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조화 꿈 꿔
불교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조화 꿈 꿔
  • 조준호 교수
  • 승인 2013.08.02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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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미얀마 점령과 미얀마 독립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당시 서부아시아 침략을 가속화하기 위해 놓은 ‘죽음의 철도’. 수십만 명이 공사 도중 목숨을 잃었다. 이 내용을 주제로 영화 ‘콰이강의 다리’가 만들어졌다.
英·日 틈바구니서 독립 이뤄
아웅 산 ‘정교분리가 종교 순수 지켜’
초대 수상 우 누, 불교 사회주의 주창
불교 기반한 평화 및 화합 연대 강조

미얀마 청년불교도연맹(YMBA)은 1917년과 1919년 미얀마의 자치권을 얻기 위해 인도와 영국에 가서 활동하였으나 주목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인도에 자치제를 허용한 반면에 미얀마에 허용하지 않은 영국에 대한 미얀마 국민들의 불만은 더욱 고조됐다.

미얀마 민족주의 운동은 불교가 앞장 선 종교적 투쟁보다는 종교와 분리된 정치적 투쟁으로 점차 선회했다. 1930년대 말기에 이르면 스님들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운동이 점차 젊은 학생들이 주도하는 방향으로 옮겨간다.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아웅 산’을 비롯한 미얀마 독립운동가들은 영국식민정부에 무력투쟁을 결의한다.

미얀마 독립운동가들은 당시 영국을 포함한 연합군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일본의 지원을 기대했다. 일본에서도 미얀마의 독립운동가를 포섭하기를 기대했다. 연합군은 일본과 대치하고 있던 중국 장개석 군에게 ‘버마로드’를 통해 군용 물자를 원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마로드’는 미얀마 중부인 만달레이와 중국 운남성 쿤밍(곤명) 간의 1,200km에 달하는 도로로 당시 일본과 전쟁 중인 중국에 물자를 보급하는 주요 통로였다. 일본은 미얀마 독립운동가들을 활용해 미얀마에서 영국을 몰아내려했다.

일본은 미얀마에 스즈키 케이지(鈴木敬司, 1897~1967)를 파견했다. 그는 아웅 산(Aung San, 1915~1947) 등과 접촉해 미얀마 독립운동가들을 중국 남쪽 하이난도(海南島)로 탈출시키는데 성공한다. 탈출한 아웅 산 등 미얀마 독립운동가 30명은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는다. 미얀마 국민들은 이때 이들을 일컬어 ‘30인 지사’(Yebo Thonzeik)라 부르고 있다. 이들이 조직한 미얀마 독립의용군은 훗날 미얀마 군의 토대가 됐다. 이 30명에는 아웅 산 사후 미얀마를 26년이나 통치한 네윈(Ne Win)도 속해 있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아웅 산이 이끄는 미얀마 독립의용군에는 수많은 미얀마 인들이 참가한다. 미얀마 독립의용군은 매우 짧은 기간에 3만 명까지 불어났다. 결국 아웅 산은 일본군과 함께 당시 수도였던 양곤을 함락시킨다. 그 후 4개월 만에 미얀마 독립의용군과 일본군은 영국군, 그리고 군속인 인도군과 기독교로 개종하고 식민정책에 앞장선 꺼인족(까렌족)과 까친족 등을 미얀마로부터 몰아낸다. 영국군은 인도 아쌈지역으로 퇴각하는데 미얀마의 영국군 42,000명 중 불과 12,000명만이 아쌈지역으로 퇴각했다.

미얀마 지폐에 새겨져있는 독립운동 영웅 아웅 산.
일본 미얀마 종속 야욕 드러내
1942년 3월부터 미얀마는 일본의 영향권에 놓이게 된다. 그렇지만 정확하게 일본의 ‘식민지배’라는 용어가 적절한지는 더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영국군을 몰아냈지만 하지만 일본은 전쟁 계속이란 명분하에 미얀마의 즉각적인 독립을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일본 정부의 이런 방침에 격렬히 항의한 스즈키 케이지를 본국으로 송환한다. 스즈키 케이지는 30인의 지사를 훈련시킬 때 ‘독립은 남에게 구걸하거나 거저 주는 것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이루는 것’이란 이상을 강조했다. 훈련 당시 미얀마 독립을 약속받았던 아웅 산 등 미얀마 독립운동가들은 스즈키 케이지의 송환 이후 독립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고 일본정부와 노선을 달리한다.

이후 일본군은 3년간 미얀마를 통치한다. 일본군은 1942년부터 미얀마를 시작으로 서부아시아 점령을 가속화하기 위해 태국과 미얀마 간 전략물자 수송을 위한 철도 공사에 들어갔다. 당시 이 공사에는 동남아 일대에서 포로가 된 약 6만 명의 연합군 포로들이 동원됐으며 미얀마인을 포함해 약 20만 명의 아시아인들이 투입됐다. 태평양 전쟁이 진행되며 다급해진 일본군은 난코스의 공사를 강행해 16,000명의 연합군 포로와 10만 명의 노동자를 죽음에 몰아놓으며 16개월 만에 철로를 완공시킨다. ‘콰이강의 다리’로 유명한 ‘죽음의 철도’ 건설이었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란 구호 속에 미얀마를 종속시키려하는 일본의 의도를 파악한 아웅 산은 영국과 다시 손을 잡는다.

