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이야기, 상식적인 이야기를 해야겠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시인은 배가 고파야 시(詩)를 쓴다. 배부른 시인, 할 일 많은 시인, 명예를 쫓는 시인은 시(詩)쓰는 일을 게을리 한다. 창작에 대한 목마름, 설렘이 졸아들었기 때문이다.

시 쓰는 작업보다 다른 일에 정신이 쏠려 있기 때문이다. 생활이 풍요로우면 시에 대한 열망과 의욕이 사라져가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배부른 승려가 있다고 치자. 그 승려는 색깔만 승려일 뿐 승려의 본분사(本分事)에서 멀어진지 오래일 터이다. 순수와 진솔함은 사라져 속물근성으로 뒤바뀌고 타산적 계산놀이에 분주함만 더할 터이다.
순수해야 할 신앙마저 흥정의 대상이 되고 넘치는 재력으로 조직 따위를 길들이고 있다면 그는 무늬만 승려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 구도자는 아닌 것이다.

수행자에게 가난은 부끄러움 아냐
초발심 충실한 승려 덕목을 지켜야 


어떤 분이던 승려가 되기 위해 처음 생각을 굳힐 때는 크고 작은 장벽의 괴로움에 뜬눈여행을 겪었을 것이다. 부처님의 경전을 배우며 환희심으로 발심(發心)하는 분도 있고 모태신앙에 젖어 막연하게나마 승려의 꿈을 키운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출가(出家)의 관문은 통과의례처럼 석가모니의 사문유관(四門遊觀)처럼 무상함과 괴로움 허무의 그림자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출가 동기에 대한 정답은 정해져 있을 리 없으므로 이쯤해서 출가이후로 넘겨보자.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變正覺)’이란 말이 있다. 처음 발심 그대로 바른 깨달음을 완성한다는 의미일 터이다. 처음에 발심했던 그 마음 그대로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라는 경책의 말씀이기도 한 것이다.

많은 스님들이 9할이 넘는 스님들이 초발심시변정각의 마음으로 다지고 채찍질하며 게으름 없이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고 있다. 다만 지극히 일부이긴 하나 초발심(初發心)이 변하여 깨달음이 아닌 제도권의 오욕락에 물들어 간다는 사실이다. 신도 숫자 늘리는 일이 사찰경제에 보탬이 되는 계산놀이에서, 사찰 홍보가 부처님의 가르침 중심에서 영험설화를 흉내내는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지는 도량으로 둔갑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불교계 언론매체의 광고에는 상식과 기본이 흔들리는 상업성 사찰 홍보물이 쏟아져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실력없는 스님들이 출연을 자제하면 좋으련만 교수와 거사설법이 공감대를 더욱 키워가는 현실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열려있으나 그 열린 가르침을 몸과 마음으로 녹이는 구도열망은 날로 엷어지고 있다. 현실적 타협을 앞세워 제도권의 세속화에 물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신도들의 주머니는 비어있어도 주지스님의 주머니는 비어있는 경우는 드물 터이다. 신앙이 돈으로 흥정되어 거래 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은 마음 편히 돌아가신 분들의 천도재도 사찰 찾아 지낼 수 없을 만큼 500만 원, 1000만 원에서 턱걸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승려가 신도들을 위해 울리는 목탁에도 기도기간에 따라 동참금도 비례하여 올라가는 현실이다. 궤도 이탈을 즐기는 일부 사찰에서는 사주풀이와 부적을 팔아 지성인들의 실망과 외면을 키우고 있다.

지극히 일부이긴 하나 TV에 출연하는 스님들의 장삼과 가사가 천연실크로 된 몇 백만 원짜리 옷을 걸쳤다면 가난한 대중 앞의 떳떳한 옷차림일 수 있겠는가? 조금은 미안해하고 부끄러워하며 승려의 본분사(本分事)에서 크게 이탈하지 말 일이다. 상식이 통할 수 있게 기본에 충실한 승려의 기본덕목을 지켜야 한다.

비구는 걸사(乞士)이다. 승려의 몸에 걸치는 가사는 원래 분소의(糞掃衣), 똥 닦고 걸레질하던 천으로 이어 만든 옷에서 비롯되었다. 수행자에게 있어 가난은 불편함일 수는 있어도 부끄러움이 될 수 없는 법이다. 욕심은 키울수록 병(病)을 키우지만 버림과 비움은 텅 빈 충만의 자유와 행복에 이르는 바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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