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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는 돌’ 부산 문화포교 큰 밭 일구다복합문화공간 ‘쿠무다’ 대표 주석 스님
‘쿠무다’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는 스님의 모습이 커피향 만큼 은은하게 다가왔다. 부산 송정에서 ‘핫플레이스’로 통하는 쿠무다 카페를 일군 스님은 문화포교의 아이콘으로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고정된 틀 안에 갇힌 불교, 변화가 필요”


파도가 철썩 거렸다. 가을의 문턱, 쌀쌀한 날씨에도 파도와 바닷바람을 즐기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다시 파도로 눈길을 돌렸다. 저 바다 끝에서부터 세차게 달려와 모래와 닿자 부서진다. 그 물거품이 파도의 마지막이다. 하지만 또 다시 밀려온다. 반복해서 도전한다.

이러한 파도의 모습과 닮은 삶이 있다. 부산 송정 바다를 마주본 대운사의 복합문화공간 ‘쿠무다’ 대표 주석 스님이다.

주석 스님은 불교계 연예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BTN불교TV의 ‘세상만사’ MC 및 BBS불교방송의 ‘마음대로(大路)’의 DJ를 맡고 있다. 최근에는 ‘세상만사’가 MBC 예능프로그램 ‘세모방’과 콜라보를 선보이며 공중파에도 진출해 ‘누님 스님’으로 불리며 이슈가 됐다.

MBC 〈세모방〉 프로그램에 소개된 주석 스님.

‘방송을 타서’ 유명해진 것만은 아니다. 주석 스님은 영어·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낼 뿐 아니라, 사찰 내 다실(茶室)이 아닌 대중을 위한 복합문화공간 ‘쿠무다’를 열고 각종 문화포교 활동에 앞장섰다.

주석 스님은 이 모든 활동을 ‘개혁’과 ‘도전’이란 단어로 설명했다. 고정된 틀을 깨고, 없던 것을 새로 하려하면 어쩔 수 없는 비난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님은 그 모든 것을 감수한다고 한다.

주석 스님의 개혁과 도전은 무엇이며, 또 무엇을 위한 것일까? 8월 24일 쿠무다 2층에 위치한 대운사에서 주석 스님을 만났다. 불자들과 기도를 하고 자리에 앉은 스님은 가장 먼저 출가에 대한 얘기를 털어놨다. 첫 마디는 “멋모르고 출가했다”는 것이었다. 그 후 30년 동안 부처님은 말없는 미소로써 수많은 대답을 대신하며 주석 스님의 삶을 이끌었다.

“말씀은 없으신데 부처님께 나 자신을 비춰보면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다음 생에도 스님으로 태어나고 싶어요. 그래서 또 다시 부처님의 미소를 바라보며 이렇게 살겠습니다.”

차를 내려 주며 살짝 숙인 고개 아래, 입가엔 미소가 보였다. 부처님 미소처럼 평안과 행복을 닮았다. 낮은 목소리로 말을 잇던 스님은 부처님을 바라보았다. 눈가엔 눈물이 맺혀 있다. 옅은 미소와 함께 부처님을 바라보며 “다음 생에도 부처님과 함께 하고 싶다”며 말끝을 흐렸다.

주석 스님 ‘불교계 연예인’
방송 포교 활동에도 ‘진력’
BTN불교TV ‘세상만사’ MC
BBS ‘마음대로’ 진행자 맡아
공중파서 ‘누님 스님’ 활약

불사·포교에도 큰 뜻 세워
2009년 함양 대운사 낙성
범어사 말사로 등록한 후
‘도심포교’ 원력에 해운대로
2013년 쿠무다·대운사 열어


말 없던 소녀, 제법무상을 받아들이다
1970년대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오던 기차 안에서 5살 작은 소녀는 멈추지 않고 울었다. 7시간 걸려 부산에 도착했을 때 담장 아래 개나리가 피어있었다. 샛노랗게 핀 개나리가 너무 밝아 야속했는지 소녀는 더 소리치고 울었다. 그래도 엄마에게 돌아갈 순 없었다. 부모의 이혼이 준 충격으로 소녀는 말문을 2년 동안 닫았다.

친할머니 집으로 내려온 후 부처님이 계신 절을 더 자주 찾아 갔다. 자신처럼 침묵하고 있는 부처님을 보며 소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부처님과 마주보고 앉아 눈물을 삼키며 이별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가장 말이 많은 그 시기, 안으로 생각이 잠기고 또 깊이 사유되길 반복하다 7살 소녀는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직관력은 깊어지고 예민한 7살이 되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걸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시기죠. 어려서 시간이 더 오래 걸렸나 봐요. 상처가 남았는지 그 때 그 개나리 색이 선명합니다. 지금도 개나리는 싫어해요. 그래서 아는 사람들은 개나리 선물을 안 합니다.(웃음) 트라우마겠죠. 그러다 17살 때 동네에서 만난 첫 사랑이 있었어요. 순수하게 편지를 주고받고 버스타서 우연히 만나면 좋은, 그런 두근거림 있지요?”

