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 오늘은 식물에 대한 문제, 요걸 잠깐 거론하려고 합니다. 식물들이 꽃이나 나무만 식물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일체의 반 이상 소유하고 있고 또는 나중에 대의적으로 본다면 전체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먹고 사는 것도 전부 식물에 관한 건입니다. 지금 여기 있는 것도 종이 하나하나가 전부 식물이요, 이 나무 하나하나가 식물입니다. 쌀도 식물이요, 밀가루도 식물입니다. 하나서부터 열까지 모두가 식물 아닌 것이 없으리만큼 돼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식물을 가꾸기도 하고 먹기도 하고 이러는데 우리는 연쇄적으로 공식하고 있다는 그 점입니다.

모든 거를 둘로 본다면 끄달리게 돼 있습니다
먼지 하나 될까 말까 하는 그 마음의 불씨가
온 우주를 덮고 우주를 밝힐 수 있다.

그런데 여러분이 왜 그 업에 의해서, 과보에 의해서 끄달리며 윤회에 끄달리며 가환에 끄달리며, 모든 게 그렇게 끄달리고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보셨습니까? 모든 거를 둘로 본다면 이것은 끄달리게 돼 있습니다. 한마음 한뜻으로서 어떠한 걸 배척하지 않고 모두, 우리가 하다못해 쌀을 먹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 고등 동물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있습니다. 바치고 있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 안 하고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있으니깐 먹으려니 하고, 또 두 번째는 식욕으로 탐을 두고 또는 착을 두고 욕심이 있고, 고정되게 내 거라고 생각하는 이러한 습이 있습니다. 그것을 모두 둘로 보지 말고, 자기 주인공에서 나오는 거 주인공에다 놓는다면 모든 게 해결이 되는 겁니다.

그건 왜냐하면 밥을 한 그릇 먹었을 때 그 쌀은, 그 식물은 나의 모습이요, 그 식물의 생은 나의 생이란 얘깁니다. 그거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체를 다 가지고 논의할 때 하나도 나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어머니가 차에 치여서 옆구리가 아프다고 하면서 “아, 늑막이 들었는데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그런데 누가 토끼를 잡아서 마늘을 넣고 고아서 먹으면 괜찮다고 하니 어떻게 불자로서 살생을 합니까?” 그럽니다.

예를 들어서 선정과 지혜는, 지혜는 지혜의 용이라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들이고 내는 용, 그 자체가 무엇이냐? 선정이라 하면 우리 몸이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이 몸을 다스린다 이 소립니다. 이 둘을 한데 합쳐서 지금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균등을 잡아서 같이해 나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선이다 악이다 이러는 걸 떠나서 선정이다 지혜다, 이것을 몰락 균등을 잡아서 한데 놓는다면, 이 끄달리지 않는 법이 바로 그런 데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서 끄달리지 않고 스스로서 우리가 그 본점에 모든 것을 놓을 수 있는 그런 보림을 할 수 있다면 또 한 가지, 어저께도 얘기했지만 공부를 해 가면서 또 체험해 가면서 다시 보림을 해야 한다는 문제가 나오죠.

그런데 식물 그 자체가 모두 보림하고 놓는 데에 끄달리지 않는다는 이치가 있습니다. 여러분같이 그렇게 끄달리고 거기에서 둘로 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나무를 파서 옮기거나, 산을 올라가거나 그래도 마구 꺾죠? 둘로 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나로 본다면 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생물이나 식물이나 동물을 이렇게 먹을 때도 언제나 감사하게 먹되 감사한 그 마음을 놓으란 말입니다. 감사하게 놓고, 맡겨 놓고 물러서지 않고 모든 것을 똘똘 뭉쳐 놓는다면 이것이 바로 일상생활 그대로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떠나서 부처님 법이 있다면 그것은 어긋나는 법입니다. 내가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똥그란 그릇에 네모난 뚜껑 덮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어디까지나 새 버리고 말죠.

