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이 있는 둘레길-⑦ 북한산 포대능선길 그리고 망월사
조금 힘든 길이다. 지난번 회룡사를 가기 위해 걸으려 했던 북한산 둘레길 16구간 보루길을 회룡탐방지원센터 쪽에서 걸으면 종착점인 원도봉입구에서 포대능선 가는 길과 만난다. 포대능선길에는 망월사가 있다. 원도봉입구에서 망월사까지는 약 1.5km다. 빠른 걸음으로 1시간 정도 걸린다. 보루길을 걷고 다시 포대능선 길을 걷는다면 다소 힘든 코스다. 원도봉입구에서부터 망월사까지 걸었다.
원각사에서부터 원도봉탐방지원센터까지 약 300m는 포장길이다. 원도봉탐방지원센터부터는 본격적인 산길이다. 바람 한 점 없다. 간밤의 열기도 식히지 못한 대지 위에 태양이 또 쏟아진다. 금방 옷이 땀으로 무거워졌다. 옷속의 몸도, 몸속의 생각도 점점 무거워진다. 한 발 한 발 고도를 높일 때마다 대지로부터의 중력은 점점 더 팽팽해지고, 숲의 표정은 멀어진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숲에 기대선다. 작은 시냇물이 지나는 길가에서 죽은 고목이 아직도 대지의 물을 빨고 있다. 턱까지 찼던 숨이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디서 왔는지 실바람이 지나간다. 숨을 헐떡이며 걷고 있을 땐 느껴지지 않았던 실바람이 서있는 땀방울을 스쳐간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다. 요즘 저 산 밑에는 스님의 책 한 권이 화제다. “힘들면 쉬었다 가요. 사람들에게 치여 상처받고 눈물 날 때, 그토록 원했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사랑하던 이가 떠나갈 때, 우리 그냥 쉬었다 가요.” 글이든 말이든 치유의 성분이 들어 있어야 하는 시대다. 그 만큼 이 시대는 힘든 시대다. 무언가 보아야 할 것들을 보기 위해선 멈춰야 할 만큼 바쁘고 힘든 시대다. 그랬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계속 멈춰서만 있을 수가 없다는 게 우리의 힘듦이다. 깊숙이 숨을 채우고 다시 길을 걷는다. 길은 점점 폭을 줄이고 경사를 높였다. 길은 이제 산이 지배하고 있었다. ‘순응’뿐이었다. 산행은 산이 내어준 길에 순응하는 것이었다. 순응의 결과는 분명했다. 산은 망월사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망월사는 길 끝이 아니라 하늘이 시작되는 곳에 있었다.
망월사는 조계종 봉선사의 말사다. 신라 시대인 639년(선덕여왕 8)에 해오 선사가 창건했다. 망월사라는 이름은 해오 선사가 이곳에서 당시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옛 이름 月城)를 바라보며 삼국통일과 왕실의 융성을 기원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신라 말기에 경순왕의 태자가 머물렀다. 고려 1066년(문종 20) 혜거 국사가 중창했으며, 그 이후의 연혁은 확실하지 않다. 여러 차례 전란으로 황폐해졌다가 조선시대인 1691년(숙종 17) 설명 스님이 중건했다.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망월사는 많은 선지식들이 다녀간 도량이다. 세 번이나 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었던 고암 스님이 열일곱 때 행자 생활을 했던 곳이기도 하고, 고암 스님이 존경했던 용성 스님(1864~1940)도 망월사와 인연이 깊다. 선사였음에도 ‘불경 번역의 창시자’로 더 알려져 있는 용성 스님은 1925년에 망월사에서 ‘30년 활구참선 정혜결사’를 시작한다. 일제강점기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기도 했던 스님은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면서 불교의 대중화를 절감하고 역경의 원력을 세운다. 굳은 원력으로 시작한 역경불사가 자리를 잡자, 스님은 일제에 의해 왜색화되어가는 한국불교의 폐단을 막고 한국 전통 선의 불교를 지키기 위해 결사를 추진하게 된다. 그 후 망월사에는 만공, 한암, 전강, 금오, 춘성과 같은 선사들이 주석했다. 또한 조계종 종립선원으로도 이름이 높았던 도량은 지금도 많은 선객들이 정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