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보살의 즐거움

勝解脫品第十七

更有餘三昧定慧境界生皆悉作佛。以有此三昧故不欲取於解脫。頭陀除一切過惡寂滅如在口中。?濟者 生苦故而不證取。
定慧悲自生/ 見世間苦/ 世間?濟者/ 終不越度去
如海潮終不過限。修悲者百劫苦行。若能度於一人終不出生死力。能得解脫。生故處於生死。於三種施一切時常如節會。不樂己樂他作樂。日夜於生死中而不處。歡喜快樂如處涅槃。菩薩常生作利益業歡喜樂味智。菩薩乃於夢中得歡喜樂。勝於解脫。菩薩得他作樂歡喜氣味。諸有生不得氣味證於解脫。


번역|승해탈품 제17
한편, 나머지 삼매와 정혜의 경계로 중생이 모두 부처를 이루나니, 여기서 삼매가 있기에 해탈을 취하려하지 않으며 두타행으로 일체의 과오를 제하니 적멸이 입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진실된 구제자는 중생을 괴로움에서 건지려 해탈을 취하지 않습니다.

선정과 지혜와 자비로 스스로 나서/ 세상의 중생을 보나니/ 세상의 진정한 구제자는/  끝내 훌쩍 건너가지 않습니다.

조류가 끝내 한계를 넘지 않듯이 자비 수행자는 백겁의 고행을 하되, 만약 한 사람이라도 구제할 수 있다면 생사의 힘에서 끝내 벗어나지 않나니, 해탈을 얻을 수 있어도 중생 때문에 생사에 거합니다. 세 가지 보시에는 언제나 절기처럼 모이고, 자신의 즐거움은 즐기지 않으며 타인을 즐겁게 합니다. 밤낮으로 생사에 머물지 않으며, 환희와 쾌락에는 열반에 머무는 듯합니다. 보살은 늘 중생의 이익 되게 하려 지혜의 맛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업을 짓습니다. 보살은 꿈에라도 즐거워하는 것은 수승한 해탈이니, 보살은 타인을 위하는데서 즐겁고 환희를 맛보되 중생은 해탈을 증득할 기미를 얻지 못합니다.


해설|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입 안에 먹을 걸 넣어두고 배고플 것을 걱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수행자에게 해탈이란 것도 그렇다.

순간순간 삼매 속에서 사니 무슨 해탈을 따로 구하려 하겠는가. 근심이 있어도 그 근심을 걱정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언제나 평안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사조차 이미 생사가 아닌 수행의 길에서는 힘겨운 삶과 생사의 파도에 휩쓸려도 두려움이 없다.

오로지 수행자는 삼시(三施)에 나아감에 있어 명절의 모임에 가는 것 같은 기쁨으로 나아간다도 제바 보살은 설한다. ‘삼시(三施)’란 재물을 보시하는 재시(財施), 법을 보시하는 법시(法施),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무외시(無畏施)다. 또한 보살이 즐겨 맛보는 것은 지혜라고 말한다. 그 지혜의 즐거움은 역시 남을 기쁘게 하는데서 얻을 수 있고, 남을 기쁘게 하는 방법을 아는 지혜라고 말한다.

남을 기쁘게 하는 지혜의 방법으로는 두타행(頭陀行)을 실천한다고 설한다. 두타행이란 의식주(衣食住)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말한다. 수행자는 부하면 부함에 처할 줄도 알고, 가난하면 가난에 처할 줄 안다는 말이다. 어떤 도반이 내게 한 고백이 생각나서 소개하고자 한다.

“출가할 때 생각했었지. 이생에 출가하여 부처님 법을 배우는 복을 누리게 되었는데, 저 논두렁을 베고 누운들 무슨 아쉬움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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