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종은 불교책을 읽었을까

“언해불전 보지 않은 채 세종 평가 말라”
‘함께 읽고 논란 하자’는 의미도 포함된 듯
저자의 주석 중심 독특한 편집도 ‘눈길’


불광 펴냄 / 오윤희 지음 / 2만원

정도전의 〈불씨잡변〉을 비롯해 조선의 선비들은 불교를 허무의 종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불교는 선비들이 믿는 하늘이나 운명, 변하지 않는 성품 따위는 믿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모두 중생의 의식이 지어낸 망상이라 허망하다고 주장한다. 조선의 선비들은 그런 불교를 이단으로 배척했다.

사대부 양반들의 숙원인 억불 정책을 통해 조선에서 불교 입지를 좁힌 유학군주 세종대왕. 그런 그가 불교 책을 읽고 펴낸 것은 당시로서 가히 혁명이었다. 신하들의 강력한 거듭되는 반대에 세종은 언로를 차단한다. “현명한 신하의 말이 무지한 임금에게 먹힐 리도 없고, 무지한 임금의 말이 현명한 신하의 귀에 찰 리도 없다. (중략) 귀찮게 자꾸 청하지 말라.”

도대체 무엇이 세종 임금을 이토록 변하게 했을까? 불교가 무엇이기에 세종은 신하들의 입까지 막았을까? 오윤희 前 고려대장경연구소장〈사진〉이 불교를 억압한 조선 왕조가 불경을 간행한 배경을 분석한 〈왜 세종은 불교 책을 읽었을까〉를 최근 펴냈다.

세종뿐 아니라 1461년 즉위 7년째를 맞은 조선 세조는 불경을 간행하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세웠다. 이는 한문본뿐만 아니라 우리말 풀이를 한 언해본(諺解本)까지 간행했다.

저자는 “세조가 간경도감을 세워 여러 경전을 보급한 것은 세종의 유훈을 따랐기 때문”이라며 “무언가를 시도하려 할 때마다 무조건 ‘안 된다’는 상소만 올리는 사대부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언해불전은 이념투쟁, 계급투쟁의 도구

왜 세종은 한글로, 불교 책을 펴냈을까? 이 화두에 저자의 번뜩이는 상상력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저자는 “한글로 불교 책을 펴낸 까닭이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보고 살피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면, 또 알게 된 백성들이 이전까지는 지배층에게만 허용되던 것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그래서 지식과 권력과 금력을 백성과 지배층이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세종의 훈민정음과 언해불전은 지배층의 특권을 허물려는 이념투쟁, 계급투쟁의 도구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능엄경언해〉를 비롯한 언해불전 다수의 핵심 내용은 “누구나 보아 살펴 사랑하면, 즉 관찰하고 사유하면 똑바로 보고 똑바로 생각할 수 있으며 그렇게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라며 이는 하늘이 신분을 결정한다는 당시 유교사회 원리에 배치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세종·세조 때 문신인 김수온의 〈사리영응기〉를 보면 “261명 사람들이 귀천 없이 함께 영원토록 동행하고 부처 되기를 기원하며 서로를 향해 절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구절 가운데 “성상”, 즉 세종의 덕을 입어 그 모임에 모두 참석했다는 구절이 있다. 조선의 계급이, 적어도 이 장면에서만은 잠시라도 무너졌었다.”라고 설명한다.

선사들의 말투… ‘입말의 활어’

이왕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일, 쉬우면 쉬울수록 좋았을 것이라고 저자는 책에서 밝힌다. 언해불전 사업에 조선의 선사(禪師)들이 참여한 것은, 이 점에서 탁월한 결정이었다. 선사들의 말은 시장통과 여염집서 쓰던 ‘입말’이었기 때문이다.

