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학의 한국산사의 장엄세계] 안동 봉정사 영산암
[노재학의 한국산사의 장엄세계] 안동 봉정사 영산암
  • 노재학 사진기자
  • 승인 2018.03.09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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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절집에 꽃피운 한옥과 민화의 美

 

마루 높이 맞춰 동선 연결

봉정사 영산암은 응진전을 주불전으로 경영한 봉정사 속의 작은 암자 공간이다. 독립된 암자라기보다는 중심영역에서 비켜 마련한 별채 공간의 느낌을 갖게 한다. 우화루와 응진전, 송암당 등 여섯 채의 건축이 올망졸망 다닥다닥 붙어 ㅁ자형 공간을 연출한다. 건축 저마다의 위상학적 높이는 산지지형에 따라 서로 다른 표고(標高)를 가진다. 하단, 중단, 상단의 세 높이의 마당에 맞춰 건축을 배치했다. 하단에는 진입누각인 우화루가 성벽처럼 정면을 버텨 서있고, 중간 마당 좌우에는 송암당과 관심당의 두 요사채 건물이, 상단에는 응진전과 삼성각, 염화실이 있어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룬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우화루의 이층 대청마루가 중간마당 좌우에 배치한 두 요사채 마루와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세 건물의 마루를 같은 높이에 맞춤으로써 건물끼리 단절됨 없이 매끄럽게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 회랑처럼 실내이동 동선의 연속성을 구축한 것이다. 유기체의 생명력이라 할 수 있는 순환동선의 확보로 인해 건축공간에 보다 따스한 서정과 생동감을 살려내고 있다.

우화루, 두 요사, 법당으로 ㅁ자형
한옥 고택의 안채에 들어서는 느낌
조형과 문자로 통불교 불국토 장엄
단청에 풍부한 민화풍 소재 활용

응진전 내부 향좌측 벽면의 매화선학도
응진전 내부 향우측 벽면의 봉황도
우화루 대청에서 바라본 응진전
송암당의 달마도해도와 어변성룡도

이런 연결 순환성 갖춘 건축은 안동, 봉화 등에서 특별히 발달했던 재사건축, 이를테면 서지재사, 가창재사 등 유가건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색이다. 사찰건축에서 대청마루나 쪽마루를 채택한 경우도 특별하거니와, 더구나 마루를 통해 세 건물을 연결한 사례는 오직 이 곳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별한 장면이다. 특히 아담한 크기의 화단 수목들과 자연석 계단, 바위에 조경한 반송들과 어우러진 정경들은 고향집 서정의 평온함과 따스함, 소박함을 선사한다. 수행절집이 아니라 고택의 안채에 들어선 느낌을 갖게 한다. 뜻밖에도 절집에서 한옥의 푸근함과 아름다움을 만나는 기쁨에 젖게 한다.

하단의 건축은 우화루이고, 중단의 중심건축은 송암당(松巖堂)이다. 송암당은 바위에 조성한 소나무 곁의 요사채다. 건물의 삼면에 마루를 낸 정감 있는 건축이다. 마당쪽으로는 툇마루를 내고, 측면에는 대청마루를, 뒷면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물론 그 마루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송암당의 인상적인 단청장엄은 마당쪽 창호 상인방 흙벽에 조영한 벽화를 꼽을 수 있다. 벽화의 공간적 배경은 연꽃이 만발한 연지(蓮池)다. 연지에 등장하는 중심 소재는 용과 연꽃, 인물에 얽힌 고사다. 눈에 우선적으로 띄는 대목은 파도 속에 내민 용의 정면 얼굴인데 네 곳에 등장한다. 네 마리 용은 서로 다른 방향을 주시하고 있다. 양 협칸의 용은 정면을 보고, 가운데 두 용은 좌우를 각자 주시한다. 화재나 사악함으로부터의 벽사 역할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용 소재의 다른 장면은 일출 무렵에 물고기가 용으로 극적으로 변하는 ‘어변성룡(魚變成龍)’의 묘사 장면이다. 어변성룡도는 민화에서 선호되는 소재로, 잉어가 용문의 거친 협곡을 도약하여 오른다고 해서 ‘약리도’라고도 부른다. 벽화의 한 쪽에 붉은 글씨로 어변성룡의 방제를 적어 놓았다. 어변성룡도의 다른 쪽엔 달마대사가 갈대 가지를 꺾어 타고 강을 건너는 장면, ‘달마도해(達磨渡海)’를 묘사하고 있다. 스님이 거주하는 요사채의 건물에 진채 안료를 사용한 단청 별지화 장엄은 이례적인 대목이다. 맞은 편 요사채인 관심당엔 단청장엄을 생략하고 있어 대비의 잣대를 들게 한다.

