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짧다, 풀 끝 맺힌 이슬 같다. 스무 살까지는 세월이 더디 가지만 마흔을 넘기면 세월은 날아서 간다. 육체는 나날이 늙어 절반이 병(病)이요, 절반이 어둠이다.

대화 나눌 벗은 갈수록 줄고 삶의 언저리엔 뱀의 허물같은 외로움이 빈집의 거미줄처럼 널려있다. 금슬 좋던 부부사이에도 쉰내를 풍기며, 보고 듣는 일상이 힘에 겹다. 품으로 낳아 기른 자식들도 주면 좋아하고 현찰 거래가 줄면 멀어지는 세상이다. 정신세계를 밝혀준다는 종교계의 신앙에도 돈이 신(神)이 된지 오래이다.

불교의 세 가지 보배는 가정에 있다
배우자는 부처님, 자녀는 나한님이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마른 손아귀에 잡히는 것은 알곡 없는 검불 떼기의 공허로움이 마른버짐처럼 번질 뿐이다. 지지리도 복이 없는 팔자타령으로 위안 삼으려 해도 현실은 톡 쏘는 사이다 맛처럼 대충 눈감아 주거나 넘어가는 법이 없다. 있으면 모이고 없으면 떠난다. 줄때는 엄지척이요 필요할 때는 손사래 치며 멀어져 간다.

장관 집 개(犬)가 죽으면 문상객이 몰려오지만 정작 장관이 죽으면 문상객 대신 찬바람이 몰아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혼자 있을 때는 홀수의 외로움이 지겨워 짝수를 희망하지만 짝수가 되고 나면 벽과 틈이 생겨 삭풍이 몰아칠 수도 있을 터이다.

대화는 날이 갈수록 단절되고 이해의 폭은 세월의 톱니바퀴처럼 지겹도록 졸아든다. 불만과 권태는 시계추처럼 멈추질 않고 이혼서류에 도장 찍고 싶은 충돌은 어둠만큼 비례하여 삼시세끼처럼 일어난다.

생각을 바꾸고 입장 바꿔 상대방 입장과 처지를 부처님처럼 받아들이려 해도 싸가지 없고 싹수 노란 절망의 늪은 용서를 멀리한다.

옷깃 한번 스친 것도 인연이라지만 차라리 생명의 옷까지 벗고 싶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를 생활의 언어로 삼아 칭찬의 부드러운 말 보시(布施)를 가정에서부터 실천하라지만 상대자로부터 듣고 싶을 뿐 닫혀 있는 마음만큼 입도 열리지 않는다.

밖에서는 리더(Leader)요 지도자요, 사람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지만 집에서는 쪼다에다 머저리, 말이 없는 등신에다 자기만 챙기는 병신이다. 생각의 윤회(輪廻)를 줄여 보살심으로 받아들이며 용서하며 입장 바꿔 생각하려해도 목소리와 몸짓에서 구린내 풍겨 오는 것은 어찌하랴!

인생은 짧다. 풀 끝에 맺힌 이슬 같다. 짧디 짧은 인생길에 반려자가 있어 행복하다. 팍팍하고 고단한 길도 둘이 함께 걸으면 힘이 된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은 자식 기르는 솔솔한 기쁨을 세상의 그 어떤 기쁨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찬물을 마시고 살아도 가족이 힘이요 행복이요 삶의 전부인 것이다. 부부끼리 토라지고 등 돌리고 싸움이 길어질 수 있으나 예로부터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 싱겁게 화해하고 하나가된다.

불교의 〈옥야경〉에서 만나는 일곱 가지 아내처럼 마음이 열리면 부모 같고 스승 같고 오누이 같고 친구 같은 반려자와 함께하는 것이다. 마음이 닫혀 있을 때에는 원수처럼 종처럼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반려자를 가볍게 멀리하는 법이다.

아내와 남편은 같은 사람인데 마음의 변화에 의해 7가지 아내 7가지 남편으로 분별하는 분별심을 경계할 일이다. 부부인연 자식인연은 하늘이 정해준 소중한 인연으로 천륜(天倫)이라 하지 않던가. 말 한마디 행동 한 점에도 마음을 담아 천 번이라도 용서하고 만 번이라도 사랑하며 받아들이는 자비로 살 일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세 가지 보배(三寶)는 사찰의 기도도량에 있는 게 아니라 가정에 있다. 아내와 남편은 움직이는 부처님이요 아이들은 장난을 즐기는 나한(羅漢)들이다. 가정의 행복과 평화는 진리를 상징하는 법(法)이요 가정의 화해(和解)와 바른 교육은 화합(和合)을 상징하는 승(僧)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가까이 있는 것이다. 숨어있지 않고 드러나 있는 것이다. 어차피 세상은 빛과 어둠이 반반이다. 〈법화경〉의 가르침처럼 사람을 부처로, 〈화엄경〉의 교훈처럼 일체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一切唯心造)됨을 두고두고 잊지 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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