 밖에 통신이 되는 거나 똑같아요, 두루. 정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내가 말하는 게 아니야!’ 하면 그건 누설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함이 없어!’ 그렇게 알고 있다면요.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3년 11월 7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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