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 살아간다. 행복은 느끼는 것이요, 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 따라 눈높이에 따라 행복의 현주소가 바뀔 수 있다. 색깔에 따라 무게와 느낌에 따라 행복과 불행은 번갈아가며 생각의 윤회를 거듭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눈, 귀, 코, 입, 몸, 뜻의 열린 문으로 들어 왔다가 눈, 귀, 코, 입, 몸, 뜻의 닫힌 문 일 때 불행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과 불행은 둘이 아닌 하나이다. 열고 닫힘에 따라 빛이 어둠이 되고 어둠이 빛이 되는 이치이다.

모든 병은 집착에서 비롯된다
텅 빈 충만 주는 행복 누리길


세상의 절반은 빛이요 절반은 어둠이다. 절반은 행복하고 절반은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희(喜)·노(怒)·애(哀)·락(樂)은 고정된 모양의 틀이 아니라 주변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안개와 같고 물의 흐름과 같다. 영원히 행복한 사람을 만날 수 없듯 영원히 불행한 사람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이 낮과 밤으로 이루어져 있듯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있고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교 신앙 쪽으로 기우는 것도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찾기 위함이다. 불행을 멀리하고 행복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다. 영원한 행복, 영원한 자유는 산자들이 누구나 누리고저 하는 꿈의 유토피아(Utopia)이다.

영국의 사상가 토머스 모어가 만들어낸 말이지만 ‘어디에도 없는 장소’,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를 그리워하며 예로부터 천국(天國)과 극락세계를 만들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팍팍하고 고단하다. 허무하고 무상(無常)하다. 질긴 삶도 지나고 보면 풀끝에 맺힌 이슬이요 허무의 그림자로 막을 내리는 몇 마당짜리 연극 같다. 모인 관중이 막 내리면 흩어져 빈 마당이 되듯 재산, 명예 흩어지고 사라지면 누구나 적막강산의 홀수가 된다.

어지간히 다투며 싸우며 몸부림치며 모으고 챙기고 쌓아온 재산과 명예가 해질녘 되돌아보면 마른모래를 쥐고 있던 빈주먹의 싸한 아픔뿐이다.

삭신이 세월의 무게에 녹이 슬고 기능의 동작이 더뎌가며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되면 삶이란 검불떼기 같은 가벼움의 눈물뿐이다. 살면 얼마를 살까싶어 나누기, 비우기, 덜어내기. 몸과 마음으로 이별을 연습하고 있지만 가슴 싸한 추억은 몇 방울의 눈물방울로 남는다.

사람이 앓는 모든 병은 집착에서 비롯된다. 늙어서도 철이 덜 들어 명예와 재산 쪽에 기웃거린다면 그는 얼간이요 머저리 등신이다. 분주한 몸짓도 서서히 거둬들여 잔잔하게 개운하게 마무리의 마침표를 준비해야한다.
불교 매체를 보면 스님은 복 짓는 설법이요 사찰알림은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진다는 광고로 도배돼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열려있으나 사찰과 스님들은 막혀있는 행위로 부끄러움을 더해가고 있는 현실이다.

물론, 바른 불교 바른 신앙의 열린 사찰과 열린 스님의 설법이 없지 않으나 사찰경제를 앞세워 오늘날의 불교계는 망가지고 있는 느낌이다.

수행자답게, 스님답게 말과 행동이 맑고 밝아야한다. 방편설(方便設)을 앞세워 목탁불교로 신앙을 돈으로 거래할 일은 아닌 것이다. 설법 내용은 경전 중심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어야 하고 설법자 스스로 깨달음을 향한 부끄러움이 없는 당당한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

진솔하게 순수하게 당당하게 넉넉하게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말하고 실천하는 행동인이 되어야 한다. 검소하고 가난하게, 그 가난함이 부끄럽지 않고 떳떳하게 하루하루를 아름답게 마무리하며 살 일이다.

인생이란 흔들리면서 헐떡이면서 서서히 철이 들다가 막을 내리게 되어있다. 그러나 일반론적인 것에서 수행자는 일찍 깨어 있어야한다. 허울의 옷을 훌훌 벗고 끌어당김의 머묾에서 자유로워야 수행자이다. 더욱이 독신 수행승이라면 비우기 나누기 덜어내기의 참 주인공이 되어야한다. 텅 빈 충만의 행복과 자유를 누리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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