그러니 우리가 한생각 하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무한의 능력이 근본적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발견하지 못해서 무한 능력의 활용을 제대로 못하고 우리는 50% 미완성으로 살아나가게 돼 있는 겁니다. 그래서 3차원에 머물러 있지만 우리는 4차원, 5차원, 6차원, 7차원, 9차원까지도 바라볼 수 있는 그 무한의 능력이 본래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계발을 못해서 그렇게 못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에 식물이나 생물이나 또 낮은 동물이나 인간으로서 살아나가면서도 항상 내가 했고 너 나, 너희들, 이렇게 상대를 두기 때문에, 마음으로 그렇게 상대를 두고 욕심을 두고 또 아상을 가지고 이렇게 사니까 항상 그것이 덧붙어 돌아가는 겁니다. 우리가 산 사람이 열이라면 보이지 않는 생명들이 열입니다. 반반 이렇게 교차로를 이루고 있는데 거기에서 둘로 본다면 그거 항상 끄달리게 돼 있지 않습니까? 죽은 마음이나 산 마음이나 어찌 둘이겠습니까? 마음이야 둘이 아니죠. 모습이 다를지언정 어찌 둘이겠습니까? 항상 얘기하지마는 서쪽으로 지면 거기가 동쪽이 되고, 동쪽으로 뜨면 거기가 서쪽이 되고 이러는데 만약에 우리가 그것을 널리 본다면 우주 삼천대천세계가 그대로, 그대로 한마음으로 한 점에서 돌아가는 것을….

오늘은 여러분한테 질문을 받고자 합니다. 질문할 거 없어요?

질문자(남) 스님께서 뭐든지 어려움에 부닥치면 마음에 놓으라 말씀하시잖아요? 어떤 마음에서 그렇게 놔야 되는지요.

큰스님 우리가 이 세상에 이 몸을 가지고 탄생을 했으면 그게 사대가 공한 것이거든. 그리고 또 상대, 모든 오온이 공한 거라.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내 본국의 본점에서, 처음에 공부할 때는 본점에다…, 본점에서 모든 거 일체 만법이 나오니까. 내가 있음으로써 상대가 있지? 그렇지? 생활이 있지? 그것이 내가 있기 때문에 있는 거라. 그래서 내가 그냥 공했으면서도 화두라, 이게 그대로.

그럼으로써 일심에서 만법이 나오고 만법은 일심으로 든다 그랬어. 그럼 어째서 하고 가는 자기가 자기를 못 믿느냐 말이야. 믿고 물러서지 않고 거기다가 맡겨 놔야 되지 않나 이렇게 봐. 이것은 지금 시대의 일상생활에서 조금도, 티끌 하나 남김없이 우리는 다 공해서 나투면서 옮겨 갈 뿐이야. 염주가 돌아가지? 우리 앞뒤가 없는 염주가 항상 돌아가고 있잖아? 이 지구 자체도 그렇고 우주 자체도 그렇고 인간 살아나가는 것도 그런 거라. 항상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고, 항상 고정된 게 하나도 없고. 그런데 거기서 나오는 거 거기다 놔야지 어디다 놔? 누가 했기에 믿질 않는 거냔 말이야.

그래서 삼위일체라고 했지마는 처음에는 역시 운전수가 있으면 차가 있고 기름이 있는 거라. 이 세 가지의 이름은 다를지언정 한 몸에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거라. 그러니 그저 턱밑에다가 한데 붙여 놓고도 과거심이니 현재심이니 미래심이니 하거든. 그러니 얼마나 더뎌. 그리고 내가 공해서 이름해서 주인공이라고 했는데 거기다 또 주인공의 그 문제를 가지고 화두를 가지면 이게 문을 오히려 막는 법이라. 예전에는 순진해서 그렇게 해 가지고 공부를 했지만 지금 시대에는 너무 아는 게 많아. 아는 게 많아서 문을 닫아 버려, 모두가. 그러니 이런 방식으로 하지 않는다면 공부할 사람 없다 이 소리야. 양면을 다 들고 다 놔라 이거야. 선과 악을 다 맡겨 놔라 이거야. 겁을 통해서 그 종 문서는 불살라야 하니까.

