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두 서울대 철학과 교수

생생문화포럼 시민강연… 주제: 불교의 관점에서 본 죽음

죽지 않는 생명은 없고 누구나 죽음 앞에 무력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죽음을 외면하려 한다. 부처님은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늘 수행하라고 하셨다. 오히려 죽음을 인지해야 삶의 가치를 깨닫고 매 순간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성두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12월 8일 한국장기조직기증원 생생문화포럼 시민강연서 ‘불교의 관점에서 본 죽음의 문제’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안 교수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죽음에 대한 수행과 명상을 지속해야 삶의 매 순간 깨어있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정리= 박진형 기자  

 

안성두 교수는… 한국외국어대학 독어교육과를 졸업한 후 한국학대학원에서 한국불교 전공으로 석사를, 독일 함부르크대학 인도학과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3~2009년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으며, 2009년 9월 서울대 철학과 교수에 임명됐다.

인생 가장 큰 사건인 죽음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죽음 인지하고 끝없이 수행해야
삶의 가치 깨닫고 매 순간 집중

불교는 죽음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다뤘을까요? 다른 종교와 달리 불교는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기독교는 한 번의 생과 한 번의 죽음, 그리고 영원한 심판이라는 단순한 구조로 이뤄져있습니다. 반면 불교는 윤회라는 인도 문화를 이어받았습니다. 윤회란 생과 사, 재생과 재사의 끝없는 순환입니다.
불교는 무수한 삶과 생이 이어진다고 보지만 우리의 죽음이 무의미하다거나 아무렇게나 죽어도 된다는 종교는 절대 아닙니다. 불교는 죽음을 직시하라고 합니다. 끔찍하거나 불유쾌하다고 해도 눈을 돌리지 않고 직시하라고 합니다. 죽음을 외면하는 것이 우리를 오히려 잡아먹고 우리를 나태하고 퇴폐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일반적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외면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미쳐올 부정적 영향 때문에 가능하면 생각하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이런 문화는 우리 사회에서도 보여요. 집에 시신을 모시고 손님도 접대하던 예전과 달리 요즘은 집에 계신 분도 병원으로 보내 임종을 맞게 합니다. 이렇게 죽음을 외면하면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죽음인데 여기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무언가 배운다면 우리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실 죽음이 무엇인가 묻기 전 인간이 무엇인가 먼저 묻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일까요? 인간은 영혼과 신체로 이뤄져있다고 하는 이원론적 답이 가장 고전적일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있다면 ‘죽음에 의해 소멸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영혼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자연과학, 유물론자, 물리주의자들이 갖는 입장일 것입니다. 또 ‘파괴되는 것은 정신이나 영혼이 아니라 우리들의 육체’라는 입장도 있을 것입니다. 죽었을 때 남아있는 것은 그야말로 단백질 덩어리며 영혼 없는 신체고 부패해 가기 시작하는 더러운 것이라는 거죠. 영혼은 그의 선행과 악행에 따라 신의 세계나 부정적 세계로 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조로아스터교, 기독교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맥락에서는 인도 정통 종교에서 말하는 ‘아트만’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습니다. 아트만은 신체가 소멸한다고 해도 신체 속에 숨어있는 영원한 본질입니다. ‘수많은 윤회ㆍ전생을 거치지만 불멸하는 아트만이 있고 따라서 파괴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들의 본질은 아트만이고, 신체 등은 허상에 불가하다. 우리들의 궁극적 목표는 우리의 본질이 아트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고 이때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서 불멸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아트만이 지금 머물고 있는 육신을 없애고 무명을 가진 채로 다른 몸으로 건너가 그 몸에 정착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교의 심신과 윤회는 어떨까요? 불교는 이런 종류의 아트만을 비판하면서 독자성을 확립해 갔습니다. 불교의 교설은 결국 무아(無我)설입니다. 어떠한 본질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입장입니다. 우리는 아트만이라는 것이 있다고 확신해야 안도하고, 영원히 산다고 생각하며 행복한 세계로 갈 수 있겠죠. 그러나 붓다는 아트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로인해 영원한 행복이 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심신의 문제와 관련해서 붓다는 심신이 신체와 심리요소의 복합체고 이들 요소와 독립해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신체 내면에 숨어있는 영원한 본질이라는 것을 붓다는 전제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에게 본질이 없다면 대체 무엇이 윤회하는 존재일까요? 불교는 식(識)을 윤회의 주체로 봤습니다. 또한 윤회하는 이유는 업과 번뇌 때문이라고 봤습니다. 번뇌라는 것은 쉽게 부정적 심적 작용인 탐진치(貪瞋癡)입니다. 탐진치라고 불리는 우리의 의식 작용과 그로 인한 업 때문에 우리가 윤회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의 부정적 의식 작용이 멈추는 순간 열반이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붓다는 열반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했죠.

