팻 슈타이어의 폭포

팻 슈타이어.
Dragon Tooth Waterfall, 1990, 캔버스에 유채, 234 x 337 cm팻 슈타이어
Smaller Yellow on Blue Waterfall, 1992, 캔버스에 유채, 305 x 213 cm

잔잔한 연못에 비친 파란 하늘과 물결에 반짝이는 아침 햇살이 문득 삶에 대한 작은 경이감을 불러 일으키듯, 어떤 순간 우리에게 다가오는 물의 심상은 때로는 인간의 내면에 깃든 정서를 일깨운다. 물은 생명과 창조의 근원적 상징이며 시간의 흐름, 변화와 사멸 그리고 부활과 재생의 메타포이다.

커다란 화폭에 물이 흘러내린다. 어두운 배경에서 돌출된 빛나는 흰 물줄기는 무언가에 부딪쳐 무수한 포말과 물방울을 만들어 내기도 하며, 마치 화폭을 벗어나 아래로 끝없이 떨어질 것처럼 느껴진다. 평면인 화폭에서 공간감을 자아내는 기법은 전통적으로는 르네상스 이래 알베르티가 고안한 투시원근법이나 여타의 방법이 있지만, 팻 슈타이어(Pat Steir, 미국, 1940~)의 작품 〈폭포 Waterfall〉에서는 배경의 무겁고 정적인 어둠에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역동적이고 빛나는 물의 움직임의 대조를 통해 감상자로 하여금 신비한 깊이감을 불러 일으킨다.

우연이 만든 변화 중시
자유로운 무위의 ‘도’ 구현
변화 해방감·자유의 감각 전해

팻 슈타이어의 그림은 많은 현대 추상화 작품과는 달리 우리들에게 익숙한 느낌을 준다. 현대 많은 작가들은 일상의 시각적 경험에서 인지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식별 가능한 형태보다는 인간 정신에 내재하는 추상성과 정신성에 주목한다. 현대 미술의 흐름에 익숙하지 않은 감상자에게는 이러한 그림들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생경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슈타이어의 그림은 추상표현주의의 기법과 맥락을 같이 하면서도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사물에 대한 친숙한 이미지를 불러 일으킨다.

팻 슈타이어는 유대계 러시아인 이민자 집안의 장녀로, 1940년 미국 뉴저지주의 뉴어크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실크 스크린 기술자, 윈도우 디스플레이, 네온사인 디자인 등의 일을 했지만, 여건만 되었다면 아버지도 예술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슈타이어는 회상했다. 그녀의 기억으로는 자신은 5세 때부터 예술가가 되거나 시인이 되기를 꿈꿨다고 한다. 슈타이어는 성장하여 예술 분야에서 유명한 뉴욕의 프랫 인스티튜트 (Pratt Institute)에서 그래픽 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 판화, 타이포그래피 등을 공부했고 거기서 예술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슈타이어는 학창시절 필라델피아 미술관을 자주 찾았다. 전시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들고 다니던 책과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옆에 내려 두고, 반쯤 베어 먹은 사과까지 바닥에 놓아 둔 채 전시된 그림에 몰입했다고 한다. 그녀의 기이한 행동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미술관 경비원은 늘 “여기서 이러면 안됩니다. 나가요”라고 이야기했는데 알았다고 나갔던 그 학생은 이내 다시 돌아와서 여전히 그러고 앉아있었다. 이러한 일을 계속 반복하다가 결국 경비원은 “아이구, 또 왔네… 할 수 없군!”하며 포기했다고 한다.

이처럼 젊은 시절의 그녀는 다분히 고집스러운 기질이 있었고, 때로는 페미니스트적인 경향과 결부되어 언급되기도 한다. 물론 슈타이어가 당시 페미니스트 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기 보다는 화가로서 최초로 그린 그녀의 자화상과 그에 관한 다수의 인터뷰 때문이기도 하다.