하지만 그 황홀한 두근거림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부터 첫사랑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죽음, 병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들은 후에도 저는 여전히 세수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상처럼 살더군요. 세상도 그대로 돌아가고 있었어요. 그 때 더욱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고정불변은 없다는 것을요. 마음 아팠지만 그때는 별 다른 저항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18살 때 출가 했습니다.”

문화 포교를 위해 유학간 프랑스 파리 에꼴 벨루에 꽁세이(ecole bellouet conseil)와 르노뜨로(ecole le notre)에서 제과제빵 과정 중

도전은 곧 시은(施恩)!
주석 스님은 그 후 동학사승가대학에 입학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혼자 있길 편하게 여겼다. 하지만 승가대 축제 때 사회자의 공석으로 진행할 대타가 필요했다. 스님은 번쩍 손을 들고 나서야 “놀랐다”고 했다.

“사회가 공석이라 필요하다는 말에 손을 번쩍 들었어요. 제가 어떻게 그랬는지 알 수가 없었죠. 막상 무대에 올라가니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무사히 축제를 진행한 것 같아요. 당시 일연 스님이 주지이셨는데 BBS불교방송 개국할 때 추천해주셔서 오디오 테스트를 봤어요. 하지만 그 때 당시는 공부가 더 하고 싶어 거절했죠.”

스님은 그 후 동학사승가대 졸업을 앞두고 기도를 선택했다.

“졸업을 앞두고 대부분의 스님들도 진로를 고민합니다. 선방과 학교, 그리고 기도로 나뉘죠. 1995년도 말쯤 천일기도에 입재했습니다. 다라니를 천독하고,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밤 9시가 될 때까지 기도만 하는 삶이었죠. 그렇게 3년 정도 하니 장애가 나타나더군요. 이유 없이 슬퍼지고 웃고 짜증도 내고 밉고. 감정 기복도 심해졌지만 꿈을 꾸는 날엔 더 신기했어요. 꿈에 내일 누가 오는지 미리 알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생기더군요. 그 때 <능엄경>에서 봤던 말씀이 떠올랐어요. 오십변마장(五十辨魔障)인데 그 모든 현상이 마장임을 알았죠. 경전의 말씀으로 내 경계를 정확히 알자 모두 사라지더군요.”

천일기도 후 스님은 공부할 것을 결심하고 동국대 선학과를 입학했다. 대학시험을 두 달 앞두고 준비에 돌입했지만, 부족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합격했다. 01학번으로 새 학기를 맞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은 시간이었어요. 지금도 기도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마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공부의 중요성을 안거죠. 그리고 승가대 다닐 당시부터 출가자 입장에서 뿐 아니라 학자적 관점에서 바라본 경전이 궁금했어요. 그래서 동국대 불교학과를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우연히 한국불교 간화선을 소개한 번역 사이트를 봤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았어요. 문맥만 맞춰 놓은 영어 번역을 보고 실력을 닦아 제대로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추후에는 강단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바른길을 제시하고 싶었죠.”

그래서 스님은 불교학과 졸업 후 영남대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마치 전생에 배운 바가 있었던 것처럼 스님은 영어 공부에 뛰어난 기량을 보였고 학과 톱을 유지했다.

“동국대 다닐 당시엔 몰랐어요. 스님이 그땐 많았거든요. 근데 영남대에 와서 보니 스님은 저 혼자였습니다.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모범을 보여야한다 생각했어요. 스님이 공부를 못 해봐요. 학생들이 부처님을 어떻게 여기겠어요.”

그 후에도 스님의 배움엔 끝이 없었다. 계명대 미대에 입학해 예술을 가까이 하고 이후 문화포교를 꿈꾸며 프랑스파리 에꼴 벨루에 꽁세이(ecole bellouet conseil)와 르노뜨로(ecole le notre)에서 제과제빵 과정을 수료했다. 방송 문화 포교를 위해 이선미 아나운서의 스피치랩(speechlab)에서 아나운서 멘토링 과정도 수료했다. 배움과 도전은 곧 시은(施恩)이었으며, 바르게 회향해 중생의 행복을 위해 살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송정에 위치한 쿠무다 카페 전경.

불사로 회향, 부처님 일에 포기는 없어!
대학공부를 이어가며 스님은 김천 해은사 주지도 맡아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함양에 절터가 있다는 소식에 도반들과 함께 찾아갔다.

“학교 공부를 하며 영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러니 도반들과 찾아간 함양이 이후 대운사가 될 거란 생각은 꿈에도 못했죠. 타 종단 스님이 운영하던 사찰이었는데 가보니 계곡도 있고 절터가 좋다고 생각됐어요. 계약을 했죠. 사실 고생문이 열린 거였어요. 도반들과 계약 후 앉아서 같이 노래를 불렀는데 ‘우~울려고 내가 왔던가’ 그 노래 아시죠?(웃음) 터는 좋았지만 할 일이 너무 많았어요.”