불교에서 죽음에 대한 명상의 의의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들어본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이 말은 결국 모든 것은 무상하고 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체 역시 모든 세포가 교체 되는데 길어야 6년이라고 합니다. 6년 전 우리를 구성했던 세포는 이제 아예 존재치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자리가 변한다는 것은 매일 경험하고 있죠. 느낌은 순식간에 변합니다. 이런 무상감이 불교적 통찰이 시작되는 출발점입니다. 붓다는 영원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수행하지도, 변하려고 생각지도, 선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매 찰나 변화한다고 하면 우리는 역설적으로 순간순간보다 나은 삶을 살도록 노력할 수 있겠죠.
무상함의 가장 극적인 형태는 죽음입니다. 죽음은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결국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모든 성취, 노력, 영광, 성공 등 이 죽음 앞에서 전부 무(無)가 됩니다. 불교는 이 죽음을 마음을 변화시키는 수행을 하는데 사용코자 하는 것입니다.
초기불교는 여러 가지 주의집중, 불교 수행에서 핵심적 명상을 보여줍니다. 불교의 정신적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죠. 명상은 영어로는 ‘Mindfullness’라고 합니다. 마음을 챙기고 마음을 집중하라는 거죠. 티벳의 어떤 유명한 승려는 ‘난 20년간 수행을 피하며 살아왔고 20년은 내일 수행해야지 하며 살아왔고 나머지 20년은 수행하지 않음을 후회하면서 살아왔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행복하고 즐거우니 문제들은 내일, 다음에 해야지 하며 실질적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을 불사각이라고 합니다. 이런 주의집중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는 삶, 찰나 찰나 자신의 느낌을 관찰하지 않는 삶을 경계해야 합니다.
불교는 특히 죽음에 대한 주의집중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깨어있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진행되지 않으면 사회에 책임을 돌리고 더 심하면 부처님과 신에게도 책임을 돌립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아는 사람들은 현재에 주의 집중하는 사람뿐입니다. 이런 깨어있는 수행을 하기 위해 붓다가 권했던 가장 극단적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부정관입니다. 부정관이라는 것은 시체가 썩어가는 과정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관찰을 좋아하는 종교죠. 신체를 하나하나 쪼개 그것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관찰하는 것입니다.
초기 수행자들은 공동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섞여 분해돼 백골이 되는 과정을 관찰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몸도 그렇게 될 것임을 피할 수 없다고 명상했습니다. 특히 탐욕이 많은 자에게 탐욕의 허망함을 일깨우기 위해 권장됐습니다.
뼈마디가 나눠지고, 그 뼈마저도 나중에는 백골이 되는 것을 ‘지금 죽어가는 시체도 나의 신체와 다르지 않다. 죽음이 저런 성질을 갖고 있다면 나의 신체도 저런 과정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관찰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붓다가 부정관을 가르쳤을 때, 수백 명의 승려들이 자살했다고 합니다. 신체야 말로 모든 삶이 이뤄지는 터전인데 어차피 결국 다 부패하고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요. 그래서 부처님은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은 부정관을 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정도로 효과가 매우 컸습니다.

어떻게 죽음에 대한명상을 수행하는가?
죽음 앞에서 과연 무엇이 도움 될까요? 가족? 재산? 친구? 친척? 선업? 여기서 죽음에 대한 예비적 수행의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티벳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만일 아침에 깨어난 후 죽음에 대해 명상하지 않는다면 아침은 헛되이 지나간 것이다. 만일 그것에 대해 오후에도 명상하지 않는다며 오후도 헛되이 지나갔다. 마찬가지로 밤에도 그것에 대해 명상하지 않는다면 밤도 무의미하게 사라져간 것이다. 우리는 수행자가 아니기에 매번 생각할 수는 없지만 마음에서 죽음에 대한 관념을 개발시켰다면 죽어가는 주변인, 친구들을 더욱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명상이 주는 이익은 결국 삶의 의미에 대한 자각입니다. 삶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알게 됩니다. 저는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모든 관계가 물거품처럼 사라져가는 것 느꼈습니다. 부모님에게 내가 추구해왔던 것들이 얼마나 허망하고 무의미한 것인지 깨달았습니다. 결국 죽음은 미혹된 욕망의 허망함에 대해 자각하게 해줬습니다. 일상이 얼마나 욕망에 의해 점철 돼 있는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자각을 줄 수 있습니다. 수행을 통해 삶의 매 순간을 깨어있게 만들겠다는 각성을 통해서요,
우리가 죽음을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가 판단할 때, 불교는 세 가지를 자각하라고 말합니다. 죽음은 반드시 온다는 사실, 그리고 따라서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는 확신입니다. 모든이에게 죽음은 오고 그래서 반드시 수행하며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②죽음의 시간은 정해지지 않았다는 사실, 따라서 지금 수행해야한다는 확신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무한히 연장될 것 같다는 생각에 오늘은 좀 놀고, 내년부터 해야지 하고 생각 하지만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르고, 죽음이 가변적이라는 것을 인식해 우리들의 의식을 호흡에 놓고 관찰 하는 등의 생각을 일으켜야 합니다. 죽음 앞에서 오직 수행만이 나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 따라서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수행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죽음에서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명상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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