폴 세잔의 영향을 담고 있는 여성 누드 자화상은 작가 자신의 설명에 따르자면, 일종의 ‘투쟁의 기록’이다. 20세기 중반의 미국은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은 분위기였고, 그러한 상황에서 젊은 여성 화가가 느끼는 정신적 갈등은 적지 않았으리라. 팔이 뒤로 젖혀져 묶인 여성의 누드에서 아랫배(자궁을 상징하는)에는 신비한 불꽃이 묘사되어 있다. 최근 인터뷰에서 슈타이어는 그 그림을 “물감 자국의 느낌, 매끄러운 물감 자국, 거친 물감 자국의 느낌, 이것은 싸우면서 자기의 길을 헤쳐나가는 여성의 그림이며, 작가로서 나의 흔적을 남기기 위한 강한 욕구”라고 이야기한다. 이어서 그녀는 “지금 시대(1940~50년대)에는 여성은 가정과 직업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둘 다 가질 수는 없어요. 그 불꽃은 세상에 발을 내 딛고 홀로 직면하여 자신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려는 충동과 ‘정상적’이고 수용 가능한 보통의 여성이 되고자 하는 욕망 사이의 투쟁”이라고 증언한다. 상징으로서의 이미지를 탈피하여 캔버스 위에 여러 겁 덧칠되어 교차된 물감의 질감들이 자유롭게 뿜어내는 뉘앙스에 귀 기울인다. 그녀는 어떤 구체적 이미지 벗어나 비로소 끝없는 생성되는 이미지의 세계를 만난다.

슈타이어의 작품 세계에서 전환점은 브뤼헐 연작(1982-1984)이다. 바니타스(Vanitas) 회화는 16세기 중, 후반에서 17세기에 이르는 바로크 시대에 성행했던 미술 사조로 삶의 덧없음을 일깨워주는 정물화 그림들이다. 얀 브뤼헐(Jan Brueghel the Elder)은 정물화로 알려진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로, 당시 네덜란드의 민속을 주제로 한 우화적인 그림들을 남긴 바로크 시대의 대가인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the Elder)의 아들이다. 아름다운 꽃은 언젠가 시들기 마련이고, 건강한 젊은 육체는 세월이 흘러 늙고 병들어 결국 해골만 남는다. 바니타스 회화에서는 꽃과 해골이 흔한 소재로 쓰인다.

슈타이어의 〈브뤼헐 연작〉은 어떤 의미에서 크로스워드 퍼즐(글자 맞추기 놀이)과 유사하다. 3점의 작품 가운데 가장 큰 것이 가로 8개, 세로 8개 총 64개의 그림 조각의 격자 형태로 만들어진 이 연작은 하나하나의 화폭이 제각기 다른 스타일로 그려져 있다. 어떤 그림 조각을 보면 전통적인 정물화의 기법을 읽을 수 있는 반면, 다른 그림 조각에는 인상파적인 필치가 전해지고, 또 다른 곳에선 마크 로스코의 색면 추상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면서 전체적으로는 거대한 하나의 바니타스 작품이 된다.

6미터에 달하는 엄청나게 큰 그림을 하나의 캔버스에 그리는 것은 과거에 비해 20세기의 기술 수준으로는 어렵지도 않고 값비싼 작업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고 수많은 사각형의 화폭으로 이루어진 격자 형태로 작품을 제작한 것은 피에트 몬드리안 이후 이어진 모더니즘, 기하학적 추상 및 개념 미술에 대해 던지는 하나의 질문이었다. 바니타스 회화의 여러 상징들처럼 슈타이어의 마음 속에서는 그 시대에 유행하던 추상 미술, 개념 미술들의 사조는 이미 퇴색하고 박제화된 그 무엇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시기에 슈타이어는 수묵화를 비롯한 중국 예술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서양 회화에서 그림은 화가가 붓으로 화폭의 모든 부분을 칠하고 묘사하며 다듬어 가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동양의 수묵화는 용묵(用墨)의 방법에 따라 먹과 물, 그리고 종이 또는 천 스스로의 자연스러운 성질에 따라 흐르고, 번지고, 심지어 먹물이 흩뿌려지고 스며들며 그림이 완성된다. 슈타이어는 중국의 수묵화를 통해 깨달은 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중국의 문인화, 그리고 남송(南宋) 시대의 도자기, 여러 그림들을 보면서 나는 그림을 그리는데 반드시 붓을 사용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되었어요.”

특히 호방한 붓질로 특징 지워지는 일품(逸品)화풍 수묵화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슈타이어는 화가로서의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폭포 waterfall〉 작품군을 시작하였다.

