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멸보궁이 있는 사찰 ② 구미 선산 도리사

복사꽃, 오얏꽃 만발해 붙여진 도리사
아도화상 창건… 신라불교 초전법륜지
태고선원, 극락전서 세월의 무게 느껴
1977년 사리탑 해체 복원시 사리1과 발견

1977년 4월 세존사리탑 해체복원과정서 석가모니 사리1과가 발견됐다. 이 사리를 모시기 위해 지어진 적멸보궁이 도리사 제일 높은 곳에서 위용을 자랑한다.
부처님의 초전법륜이 인연을 따라 신라로 전해졌다. 아도화상에 의해서다. 아도화상이 신라에 전법하며 기승지를 찾던 중 눈 속에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 그곳에 절을 지은 후 도리사라 불렀다고 한다. 이 사찰은 신라 최초의 절로 전해진다. 눈여겨볼 보물로는 세존 사리탑과 화엄석탑이 있다. 대웅전 앞뜰에 세워진 화엄석탑은 크고 작은 석재를 이리저리 끼워 맞춘 모전석탑 계열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특이한 석탑이다.

도리사를 이해하기 위해선 창건주인 아도화상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아도화상은 위나라 사람인 아버지 아굴마(我塗摩)와 고구려 사람인 어머니 고도령(高道寧) 사이에 태어났다. 다섯 살에 출가 하고 열여섯에 아버지 나라에 유학해 3년을 공부한 후 고구려로 돌아온다. 하지만 당시 도교가 성했던 고구려에 불만을 품은 어머니 권유로 신라에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이때가 눌지왕 2년(AD 417)으로 이차돈의 순교에 의해 법흥왕14년(AD527) 불법이 공인되기 110년 전이었다.

옛 금당암 법당으로 추정되는 극락전
아도화상은 서라벌서 왕실의 관심을 받으며 불법을 설(說)하던 중 씨족 중심의 귀족들과 토착신앙을 숭배하는 사람들에 의해 불교가 배척 대상이 되자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지대인 추풍령아래 일선군에 몸을 숨기고 3년 간 은신한다.

공주의 병을 고쳐준 대가로 서라벌에 다시 돌아와 왕이 지어준 흥륜사서 불교를 전파하던 중, 미추왕의 사망으로 지금의 도리사 인근에 있던 모례(毛禮)의 집으로 숨어들어 낮에는 머슴살이를 하고 밤에는 불법을 전파 한다. 그 5년 동안 품삯 한 푼 받지 않고 소 천 마리와 양 천 마리를 길러내며 모례 장자의 큰 신망을 얻었던 아도화상은 어느 날 홀연히 그 집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고 나중에 아도를 만난 모례장자의 시주로 한겨울에 복사꽃과 오얏꽃이 만발한 냉산 기슭에 절을 세우니 바로 그곳이 도리사이다.

신라 불교 초전법륜지이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쇠락의 길을 걷는다. 숙종 3년(AD 1677년)에 큰불이 나서 절이 모두 불타고 아도화상이 좌선했던 산내 암자인 금당암만 남아있었는데 그 자리에 세운 절이 현재의 도리사라 전한다.

도리사 창건주인 아도화상 동상
해발 600m, 중간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절까지 걷는 길은 숨어 턱턱 막힌다. 다시 돌계단 올라 마주친 것은 설선당(說禪堂)이다. 그 곳을 끼고 오른 편으로 돌아드는 마당에는 요사채를 겸한 양반 댁 사랑채 같은 태조선원(太祖禪院)이 있다. 그 옆에 아름다운 당우 하나가 바로 극락전이다. 높다란 기단 위에 세워진 극락전은 앞, 옆이 각각 세 칸 짜리 정방형에 팔작지붕을 얹은 건물로서 무거운 지붕을 떠받치는 공포는 다포로 얹어 화려한 단청을 그려 넣었다. 이곳이 옛 금당암의 법당으로 19세기 초에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그 앞에 얼핏보면 돌 무더기로 보이는 석탑이 덩그러니 서 있다. 자태가 범상치 않다. 도리사 석탑(보물 제470호)이다. 세월을 이기고 계절이 만든 그늘 속에 여여히 서 있다. 높이 3.3m의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기존 석탑의 정형과는 전혀 다른 이형탑(異型塔)으로 양식을 따질 수가 없다. 땅위에 길게 다듬은 돌을 각 면마다 10여 개씩 세워 놓고 그 위에 기단을 만들었다. 기단은 각 면에 네모난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의 직사각형의 판석 6∼7매를 병풍처럼 둘러 세웠는데 유일한 장식이자 특징의 하나가 남면 중앙부에는 문짝을 조각해 놓은 것이다. 탑신 부분은 3중으로 각층마다 작은 석재를 중첩하여 얽거나 짜 만들었는데 상대적으로 강하게 축약된 모습이고 상륜부도 간략화 되어있다.