영산암의 중심불전은 응진전이다. 영산암의 응진전은 불상의 봉안이나 장엄에 있어 대단히 이채로운 태도를 취하고 있어 여러모로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응진전에 모신 존상은 삼존불과 16나한상이다. 삼존상은 제화갈라보살, 석가모니불, 미륵보살의 과거 현재 미래 삼세불이다. 하지만 불전 내부를 찬찬히 살펴보면 곳곳에 문자언어로 부처님 세계를 봉안하고 있어 통불교적인 불전건물의 특성을 드러낸다. 향좌측 대들보와 도리에 ‘극락도사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의 명호를 관상하게 먹으로, 혹은 흰 글씨로 적어 뒀다. 또 정면 어칸 내부공포 세 칸에는 각각 ‘원만보신불’, ‘청정법신불-비로회’, ‘동방약사불-유리회’ 등 부처님과 불국토의 세계를 묵서로 봉안한 유례없는 장엄 형식을 취하고 있다. 중심불상으로 모신 석가모니불을 염두에 둘 때 이 곳 응진전에는 갈라보살-석가모니불-미륵보살의 삼세불과 보신 노사나불-법신 비로자나불-화신 석가모니불의 삼신불, 약사여래-석가여래-아미타여래의 삼존불을 두루 봉청, 봉안한 통불교 형식의 불국 만다라를 경영한 셈이다. 대웅보전, 대적광전, 극락보전, 약사전을 두루 통합한 형식에 가깝다. 즉 전각의 이름만 응진전이지, 하나의 독립적인 사찰을 함축적으로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조형과 문자를 통한 통불교 불국토 장엄으로서, 그 장엄의 의미가 독특하다 하겠다.

 