살짝 기울인 캔버스의 상단에 물감을 듬뿍 묻힌 붓을 사용하여 가로로 칠한다. 그러면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감의 흔적이 다양하고도 불규칙적인 리듬을 만들어내며 스스로 그림을 완성한다. 붓을 사용하는 대신 물감이 든 통으로 직접 캔버스에 물감을 뿌려서 흘러내리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작품의 제작은 간단하게 생각되지만 그 결과 얻어지는 이미지는 매우 풍부하고 복합적이며 보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시각적 상상을 불러 일으킨다. 물론 얼핏 단순하게 보이는 이러한 작업에도 작가 자신의 독특한 기획과 디자인, 그리고 작가의 오랜 작업 과정에 따른 고도의 숙련성과 심미안을 필요로 한다.

팻 슈타이어는 우연성을 회화 작품에 도입했다는 측면에서 추상표현주의의 대가인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액션 페인팅을 떠올리게 하지만, 슈타이어 작품의 본질은 우연성 그 자체보다 우연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변화와 흐름을 중시한다. 화가의 영혼과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은 하얀 캔버스가 조우하는 순간을, 잭슨 폴록은 즉각적인 내적 충동과 우연의 산물로 빼곡히 채운다면, 슈타이어는 자신의 붓끝을 떠난 물감들이 스스로 흘러내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미지를 형성하도록 기다린다. 이런 점에서 슈타이어는 잭슨 폴록보다는 조용하고 명상적인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의 작업방식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슈타이어 자신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림이 스스로 그림을 그리도록 내버려두는”, 말 그대로 ‘과정의 예술’이다. 슈타이어의 작품에서 마음의 모든 것을 잊어버려 허(虛)에 이르는 장자의 심재 좌망(心齋·坐忘)의 상태와 무위(無爲)의 경지에 대한 체험을 엿보게 된다.

1980년 만년의 존 케이지를 만난 일이 펫 슈타이어의 작품 세계에 〈폭포〉와 같은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 일으킨 동기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존 케이지는 당시 전위 예술의 선구자이며 작곡가였으나 전통 조형예술의 쟝르인 페인팅과는 직접적인 관련을 찾기 어렵다. 화가인 슈타이어가 존 케이지에게서 받은 영감은 도가(道家)의 노장사상과 선불교(禪佛敎)의 정신세계였다. 8년 후 케이지는 작고했지만, 그에게서 받은 정신적 유산은 슈타이어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자연, 인간 그리고 우주의 조화를 추구하는 티벳 철학과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무위의 도가 사상은 그녀의 작업세계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쳤다.

슈타이어의 작업에는 작가와 캔버스 사이, 치밀한 긴장과 집착 사이 조용한 여백이 빛난다. 두터운 붓질, 격렬한 액션,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인위적인 세부 묘사들은 슈타이어의 작업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둡고 건조한 배경에 묽게 희석한 물감이 자연적인 흐름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릴 뿐이다. 슈타이어는 한 인터뷰에서 “모든 작업은 탐색과 실험의 과정입니다. 나는 작품에서 완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물감이 흘러가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 작품의 완성을 위한 모든 집착을 버리고 시간의 흐름에 맡기는 슈타이어의 작업에서 에고를 벗어나 텅 비어 충만한 마음의 실체를 바라보고, 매 순간 마주하는 무한한 삶의 신비를 만난다.

사물은 고정된 상태로 머물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그리고 삶에는 단 하나의 정답도, 확고부동한 진리도, 고정된 실체도 없다. 우리는 때때로 그 예측 불가능함을 형벌처럼 견뎌야 한다. 아마도 변화에 대한 두 가지 태도, 즉 불안감에 휩싸여 변화를 거부하는 방식과 변화를 통해 일종의 해방감과 더불어 자유를 느끼는 방식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적극적으로 알지 못함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러한 자각 속에 기꺼이 머물겠다는 의지를 통해 불가지성과 지혜로운 관계를 맺는 한 가지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이러한 선택 과정은 우리를 삶의 그 고정되지 않은 무상의 측면을 통해 살아있음의 생생함과 눈부신 환희로 이끈다.

무심에는 일체의 마음이 없다.

여여한 바탕 그대로여서

안으로는 나무나 풀과 같아 동요함이 없고

밖으로는 드넓은 허공과 같아

막히거나 걸리는 경계가 없다.

여기에는 일정한 시공도 모습도 없고

얻거나 잃을 것도 없다.

(無心者無一切心也 무심자무일체심야) (如如之體 內如木石 不動不搖 여여지체 내여목석 부동부요) . (外如虛空 不塞不킟 외여허공 불색불애) (無能所 無方所 無相貌 無得失 무능소 무방소 무상모 무득실)

황벽선사(希運:?∼850) 〈傳心法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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