이 탑에서 극락전을 사이에 둔 뒤편에 세존사리탑이 있다. 1977년 4월 이 사리탑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서 금동육각사리함(국보 제 208호)과 석가모니의 사리 1과가 발견됐다. 이 사리함은 현재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사리는 도리사의 제일 높은 곳에 새로 지은 적멸보궁 뒤에 사리탑을 장대하게 만들어 넣어 놓았다.

전통 고찰 도리사는 조선시대 수많은 유학자들이 머물면서 공부를 했으며, 야은 길재 선생이 10살 때 이 사찰에서 글을 배운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


아도화상이 참선했다는 좌선대
주지 스님 추천 이것만은 클릭!

아도화상 참선한 좌선대…사적비도 있어

탑을 지나면 절 밖으로 나가는 작은 돌문이 있고 그 곳을 통과해 아래로 내려서면 아도화상이 참선했다는 좌선대(座禪臺)가 있다. 네 개의 자연석 위에 대충 다듬은 넓은 돌 하나를 얹어 한 평 남짓한 돌이다.
잠시 앉아 아도화상은 그 옛날 무엇을 발원했을까 상념에 잠긴다. 아도화상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피신해 찾아든 모례장자 집에 이르러 붉은 관을 쓰고 가사 입고, 조용히 참선하자 신령스런 빛이 하늘을 덮었다고 한다. 불교가 국교로 인정받기 힘들던 그때 이곳에 절집을 지은 후 불교의 싹이 봄날 복숭아꽃 피듯 만개하기를 바랬을까 상념에 잠긴다. 문화유산 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주지 묘장 스님도 1주일에 2~3번 이 자리에서 참선을 한다고 귀뜸하자 주변에 설명을 듣던 관람객들이 하나 둘씩 그 자리에 앉아 잠깐씩 참선을 한다.

좌선대 뒤에는 아도화상 사적비(阿道和尙 事蹟碑) 와 도리사에 시주한 사람과 논, 밭의 면적을 기록해 놓은 불량답시주질비(桃李寺佛糧畓施主秩碑)가 있다. 조선 효종 때에 세워진 사적비에는 아도의 일생과 불교를 전파한 내용, 도리사를 지은 과정도 새겨져 있다.

 

--------------------------------------------------------------------------------


[인터뷰] “사찰에 머무는 시간 늘었죠”

스토리텔링 안내판, 카페 개설 등 열린사찰 꾸리는
도리사 주지 묘장 스님

“도리사는 천년 고찰이지만 절 운영만큼은 현대에 맞게 개방적으로 하려고 합니다. 특히 안내판부터 고치고 있습니다. 관람객들을 위해 스토리텔링이 있는 안내판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도리사 주지 묘장 스님은 도리사를 누구나 와서 쉴 수 있는 문화적 쉼터로 만들기 위해 분주했다. 주지로 부임 후 사찰 관람객들을 유심히 살펴보니 고작 힘들게 절에 올라와서 머무는 시간이 1시간 남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묘장 스님은 그래서 사찰 안에 예비 사회적 기업인 카페 ‘다락’과 전통 찻집인 반야 쉼터를 만들었다.

“카페를 만들어 놨더니 절에 편하게 머무는 시간이 늘더군요. 그리고 체험 부스를 경내에 만들어 천연염색, 컵등 만들기 등 가족 문화체험 시설도 만들어 놓았습니다.이외에도 처음 오는 관람객들을 위해 직접 제가 교육 시킨 포교사들이 주말에 4명 정도 자원봉사로 사찰 해설도 해주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