1945년 3월 27일 미얀마군과 영국군은 일본군을 미얀마에서 몰아낸다. 이 날을 미얀마 국민들은 ‘국군의 날’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 일본이 1945년 8월 28일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서 미얀마는 일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된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미얀마의 독립이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영국이 다시 주인행세를 하려했기 때문이다. 아웅 산은 런던으로 건너가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와 담판을 벌인다. 담판 결과 ‘1947년 1월 27일, 1년 이내에 독립이 가능하다’는 내용을 담은 ‘애틀리-아웅 산 협정’을 체결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독립의 공식절차를 앞두고 내각 구성에 힘을 기울이던 아웅 산은 완전한 독립을 불과 6개월 앞둔 1947년 7월 19일, 회의 중 암살당한다. 그는 당시 33살의 젊은 나이였다. 미얀마에서는 이날을 ‘순국의 날’로 기리고 있다.

미얀마에서는 독립기념일을 일본군을 몰아낸 1945년 3월 27일이 아닌 1948년 1월 4일로 삼고 있다. 이는 이 날이 수십 년 동안 미얀마를 지배해 온 외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립 이후에도 미얀마 인들은 일본을 적대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독립과정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긴 했지만 두 나라가 원수지간이 된 것은 아니었다. 미얀마 인들은 일본을 미얀마 독립의 기초를 세운 나라로 평가했다. 이러한 인식은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특히 미얀마 인들은 스즈키 케이지에 대해 높게 평가했는데 2차 대전이 끝난 뒤 양곤 형무소에 수감돼있던 스즈키 케이지가 전범으로 영국 법정에 회부되려 할 때 아웅 산은 “그는 미얀마 독립의 은인으로 재판에 넘길 수 없다”며 반발하며 그의 석방을 돕기도 했다. 네윈은 1981년 미얀마 독립의 공헌자로 그에게 미얀마 최고 영예인 아웅 산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미얀마 국민선거를 통해 선출된 초대수상 우 누.
불교 중심으로 사회문제 해결 나서
일본군이 미얀마를 점령하고 있던 기간 일본은 미얀마 내 일본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 친불교 정책을 펼쳤다. 도쿄에서 열린 ‘대동아 불교대회(Greater East Asia Buddhist Conference)’에 미얀마 불교도를 초청하는 한편 미얀마와 같은 불교국임을 주지시키기 위해 양곤의 새 파고다를 건립하여 불사리를 봉안하기도 했다.

아웅 산은 이에 미얀마 정치와 불교가 엄격히 분리돼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1940년 아웅 산은 불교를 앞세운 민족주의를 비판하며 정치와 종교는 분리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아웅 산은 종교가 정치와 본질적으로 다르며 정교분리가 훼손되면 종교의 순수성이 떨어질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1947년 아웅 산의 암살로 30인 지사 중 네윈이 군 최고직에 오른다. 1948년 독립과 동시에 ‘버마연방공화국’이 출범했는데 우 누(U Nu)가 수상으로 선출됐으며 네윈이 부수상으로 임명됐다.

우 누는 네 윈과 같은 ‘30인 지사’ 일원이 아니지만 독립 후 최초의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수상에 선출됐다. 이어 1960년에도 2대 수상으로 취임한다.

우 누를 중심으로 하는 ‘버마연방공화국’의 가장 중요한 사안은 불교사회주의와 불교 국교화였다.

독립 후 미얀마가 불교를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 누의 불교관 등에서도 잘 나타난다. 우 누는 독실한 불자였다. 우 누는 모든 사회문제가 불교를 통해 해결 가능하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그는 영국 식민지배 기간 동안에 생긴 계층, 부족 간 대립과 사회 무질서 현상을 불교가 중심이 돼 바로잡아지길 바랐다. 그는 미얀마 내란을 막기 위해 결혼을 했음에도 청정행을 불전에 맹세했으며 파고다의 보수와 건립 그리고 경전 암송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우 누가 불교를 중시한 이유는 해방 이후 미얀마 사회상황과도 맞닿아있었다. 식민지배기간 외국인의 경제적 영향이 강했던 미얀마는 경제적인 면에서 사회주의의 길로 나아갔는데 그는 사회주의를 불교적 입장으로 수용하고자 했다. 우 누는 불교와 사회주의는 서로 통하여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경제적 평등을 이루기 위해서는 욕망을 절제함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기존의 사회주의자들과는 엄격한 차이가 있었다. 우 누는 사회주의도 종교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우누는 불교가 사회주의와 민주주의가 조화를 이루는데 중심이 된다고 강조했다. 우 누는 개인의 의지와 자유를 존중하는 불교와 민주주의가 서로 서로 부합한다는 입장을 자주 표명했다.

우 누는 초대 수상으로서 불교철학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접목해 미얀마 연방을 이끌려고 노력했다. 당시 미얀마는 불교를 근간으로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가 조화를 이룬 사회를 이루고자 했다.

우누의 경제 자문관을 맡은 경제학자 E.F.슈마허(1911~1978)는 1955년 이런 미얀마에서 소득수준은 낮지만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고 책을 남긴다. 새로운 경제철학을 제시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작은 것이 아름답다〉였다.

올해 초 필자가 미얀마를 찾았을 때는 ‘미얀마 독립일’ 65주기로 미얀마 정부 기관지인 ‘The New Light of Myanmar’는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4대 과업문구를 게재하고 있었다.

첫째, 모든 국민은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도 언제나 연방에서 함께 산다.

둘째, 모든 국민은 연방이 분열되지 않도록 분열없는 연대의식으로 결속과 자치권을 유지한다.

셋째, 모든 국민은 진실을 가져오는 과업에 참여해 평화가 정착되도록 한다.

넷째, 미얀마 현대화를 완성하고, 민주화된 나라를 확립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더 나은 봉사를 경주한다. 정의구현 법치사회와 올바른 행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한다.

이를 통해 미얀마 연방정부가 독립 이후 현재까지 당면한 사회적 문제와 이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이해할 수 있다. 미얀마인들이 꿈꾼 분열없는 연대와 화합의 공동체는 불교를 중심으로 부처님이 제시한 불국토가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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