호작도, 약리도, 선학도, 포도 등 민화풍

응진전의 장엄세계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불교적 색채 보다는 19세기 민간에서 유행하던 민화풍의 벽화들이 단청장엄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외부벽화는 색채가 많이 퇴락했지만 윤곽과 형태는 살필 수 있다. 향좌측 벽면에선 호작도와 불사약을 찧고 있는 토끼 한 쌍의 그림이 눈길을 끈다. 호작도는 호랑이와 까치를 함께 표현한 까치호랑이 그림으로, 액막이와 길조의 상징성을 담은 까닭에 조선후기 민화의 단골소재로 활용했다. 사찰벽화로 표현한 까치호랑이는 이 곳 외에 통도사 명부전과 해장보각, 용화전 등에서도 볼 수 있다. 불사약을 빻고 있는 토끼 한 쌍의 민간설화를 사찰벽화로 만나는 경우도 극히 이례적이다. 사찰장엄에서는 순천 선암사 원통전 창호 궁창 등에서 드물게 볼 수 있을 정도다. 고구려 벽화고분 개마총 천정벽화 등에서도 보름달 속에 절구질하는 토끼 장면이 나타나기도 한다. 엄숙한 종교장엄의 사찰벽화 속에 미소를 자아내는 그 같은 해학과 재치의 표현이 사금파리처럼 빛난다. 향우측의 벽면에서는 송학도와 용을 밧줄로 낚아 올리는 두 선인 벽화 두 점이 있다. 다채로운 소재 운용에서 사찰장엄 벽화의 폭넓은 수용성과 관용성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민화가 사회저변에 확대되는 시대 흐름 속에서 종교장엄의 도식적 경직성에 벗어나 대중적 요구를 일정하게 반영한 산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응진전 내부 단청벽화 역시 민화풍의 소재를 풍부하게 풀어 놓았다. 어변성룡도, 봉황도, 선학도, 파초, 포도, 대나무 등 다양하다. 불교장엄의 색채를 지닌 벽화소재는 연화화생도, 심우도, 나한도, 운룡도, 남극노인성(태산노군) 등이다. 어변성룡도는 대들보 중간인 계풍에 그려 넣었는데, 금빛 수염을 가진 황금빛 잉어가 태양을 향해 솟구쳐 오르는 역동적인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형식적인 차이는 있지만 김해 은하사 대웅전, 구례 천은사 극락보전, 공주 마곡사 응진전, 상주 남장사 극락보전 등의 대들보 계풍에서도 어변성룡도의 표현이 나타난다. 내부의 많은 벽화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그림은 선학도와 봉황도, 연화화생도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선학도와 봉황도는 형태, 색채, 구도 등에서 붓질이 대단히 치밀하고 섬세한 수준작이어서 주목된다.

 

아미타내영으로 12명 연화화생

선학도에 등장하는 핵심소재는 쌍학, 고매(古梅), 길상화, 보름달, 불사초이다. 고매는 꽃이 만발한 백매다. 검은 매화 등걸은 용틀임하듯 역동적이고, 보름달이 휘영청 매화가지에 걸려 있다. 매화나무 아래에는 영지버섯 같은 불로초가 뭉게뭉게 피었고, 길상화는 푸른 이끼 낀 매화나무 등걸을 칭칭 감아 올라 활짝 핀 붉은 꽃가지를 능수버들처럼 폭포수로 늘어뜨리고 있다. 길상과 수복강녕의 염원을 읽을 수 있다. 어느 한 곳 흠 잡을 데 없는 대단히 빼어난 수작이다. 그 맞은편의 봉황도는 또 어떠한가? 우선 강렬한 보색대비의 색채운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바위와 깃털, 오동나무의 묘사에서 힘과 섬세함을 두루 갖추고 있다.

벽화의 가장자리엔 ‘봉명조양(鳳鳴朝陽)’이라는 붉은 색 방제를 써 두었다. 아침 햇살에 봉황이 운다는 뜻이다. 천하가 태평할 조짐을 담고 있다. 선학도와 봉황도의 채색원리를 살펴보면 통도사 명부전 벽화들과 상당히 닮았음을 알 수 있다.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화원들에 의해 그려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응진전 내부장엄 중에서 유심히 살펴볼 또 하나의 벽화는 아미타삼존 내영과 연화화생 장면을 표현한 향좌측의 벽화다. 아미타내영 부분은 가구시설에 가려 볼 수 없지만, 조금 드러난 부분을 통해 일정하게 추정할 수 있다. 또 벽화 바로 위 건축부재에 ‘극락도사아미타불’의 명호를 밝히고 있기도 한 까닭이다. 연꽃을 통해 새로운 생명으로 화생하고 있는 사람은 총 12명이다. 커다란 쌍수 아래서 화생하고 있는데, 모두의 시선은 아미타여래께로 향하게 했다. 파주 보광사 대웅전 외벽에서도 연화화생 장면이 등장한다. 흔하게 접할 수 없는 귀한 장면들이다.

한옥의 따사로움과 아름다움이 물씬 묻어나는 건축 공간에서 빼어난 민화풍의 회화들과 연화화생도를 두루 접할 수 있으니 영산암 절집에서 만나는 고귀한 장엄, 귀한 인연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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