선사들의 말은 ‘입말의 활어’다. 그들의 말투에서는 어려운 개념어와 추상어 대신 쉽고 생생한 동사, 형용사, 부사 같은 서술어와 수식어가 관건이다. 그들은 엘리트 교육을 받은 소수 지식인들의 말과 글에 맞서기도 했다. 동네 사투리, 속담과 속어를 써서 누구나 어디서나 쉽게 통할 수 있는 말의 전통을 세웠다. 문자는 몰라도 동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었던 우리 입말 전통이었다.

준동함령(蠢動含靈)은 (뭇 생명의) 꿈틀대는 모습을 그린 '구믈구믈하다'로 되살리는 등 어려운 한자어나 개념어보다는 쉬운 우리말, 그 중에서도 동사를 잘 활용해 번역한 것이 놀라웠다며 언해불전 속에 담긴 선조들의 우리말을 다루는 기술에는 지금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좋은 장점과 모델이 있다고 저자는 강조했다. 예를 들면, ‘준동함령(蠢動含靈)’은 (뭇 생명의) 꿈틀대는 모습을 그린 ‘구믈구믈하다’로, ‘성성(惺惺)’은 고양이가 쥐를 노리듯 지혜가 분명하게 작용하는 모습을 그린것으로 되살아났다. 어려운 한자어나 개념어보다는 이쪽이 이해하기 쉬울 터다.

저자는 또한 “이 책의 주 공격 대상은 유학자들이라며 우리말 불경 주석을 보면 유학자들에 대한 불평이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언해불전은 종교책이라기보다는 사상서다. 조선의 지적, 사상적 지형도의 단서가 여기 들어있다. 세종이 갖던 지적 성향과 군주로서의 정치적 성향이 담긴 언해불전을 보지 않은 채 세종대왕을 평해선 안 된다"고 조언했다.

한문불전 전산화 작업을 해 온 저자가 언해불전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관심을 둔 것은 주석 중심의 독특한 편집형식과 우리말 번역이다.

또 하나의 의도… 열린 지식 전통 되살리기

일본 승려 엔닌(圓仁, 794~864)은 〈입당구법순례행기〉서, 당나라에 머물던 신라 사람들이 승속, 남녀, 노소, 존비의 차별 없이 한자리에 모여 〈법화경〉을 신라 말로 함께 읽고 토론하던 장면을 묘사한다.
“남녀 승속이 함께 절 안에 모여 낮에는 강연을 듣고, 저녁에는 예참(禮懺), 청경(聽經) 등이 차례로 이어진다. 승속의 숫자는 사십여 명이다. 그 강경과 예참은 모두 신라의 풍속을 따르지만, 저녁과 새벽의 예참은 당나라의 풍속을 따른다. 나머지는 모두 신라 말로 한다. 집회에 참석한 승속, 노소, 존비(尊卑)는 모두 신라 사람들이고, 단지 세 명의 중과 행자 하나가 일본 사람이다.”

신라 때도 있었던, 함께 읽고 토론하던 전통. 권근이 묘사한 목은 이색의 학풍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된다. “매일 강의가 끝나면, 의심스러운 뜻을 두고 서로 논란하여 각각 끝까지 의심을 풀었다.” 하지만 조선 초의 억불과 세종의 불사를 둘러싼 논란에서는 이러한 열린 태도를 찾아보기 힘들다. ‘불교가 고려를 망쳤으니 조선에서는 아니 되옵니다.’ 성리학 선비들은 이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그들의 논리에는 자기 생각이랄 게 없다. 자신들이 떠받드는 성현 주자의 말을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외울 뿐이었다. 세종은 이런 데 질렸고, 그래서 입을 닫았다.

어쩌면 세종이 언해불전을 펴낸 이유 가운데는, ‘함께 읽고 논란하는’ 열린 지식 전통을 되살리려는 뜻도 들어 있었는지 모른다. 혁명의 일방적인 거센 물결 속에 휩쓸려 사라진 이 문화가 되살아나야만, 거친 앎으로 인한 폐해와 성리학자들의 독주를 막고 조선을 제한적이나마 열린사회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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