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축총림 통도사 고원당 명정선사 영결식 엄수

‘염다래’의 시자로 살며 스승에 대한 법은(法恩)을 삶의 이유를 삼았던 명정 스님이 극락을 벗어나 극락으로 떠났다.

통도사 극락암 경봉 스님은 누구든 불법을 물으러 찾아오면 시자야, 염다래(拈茶來, 차를 다려와라)하라며 일렀다. 염다래의 염()은 이심전심의 법문 염화미소(拈華微笑)’의 염과 같은 말이다. 말없이 미소로 주고받는 법, 경봉 스님의 염다래는 선가의 일상이었다. ‘염다래의 시자로 살며 스승에 대한 법은(法恩)을 삶의 이유를 삼았던 명정 스님이 극락을 벗어나 극락으로 떠났다.

328일 통도사 극락암
스승의 발자취 따라 茶聖
걸죽한 古佛의 진한 미소
마지막 법문 막신일호

고원당 명정선사의 영결식이 328일 통도사 극락암에서 엄수됐다. 영결식에는 통도사 방장 성파 스님, 극락문도회 대표 무애 스님, 불국사 승가대학장 덕민 스님, 고시위원장 지안 스님, 조계종 원로의원 무비 스님, 통도사 주지 영배 스님을 비롯 사회 각계 인사 등 사부대중 2000여 명이 자리했다.

고원당 명정선사의 영결식이 3월 28일 통도사 극락암에서 엄수됐다.

영결식은 명종 및 개식, 삼귀의례로 시작해 동주·범철 스님의 청혼(請魂)이 이어졌으며, 지안 스님의 행장 소개, 헌다, 추도입정이 진행됐다.

영결사에서 덕민 스님(불국사 승가대학장)오늘 영축총림 사부대중 호곡(號哭) 속에 영결을 고하는 고원당 명정선사여! 그 먼 공적(空寂)의 길을 말없이 혼자 가는가. 그 깊고 걸죽한 고불(古佛)의 진한 미소를 우리들 선금(禪襟)에 묻어두고 영축산 굽이 길을 그렇게 혼자 가는가. “며 안타까워했다.

영결사에서 덕민 스님은 “오늘 영축총림 사부대중 호곡(號哭) 속에 영결을 고하는 고원당 명정선사여! 그 먼 공적(空寂)의 길을 말없이 혼자 가는가."며 슬퍼했다.

추도사에서 의정 스님(전국 선원수좌회 대표)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진 경지는 묻지 않겠다.”다만 고운 것은 미워하고 싫은 것은 즐거워하는일상원각(日常圓覺)의 도리에 사무친 대선사의 길을 따라, 우리 후학들은 일상생활에 잘 착안하여 하늘에 활보하며옛 동산에서 마신 찻값은 꼭 치르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의정 스님은 “옛 동산에서 마신 찻값은 꼭 치르도록 하겠다”며 추도사를 전했다.

정우 스님(구룡사 회주)과 진불심 극락호국선원 신도회장은 조사로 명정선사의 열반을 추모했으며 산중 및 각계 대표와 신도들은 헌화하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영결식 후 사부대중의 오색만장 속에 법구는 이운 됐으며 통도사 연화대에 안치됐다. 대중은 큰스님 불 들어갑니다며 눈물을 흘렸고 짙은 차향만 영축산에 남겨 둔 채 스님의 법구는 흩어졌다.

한편, 명정선사의 49재는 극락암에서 진행되며 331일 오전10시 초재로 시작해 막재는 부처님오신날을 피해 511일 봉행된다.

 

명정 스님은 1943년 경기도 김포시 고촌읍에서 태어났다. 1959년 합천 해인사로 출가 후 선지식 경봉 선사께 가르침을 구하기 위해 양산 통도사로 옮겨 행자과정을 마쳤다. 이후 20년 동안 경봉 스님을 시봉하며 수행했다.

1981년 극락암 감원을 맡은 후 경봉 스님의 건강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19827월 경봉선사의 열반을 맞아 장례를 주관, 19842주기에는 경봉선사탑비 및 부도를 건립했다.

이후 경봉선사의 어록을 정리하는 책을 발간했으며 본인의 저술은 <경허집>, <한암집> <신심명>, <차이야기 선이야기>를 함께 묶어 전집으로 출판했다.

20188월 명정 스님은 극락암 원광재에서 사형제들이 화합해서 잘 살아라! 아무리 좋은 집 불사도 내 몸 불사보다 못한 법이다.”고 말하며 게송을 읊었다.

 

내가 평생을 한잔 차에

우주(宇宙)의 진리를 담았더니

막신일호차(莫神一好茶)로다!

이밖에 할 말이 또 있겠나!

아 뜨거 어 뜨거-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가도다!”

스승 경봉 스님(왼쪽)과 명정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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