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특별인터뷰 경허·만공선양회장 옹산 스님

2011년 완공된 수덕사에 위치한 만공 선사 기념관 내부
1937년 미나미 총독 향해 불호령 ‘사자후’
일제시대 조선불교계 내선일체 정책 항거
〈총독부 30년사〉, 조선불교진흥 실패 인정
유공자 선정과 독립운동 인명사전 등재 추진
9월 20일 수덕사서 ‘만공선사 학술대회’

1937년 3월 11일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선 전국 불교 31본산(本山) 주지 회의가 열렸다. 회의 의제는 ‘조선불교 진흥책’. 서슬퍼런 미나미(南次郞) 총독을 비롯해 조선 13도지사, 그리고 31본산 주지 스님들이 참석했다. 미나미는 전국 본산 주지 스님들을 향해 강압적인 어조로 입을 뗐다. “앞으로 조선 불교는 일본 불교와 합병해 더 큰 진흥을 이뤄야 할 것이다.”

어처구니 없는 말이지만 누구 하나 정면으로 반박하지 못했다. 이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책상을 두 손으로 내려치는 사람이 있었다. 마곡사 주지로 회의에 참석한 만공 선사(1871~1946)였다. 스님은 미나미 총독을 한 손으로 가리키면서 큰 소리로 일갈(一喝)했다. “청정(淸淨)이 본연(本然)하거늘, 어찌하여 산하대지(山河大地)가 나왔는가”라고. 이어 스님의 불호령은 멈추지 않았다. “데라우치 전 총독은 조선 승려들을 파계시킨 죄인이다. 그는 죽어서 무간지옥에 떨어져 고통받을 것이다. 이런 자들을 지옥도에서 구하고 조선불교를 진흥시키는 일은 조선 승려들이 수행을 통해 견성하는길 밖에 없다. 총독부는 조선 불교를 간섭말고 우리 조선 승려에게 맡기는 것만이 유일한 진흥책이다. 이것이 바로 정교분립인 것이다.”

만공의 사자후(獅子吼)가 너무 격렬해 총독은 식은땀만 흘리며 다시는 망언을 하지 못했다. 이 사건은 당시 조선불교 10대 뉴스로 기록될 정도로 파문이 컸다.

이 당시 일제가 받은 충격의 상태를 보여주는 문건이 최근 발견돼 화제다. 1937년 발행된 〈불교사〉 잡지와 1940년 발간된 〈조선총독부 시정 30년사〉에 기록돼 있다.

“조선불교 진흥을 위해 노력했지만 기대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렇게 식민정책에 의해 왜곡된 조선불교의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일제에 강력히 맞선 만공 선사의 독립 유공자 선정과 독립운동 인명사전 등재가 추진되고 있어 불교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경허·만공 선양회 회장 옹산 스님〈사진〉은 지난 5월 10일 관련 신청서를 국가보훈처에 냈다.

옹산 스님은 “총칼로 싸우지는 않았지만 목숨을 내건 강렬한 만공 선사의 일할은 조선총독부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무너 뜨렸습니다. 한국불교 역사에 길이 남을 이 투쟁은 무장투쟁 못지않은 중요한 항일운동입니다. 왜 유형적인 것만 중요하게 여기는지 이해가 안갑니다.”라며 섭섭함을 토로했다. 그도 그럴것이 만공 스님이 구속이나 복역이라는 형식 때문에 독립유공자 선정에 난항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옹산 스님은 “독립유공자 포상을 할때는 투옥된 사실이 있거나 확실한 재판문서 등 직접적인 항일운동의 증거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조문에 명시 돼 있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전쟁이 일어났을때 전장의 일선에서 총과 칼로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장과 목숨을 담보로 담판해서 사기를 꺾어 놓았다면 훨씬 더 승리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아닐까요? 일제에 저항해 정신적인 근간을 흔든 무형의 항일운동도 올해 광복 70주년을 계기로 재 평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경지를 몸소 보여주신 만공 선사는 목숨걸고 우리 한국불교를 지킨 진정한 독립운동가입니다. 반드시 독립유공자로 선정돼야 합니다. 정신적 지도자를 예우해야 진정한 선진국입니다.”라고 강경한 어조로 목소리를 높인다.

8.15 해방 소식을 듣고 만공 선사가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 꽃송이를 말아 쓴 ‘세계일화(世界一花)’ 친필 탁본 편액 앞에서 경허·만공 선양회 회장 옹산 스님이 상념에 잠겼다.
이어 옹산 스님은 말을 이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만공 스님은 1941년에는 일본의 식민불교정책에 항거하기 위해 선학원 고승대회를 주도했습니다. 이는 한국불교의 고수를 위한 투쟁을 일본에 천명한 것입니다. 스님은 이때 ‘망(亡)에 망이 없으면 망이 곧 진(眞)이오, 진에 진이 있다면 진이 곧 망이로다’라는 유명한 게송을 남기셨습니다.” 또한 옹산 스님은 “만공 스님은 일제에 저항한 불교 단체인 선학원과 조선불교선종의 창건 주역이고, 1941년 유교법회 최고 책임자로 일제 식민지에 저항한 명실공히 한국 불교정신의 구심점 역할을 하셨습니다. 당시 31본산 주지들 가운데 유일하게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한 분도 바로 만공 선사입니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옹산 스님은 “만공 선사는 1942년 서산 간월암서 조선 광복을 발원하는 천일기도를 입재했으며, 그 원력이 통했던지 천일기도를 회향한지 3일째 되던 날 해방을 맞았습니다. 아마도 이 천일결사는 조선인의 의지와 결속을 도모해주는 원동력이 됐을 것입니다.”라며 “만공 선사가 독립유공자로 서훈되면 일본대사관 앞에서 그 조상들을 일갈하며 꾸짖던 늠름한 모습의 스님 동상을 세우고 싶습니다”고 바램을 피력했다.

만공 선사는 근현대 한국불교 중흥조 경허 스님의 제자이다. 만공 선사의 가르침은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성철·청담 스님을 통해 이어졌다. 또한 만공을 수발하던 동자승 진성이 지난 2008년 열반한 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이었다. 옹산 스님의 스승이 원담 스님이니 만공 선사와 옹산 스님은 사손관계이다.

한편 수덕사와 경허·만공 선양회는 오는 9월 20일 오후 1시 수덕사내 황하정루서 ‘일제강점기 만공대선사의 위상’을 주제로 한 ‘제 7회 만공대선사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이은윤 前 중앙일보 종교전문 대기자가 ‘만공선사의 선지와 가풍’ △ 김광식 동국대 교수가 ‘만공정신사의 재인식’ △이재현 교수가 ‘만공의 항일 독립운동’ △안천 교수가 만공 선사와 의왕(거문고가 수덕사로 오게된 연유) 등을 주제로 발표한다. 또한 이날 토론자로는 심응섭 순천향대 명예교수와 고영섭 동국대 교수가 나선다.

이에 앞서 같은날 오전 10시 수덕사 대웅전에서는 前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의 10주기 다례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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