내가 항상 그런 말 하죠? 작년 콩씨를 올봄에 심었는데 콩나무로 화했으니까 콩씨는 없어졌지? 콩나무가 돼 버렸으니까. 내가 콩나무란 말이야, 각자. 그럼 콩나무의 콩씨는 열렸겠지, 또. 그런데 작년 콩씨를 찾고 있다 이 소리야. 얼마나 더디냐 이 소리야. 과거의 겁을 통해서 업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몽땅 짊어지고 내가 지금 현재 있는 거라. 그건 물질로 돼 있는 게 아니고 체가 있는 게 아닌 게 돼서 내 마음에 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컴퓨터에 들어가 있듯이 의식적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 겹겹이 있다 이거야. 그런 거를 모두 나오는 대로 거기다 놓지 않으면 그 습을 뗄 수가 없고 그 습을 녹일 수가 없어. 홀연히 참자기의 그 생수가 나올 수가 없지.

그러니깐 그것을 발견하려면, 그것을 계발하려면 거기에 놔야 되는 거지. 믿고 놔야 돼. 자기가 없는데 뭐가 있어. 그러니까 부처님 말씀도 “네가 이 자리에 있으면 네 앉은 자리에 전체, 우주 전체가, 그 자리가 도량이니라.” 저기 가 앉으면 저기에 부처가 있는 거고 아, 여북하면 변소에 가면 변소에 계시다니까. 그렇게 놓지 않으면 어떻게 그 미지수의 세계를 뚫을 수 있을까. 뛰어넘을 수 있을까 말이야.

그래서 부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거든. “일상생활이 그대로 참선이다.” 앉으나 서나,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그대로 참선이라고 그랬거든. 어째서 그것이 말로만 그렇게 빙빙빙빙 돌아가느냐 말이야. 실천이 안되고 말이야.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그 뜻이, 49년을 설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직껏 그 선맥을…. 여러분이 인간이라면 옷깃을 다시 한번 여미고 정신 차려서 생각해 볼 점이 있지 않으냐 이 소리야. 어떻게 그럭하고서 인간이라고, 50% 미완성을 가지고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50%를 마저 채워야 우린 균등하게 나갈 수 있는 거라. 무루와 유루를 한데 합쳐서 지혜롭게, 슬기롭게, 여여하게 나갈 수 있는 거라, 그대로. 어저께도 얘기했듯이 빈 배가 일렁일렁 물에서 리듬을 타고 그냥 돌아가듯이, 우린 무심으로 항상 여여하게 그렇게 사는 것이 개인의 바로 근본이요, 또는 자유인의 근본이라.

전부 들 수도 있고 굴릴 수도 있고 덮을 수도 있으니 그것을 일컬어서 부처님의 한 발로, 한 평발로서 디뎠다 이 소리야. 발이 평발이라서 그런 게 아니고. 평이마, 평손, 평눈. 평눈은 넓은 것을, 어디에 아니 닿는 데가 없는 것을 말하고 청눈은 바로 언제나 청정하게 중심을 잡아 가지고 있다는 얘기야. 우리가 중심을 잡아서 청정하게 돌아갈 수만 있다면 지혜도, 넓은 지혜도 언제나 가지고 있는 거 아니냐 이런 소리지.

그러니 우리 생활 속에서 불법을 찾지 못한다면 불법이 어디 따로 있나? 부처님 앞에 가도 그 부처님 마음이 내 마음이요, 부처님 형상이 내 형상인데 어찌 둘이겠나, 모두가. 하나서부터 열까지 지렁이의 생명도 생명은 생명이니까. 어찌 다르겠나. 지렁이가 꿈틀꿈틀하고 가는데 그걸 한번 밟아 봐. 우리가 지나가는데 누가 따귀를 한번 때려 봐. 아프다고 하기 이전에 들이덤빌 거야. 그리고 아픈 거야. 그것도 아파해. 뭐가 달라? 차원이 달라서 그렇지, 모습이 달라서 그렇지, 생명을 아끼는 거는 다 마찬가지 아니겠어?