기도를 위해 스님은 운문사 사리암을 찾아갔다. 힘든 시기마다 스님은 기도를 잊지 않았다. 시주자가 나타났고 무사히 계약도 마쳤다. 이후 부처님을 법당에 바르게 모시고 싶었다.

“계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천주교 신자가 찾아왔어요. 학교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어떻게 싱크대 위에 부처님이 앉아 있을 수 있느냐?’는 말을 하더군요. 그 때 계약 후 불사가 진행되기 전이였지만 순간 부끄러워졌어요. 타 종교인에게 이런 말을 듣고 나니 법당을 제대로 조성해 부처님을 바르게 모셔야겠다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스님은 즉시 불모(佛母)를 찾아 갔다. 은행나무로 삼존불을 모시고자 했다. 여력도 없었던 시기였지만 부처님 일이니 일단 부딪혔다. 3일 후 마산에서 시주를 위한 다른 인연이 나타났다.

“공심으로 하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2009년에 극락전, 요사채, 삼성각 모두 1,000평에 이르는 불사를 마무리 하고 대운사 낙성식을 했습니다.”

그리곤 스님은 곧장 함양 대운사를 범어사 말사로 등록했다. 공심과 대중을 더 가깝게 만나고 싶다는 원력이었다.

“함양 대운사를 불사하는 동안 사연도 많았어요. 주변 땅이 문중 소속인걸 알고는 더 놀랬죠. 땅을 사기 위해선 문중 어른들의 도장이 필요하더군요. 문중이 모이는 야유회도 찾아갔어요. 노력을 다 했죠. 불사를 마무리 하니 대중포교를 위해서 도심으로 더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아무 조건 없이 범어사 말사로 등록하고, 부산 해운대 달맞이로 완전히 내려왔습니다.”

주석 스님은 불사가 한창인 가운데 이미 해운대 달맞이에 대운사 부산불교학당을 열어 대중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 때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원력을 세우고 문화포교에 뛰어든 것이다.

쿠무다 내 북 코너트 진행 모습

해운대에 카페 ‘쿠무다’ 세우다

“종교는 항상 열려 있어야 된다”
카페 형식의 복합문화공간 갖춰
문화로 불교와 자연스럽게 교감
현대인 마음치유 해법은 ‘문화’

 

문화 포교의 아이콘, 쿠무다
쿠무다 앞 송정 바다는 서핑족들의 메카로 부상해 1년 내내 에너지가 넘치는 곳이다. 2013년 12월 쿠무다 개원은 혁신이었다. 사람들에게 사찰은 산속에 있는 것이 익숙했다. 하지만 사찰이 바다 앞에 위치한 것이다. 게다가 기존 사찰의 모습에서 벗어났다. 1층은 북 카페, 2층은 절 대운사가 있었다. 북카페에는 세계 각국의 커피향이 흘렀고 디저트는 마카롱과 화려한 케이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뿐만 아니라 매달 열리는 다채로운 전시와 북 콘서트, 음악 연주로 채워졌다.

주석 스님은 “불교가 고정된 틀에 갇혀 있다”며 “현대에 발맞춘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백화점을 갔을 때 7살쯤 된 아이가 ‘스님도 이런 곳에 오나요?’라며 질문을 했어요. 그 아이에겐 누가 스님은 백화점을 가면 안 된다고 가르쳤을까요? 사고의 세습은 고정된 틀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틀 안에 불교를 집어넣고 꼼짝도 못하게 합니다. 참선 혹은 실참이란 단어로 현대인에 다가가면 어려워합니다. 하지만 대기업에서 명상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열광을 하죠. 한국불교는 시대의 부름에 대답해야 합니다. 다양한 모습으로 현대인에게 다가가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옛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불교문화 속에 주석 스님의 행보를 ‘튀는 돌’처럼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새로운 불교 패러다임이 됐다. 전국 사찰에는 북카페와 커피숍이 들어섰고, 이 공간은 전시회 등 예술문화가 만나는 곳으로 활용됐다. 더 젊어진 사찰 풍경에 많은 이들은 좋아했다.

“파리 거리에서 오래된 성당에서는 종교와 상관없이 아름다운 음악들이 흘러나와요. 유학 시절 짧은 휴식을 주던 그 공간에서 불교도 할 수 있다는 꿈을 꾸었어요. 이젠 이 꿈도 어느 정도 이루고 있으니 이젠 학교입니다.”

문화대안학교를 열기 위해 구상 중이라는 스님의 말씀.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에서 보이지 않는 깊은 곳, 심연(深淵)이 떠올랐다. 바다의 고요한 중심이 파도의 원동력이다. 부처님을 향한 스님의 곧은 중심, 그것은 사랑이었다. 중생이 행복하길 바라는 스님의 마음이 도전의 원동력이었다.

하성미 기자  jayanti@hyun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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