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선수행이 시작된 것은 신라 말 구산선문이 일어나면서부터다. 원효, 의상의 시대에서 100여 년이 지난 이후 중국선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다. 최초의 선을 전래한 사람이 도의국사(道義國師)다. 도의국사는 현재 조계종 종조(宗祖)로 추앙받는 스님으로 784년 선덕왕 5년에 당나라 사신을 따라 유학을 가서 오대산으로 들어갔다가 광부(廣府)의 보단사(寶壇寺) 계단에서 비구계를 받는다.

그리고 조계산으로 가서 육조 혜능대사의 영정을 참배한 후 강서(江西)에 있는 홍주(洪州) 개원사를 찾아가 서당지장(西堂智藏)을 친견하고 스승으로 받들어 가르침을 받고 서당의 법을 전해 받았다.

이때 서당이 도의라는 호를 지어주면서 “그대 같은 사람이 아니면 누구에게 법을 전해 주랴.”고 말했다 한다. 〈경덕전등록〉에 수록된 내용에 지장의 제자 4명 가운데 계림도의선사(鷄林道義禪師)라는 이름이 나온다. 도의는 다시 백장회해(百丈懷海)를 찾아갔다. 법을 물으며 대화를 나눈 후 백장도 “강서의 법이 모두 동국(東國)의 스님 것이구나”하고 감탄을 하였다고 한다.

도의 국사는 821년에 신라도 귀국했다. 그가 선법을 펴려했으나 당시 신라조정이 부패하고 의교수행(依敎修行)의 관습에 젖어 있던 불교계가 불입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의 선의 기치를 마설(魔說)이라고 비방하며 배척하는 등의 일이 나타나자 법을 펼 시절인연이 미숙함을 알고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한다. 그 기간이 40년이 되었다. 그러다가 제자 염거(廉居)에게 남종선을 전수하고 입적(入寂)하고 만다. 법을 전해 받은 염거도 제대로 선법을 펴지 못했다. 제자 보조체징(普照體澄)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입적하였다.

체징(體澄: 804~880)은 옹진(충남 공주)출신으로 어릴 때 출가해 도의의 법을 전해 받은 염거(廉居)를 찾아가 그의 법을 이은 도의의 손제자다. 체징도 당나라에 들어가 여러 선지식들을 참방하고 3년을 있다 840년에 귀국한 스님이다. 마침 체징이 860년 경 헌안왕의 권유로 전남 장성군 유치면 가지산 보림사로 이주를 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김경언 등 신라 중앙 귀족들의 후원을 받아 산문을 연다. 이리하여 가지산문이 개창이 된 것이다.

그런데 체징이 개산하면서 도의를 제1조로 하고 염거를 2조로 자신을 3조로 하여 남종선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으므로 가지산문의 개창자를 도의로 보는 것이다. 이후 보림사 가지산문의 선맥이 고려말까지 이어져서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 1206~1289)선사도 가지산문에 속한다.

이어 구산선문(九山禪門)이 차례로 개창되면서 마지막으로 개창된 긍양(兢讓)의 희양산문(曦陽山門)에 이르기까지 115년이 걸리면서 선법 수행이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신라는 하대(809∼935)에 이르면 왕위쟁탈전과 사치, 부패 등으로 골품제가 와해되면서 통치력이 약화되고 지방 분권화 현상이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등 왕조의 붕괴를 예고하는 조짐들이 도처에서 나타났다.

불교계 역시 시대의 흐름을 외면한 채 왕실과 중앙 귀족의 절대적인 후원을 받고 있다가 새로운 산문의 수행불교가 일어남에 새로운 형태로 변하게 된다. 새로운 사상에 목말라하던 신라의 스님들은, 선진사상이라 할 수 있는 선종을 배우기 위하여 당나라로 간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배움을 마치고 귀국하여서는, 선법을 바탕으로, 새로운 불교를 일으키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선사들은 지방의 산간 오지에 선문을 개창함으로써 지방 호족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귀의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드높은 수도정신과 더불어, 선종 본래의 사원노동을 중시하고, 불성(佛性)의 보편성을 강조하여 신분의 고하를 묻지 않는 선사들의 태도는 일반 민중들의 광범위한 지지도 받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구산선문은, 나말여초라는 격변기를 헤쳐 나갈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그 당시의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자리 매김 하면서 선법을 정착시켜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