그렇기 때문에 만공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해. 저 나무하는 사람들더러 돈을 줄 테니까 자기를 지겟작대기로 물씬 때리라고. 그래 때리니깐 “만공은 맞지 않았다.” 하거든. 맞지 않았다는데 어떻게 돈을 받아? 그러니깐 그 나무하러 갔던 사람들은 맞지 않았다고 하니까 돈 안 줄까 봐 안 때렸지. 그래서 왜 안 때렸느냐고 그러니깐 “만공은 안 맞았다고 그러니 돈을 안 주실 거 아닙니까?” 하니까 미리 선돈을 주고 맞았다는 거야. 맞으면서도 그것은 실험이라. 그 스님께서 몸소 실험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 ‘정말 이놈! 네가, 네가 정말 공해서 없느냐? 네가 정말 이렇게 몸을 맞으면서도 네 몸이 공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고 한번 실험해 본 거지.

스님네들이 공부할 때 초심으로서 입산을 해서 선각을 이루고 또 선맥을 잇고 이러는 이치가, 그 정신을 잇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우리는 굴리고 있다 이거야. 본국에서, 본처에서 우리는 이 오관을 굴리고 있는 거라. 굴리고 있는 거지 정신에 말리는 게 아냐. 내 마음이 왜 정신에 말려? 정신에 말리면 그것은 바로 잘못돼 돌아가는 것이야. 귀신 아닌 귀신이야. 이 눈으로 올바르게 이 우주 전체를 본다 하더라도 그것은 도가 아니라고 그랬잖아?

내가 요즘 여러 가지 이렇게 얘기를 해도 그거를 내가 부릴 줄 알고 책정할 줄 알고 할 줄 알아야지, 그걸 보기만 하고 안다고 말을 해서는 절대로 그건 아니다라는 얘기야. 듣기만 해서도 아니 되고, 가고 옴이 없이 오고 간다 해서 그것이 도가 아니야, 또. 남의 속을 빤히 들여다본다고 해서 그것이 도가 아니란 말이야. 남이 여태 걸어온 그 길을, 겁을 통해서 걸어온 길을 다 안다고 그래도 그것도 도가 아니야. 단지 그 다섯 가지의 문제를 내가 행할 수 있고 직접적으로 굴릴 수 있어야 돼.

그래서 지혜는 도구와 같다 그랬어. 무기와 같다 그랬어. 무기! 선정은 내 몸을 다스리면서, 올바로 가게 하면서 모든 것을 놓는 데 불과하지만 거기에서 놓고 들어가면 지혜는 바로 무기와 같아서 다시 한번 그 무기로써 모든 거를 지혜롭게 해 나가면서, 그 무기로써 굴리면서, 용을 하면서, 체험하면서 다시 보림을 하는 것이 우리 선각들의 문제라.

옛날에 이런 분들도 있었어요. 어느 스님께서 병이 들었어요. 그랬는데 어떠한 객승이 한 분 오셨거든. 그 스님께서 “약은 턱밑에다 두고선 왜 그렇게 고통을 받으시오?” 하니까 스님께서 “턱밑이라니?” 하고선 눈을 감고 가만히 계신 거야. 난 그런 것도 봤거든. 그러니깐 그 스님께서 이 세상의 모두가, 식물이, 동물이 전부 약 아닌 게 없다 이거야. 모든 게 약 아닌 게 없는데 구태여 한 풀, 한 약초 이걸 뽑아다가 해 먹기 이전에 그 풀에, 바로 약초의 모습이 있는 그 속에, 안 보이는 액체의 유전자에 그 약이, 아주 선명한 약이 있다 이 소리야.

그러니 항상 얘기하듯이 내 주인공에는 일체 부처가 다 들어 있고 일체 만물만생이 다 들어 있는 거라. 그래서 거기에서 한생각에, 바로 한 찰나에 석가가 되고 한 찰나에 보살이 되고 법신이 되고, 문수가 되고 보현이 되고, 또 산신이 되고 칠성이 되고 용왕이 되고, 상대가 되고 판사가 되고 이렇게 자꾸 찰나찰나 돌아가는데 무엇을 바깥에서 그렇게 찾아야 하느냐 이 소리야. 그리고 얽매여서 만날 바쁘게 돌아치고, 기도처가 따로 있는 줄 알고 기도처 찾으러 다니고….

그러니까 모든 것은 지금 젊은이가 얘기했듯이 못났더라도 자기를 믿어야 돼. 처음에는 자기를 바로 뿌리 없는 작대기로 알고 뿌리 없는 기둥에다가, 뿌리 없는 그 자체가 모두 나오는 걸 뿌리 없는 그 기둥에다 놔. 자기 주인공에다 모든 걸 맡겨 놓으면 바로 그 속에서 홀연히 마음이 탄생이 되는 거야. 그걸 놓지 않고는 탄생을 이룰 수가 없어요. 또 탄생이 된다 하더라도 그 습을 녹이지 못하면, 항복받지 못하면 언제나 습에 끄달려서 깨달음도 미해지고 마구니처럼 그렇게 길을 잘못 드는 수가 많아요.

그래서 항상 마음으로는 몸을 다스리고 몸으로는 마음을 다스려서 양면을 다 놔라 이러는 거야. 공부하는 사람들한테 이런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하는 거뿐이야. 그러면 ‘주인공에 다 놓고 맡기고 하는 거라면 도둑질을 해도 괜찮지. 주인이 시키니까. 주인이 하는 거니까.’ 이럭하고 놓을까 봐. 그래서 마음은 몸을 다스리고 또 몸은 마음을 다스려서 항상 균등하게, 평등하게 중도를 삼아서 항상 놓으란 얘기지.

우리가 이 세상에 모든 걸, 먹고 사는 것도 입고 사는 것도 살아나가는 것도 하나 고정된 게 없이 하고 나가거든. 가만히 생각해 봐요. 오늘 보리밥을 먹었으면 보리밥 그냥 있을까, 응? 그냥 쌓아 두나, 아깝다고? 배설해 버리지? 삶아 먹고 또 배설해 버려. 항상 걸레로 훔쳐도 그저 아낌없이 빨아서 휙 거기 그냥 뭐, 착이 없이 그냥 놓는다고. 그렇게 하라고, 모든 것을. 운동을 하면서도, 살림을 영등같이 하면서도, 생동력 있게 하면서도 그 하나하나 하는 것이 자기 성품에서 나오고, 그 성품의 그 영원한 생명이 바로 거기에 근본적으로 있다 이 소리야.

우리가 그저 다양하게 항상 거기서 나오는 거 거기다 되맡겨 놓고, 거기서 나오는 거 거기다 되맡겨 놓고…. 그럼 24시간 잊어버리고 했다 하더라도 24시간이 1초라. 한생각 생각날 때, 일 다 해 놓고 저녁에 생각난다 하더라도 그 시간이, 하루 24시간이 그 1초가 돼 버려, 그냥. ‘아이고, 내 이거 화두를 붙잡고 있다 놓쳐서 어떡하나.’ 이러는 끄달림은 거기서 용납 안 해. 그래서 천 일이 하루요, 하루가 천 일이라 이거야. 삼천 년 전 부처님께서 계셨던 게 아니라 삼천 년 전이 오늘이요, 삼천 년 후가 오늘이야. 오늘의 영원함은 항상 살아 있고 생동력 있고 항상 계신 거야.

그래서 부처님 오신 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바로 오늘 지금 현재, 내일은 아직 안 왔고 어저께는 벌써 갔고 그러니 오늘인 거라. 영원한 오늘에 부처님은 항상 계신 거라. 본래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가실 곳도 없어. 언어가 붙지 않는단 말이야, 항상 계셨기 때문에. 항상 밝기 때문이야. 우리네 마음들이 만약에 그런 엽렵한 마음들이 없다면 어떻게 좋고 나쁜 걸 알며 어떻게 살림살이를 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슬프고 기쁘고 이렇게들 엽렵하게 알고 있지 않습니까?

어저께도 얘기했지만 물속에서 사는 어류들도 그렇게 자비와 인내가 그렇게 사람과 똑같이, 사람보다도 더 참 진실하게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세상에 우리는 그래도 고등 동물이라 배가 아파서 낳아도 그냥 이렇게 떼어 놓고 기르지마는 야, 얼마나 어렵습니까? 모든 거를 샅샅이 볼 때 하나서부터 열까지 소홀할 수가 없고 소홀히 볼 수가 없고 소홀히 생각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이 옳다, 어떤 것이 그르다 이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것이 높고 어떤 것이 낮고 이런 게 없습니다.

“부처님 자체도 뛰어넘어라.” 이렇게 말하는 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들을지 모르지만 부처님을 가장 내가 사랑하고 아끼고 내 가슴속에 항상 있기 때문에 뛰어넘으라고 하는 겁니다. 거기 뭘 하러 이름 찾아서 형상 찾아서 다닙니까? 진짜 내 마음하고 부처님 마음하고 둘이 아니라면 뭐 때문에 형상을 찾아서 다니며 또 뭐 때문에 이름을 찾아다니며 기도처를 찾아다니겠습니까. 내가 가는 대로 부처님 계신 곳이지. 그렇게 찾는다면 모두가…. (녹음 안됨) 부처님, 아니 부처님뿐만 아니라 우주간 법계에서 다 통신이 된다니까. 여러분이 바깥으로 항상 ‘칠성이시여, 명 길게 해 주시오. 약사보살이여, 나 이거 낫게 해 주시오.’ 아무리 그래 봐. 그게 통신이 되나.

내가 주욱 설하고 내려온 그 자체는 여러분이 의심 가는 게 있거나 또는 점검하고 넘어갈 일은 넘어가야 하니까 그렇게 하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이 이 방에 이렇게 앉아 있지마는 온 누리에 나와 같은 이러한 선의 중생이 있고 악의 중생이 있고 차원 차원의 뭇 중생이 있는 것입니다. 보이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면 수많은 안 보이는 생명들이 얼마나도 많겠습니까? 여러분은 한 사람이 앉아 있지만 한 사람 속에는 수많은 생명이 지금 모여서 같이 앉아 있지 않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이렇게 몇 분 안 되시는 거 같아도 수많은 중생이 지금 됩니다.

그래서 여기 오셨다 가시고 하신다면, 이 주인공에다 모든 걸 맡겨 놓고 그렇게 하신다면 내 뭇 중생이, 이 육신에 들어 있는 온 중생을 다 이끌어서 한마음으로 돌아가니까 내 몸 튼튼하니 좋고 건강하니 좋고, 또는 가환이 물러나니 좋고 식구들이 전부 조화를 이루니 좋고, 화목하니 좋고 사랑할 수 있으니 좋고…. 그래, 뭐가 틀린 게 있습니까?

불교는 떡이나 해 놓고 밥이나 해 놓고 빌고, 또는 고기나 잡아 가지고 방생한다고 다니는 그게 불교가 아니에요. 물론 세상에 사람이 있으니깐 천차만별로 그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겠지마는 그런 걸 가릴 줄 알고, 그것이 남한테 이익하게 하는 건지, 어느 생명에게든지 이익하게 할 수 있는 건지 그거를 알아서 행할 수 있다면 그게 다 나오지 않겠습니까? 만날 내 욕심에 눈이 어둡고 남의 생명은 아랑곳없고 이렇게 생각하니까 모든 게 욕심이 되고, 그것이 업보가 되고, 그것이 망상이 되고 그것이 바로 가환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우리 지구 안에는 수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혹성에도 생명들은 살고 있으나 모습이 없는 데도 있고, 모두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요, 평화로운 모습이요, 그것은 자유자재권의 모습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여기만 생명들이 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해 본다면 내가 나라고 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 수효가 많은 이 우주 삼천대천세계에 우리는 먼지 하나 될까 말까 하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지 하나 될까 말까 하는 그 마음의 불씨가 온 우주를 덮고 우주를 밝힐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86년 3월 27일 일반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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