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는 철두철미하게 함께 나누는 공유

▲ 사진=마음을 담는 사진장이 근승랑
“장익 신부, 서강대 신학연구소 소장을 하고 나중에 서강대학교 총장을 했던 서인석 신부 그리고 그 밖에 여러 어른들하고 신학 토론을 하면서, 자연스레 봉은사 나들이 길에 법정 스님에게 소개해드렸어요.”

돈연 스님(66)은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법정 스님과 친교를 쌓는 물꼬도 터드릴 만큼 다른 종교 가르침을 이해하고 소통하려고 애썼다.

70년 대 중반, 베네딕도 수도원에 ‘불교는 심생즉종종법생心生則種種法生이고, 심멸즉종종법멸心滅則種種法滅이라. 마음이 일어나면 가지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모든 법이 사라진다는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는 마음법이다. 그런데 당신들은 모든 걸 하느님이 만들었다고 하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만나서 함께 탁마를 해보자.’는 편지를 보냈다.

얼마 뒤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다녀가라는 초대장이 왔다. 법정 스님에게 여쭸더니 흔연히 다녀오라고 하면서도 왜 그렇게 복잡한 일을 하려고 하느냐고 했다. “늘 그러세요. 제가 아주 어려운 책을 읽고 있으면 ‘재미없이 왜 그런 철학책을 읽고 그래?’하고 조크를 하세요. 그게 애정 표현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죠. 그렇게 수도원 생활을 한 보름쯤 했어요. 그래서 나름대로 하느님을 믿으면 천국이 이 세상에 있다는 체험했어요. 순전히 불교 방식으로 한 체험이에요. 그 나눔으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교회를 열심히 믿으면 사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어요. 그런데 뭔가를 깊이 있게 추구하는 저 같은 사람은 그것만으론 안 되지요.”

스님 사상 원류가 어디서 시작하고
계보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써야
 

10.27 법난 즈음, 돈연 스님은 총무원 교육국장을 맡았다. 계율 통합 계단을 만들어 제1회 통합계단을 통도사로 정했다. 네 분 스님을 모시면 성공이라고 봤던 돈연 스님은 법정 스님, 지관 스님, 일타 스님, 홍법 스님을 모셨다. 전개 아사리(화상)는 자운 스님이었는데 그때 자운 스님은 법정 스님을 말과 행동이 같은 균형 잡힌 분이라고 평가를 했다.

법정 스님을 당신이 열정을 바쳐서 모셨던 분이라고 돌아보는 돈연 스님은 삶과 경전, 사회를 조화시키는데 그 이상 가는 승려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고 말씀한다. “스님은 기준이 아주 명확하고 역사의식이 투철하신 논리에 딱 들어맞는 어른이셨어요. 정치발언은 하지 않으셨지만, 사회에다가 더듬이를 두고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셨죠. 늘 조심스럽게 살고, 당신 그릇보다 더 크게 쓰고 간 어른”이라면서, 법정 스님은 당신이 계획한 대로 살다 간 어른으로 CRM(고객만족 경영)은 물론이거니와 당신 만족경영도 참 잘하셨다고 말씀한다.

돈연 스님은 법정 스님 입적 뒤에 나온 책이나 글들이 스님 사상이 어디서부터 시작하고 계보가 어떻게 되는지 깊이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면서 법정 스님 사상 연구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승려는 도그마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자유사상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아주 굳으셨던 법정 스님. 수행자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임을 깨달아 무소유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

온 곳으로 돌려보내야
사회에서 왔으니 사회로

법정 스님이 돌아가시기 전 돈연 스님은 지인을 통해, 길상사를 꼭 종단으로 귀속시킬 일이 뭐가 있느냐면서 무소유는 마치 길처럼, 철두철미하게 함께 나누는 공유共有다. 길이야 공산주의자도 지나가고 민주주의자도 지나가고 여자건 남자건 따지지 않고, 누구라도 지나가면 되지 않느냐.

송광사로 귀속되나, 법정 문도가 갖나 거기서 거기다. 세상 궂은일을 해서 모은 재산을 내놓은 분은 불교에서 가져가면 많은 사람들이 좋게 쓰리라는 생각에서 보시했지만, 세상에는 아름다운 사람도 많으니까 종교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들 삶터나 장터가 되도록 일반 사회단체에다 기증을 하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세상을 뒤바꾼 부처님 성지도 초라해요. 석가모니가 몇 천 명 앞에서 법을 설했다는데 시간이 이천 몇 백 년 지나니까, 다 사라지고 자취도 없습디다. 온 곳으로 돌려보내야 해요. 사회에서 왔으니까 사회로. 그 사회가 공원을 만들던지, 빈민구제소를 만들던지 알아서 하지 않겠어요? 그래야 무소유 정신이 살아나지요.”

부처님이 깨달은 당처當處를 ‘0’이라고 한 <0의 행복> 저자 이규항 선생은 ‘0’을 중도中道, 본디 자리라고 이른다. 그와 같이 온 곳으로 되돌리는 게 자연스런 세상이치라는 말씀이다.

출가를 언제 어떤 계기로?
“저는 절에 공부하러 갔어요. 목표가 고시합격이었는데, 몇 년씩 끌 게 아니라 절에 가서 일 년쯤 빡세게 공부해서 합격을 하는 게 났겠다 싶었어요. 그때 62년인가? 화폐개혁을 할 때였어요. 저희 집 소작인들이 빳빳한 새 지폐로 소작료를 내러 왔는데 마침 어른들이 나들이나가시고 안 계셔서 제가 그 돈을 받았어요. 빳빳한 돈을 탁 받고 나니까 ‘이제 어디로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갖고 튀었어요.” 그렇게 간 곳이 송광사였다. 석 달 치 방세를 미리 내고 방을 하나 얻었다.


“하루는 스님들이 다퉈요. 누더기를 입고 온 스님한테 스님 한 분이 ‘누더기를 날 주고 새 옷을 입고 가라’고 그랬는데, 누더기를 입은 스님이 ‘스승에게 물려받은 옷이기 때문에 줄 수 없다.’ 그래요. 바꾸자는 새 옷이 아주 좋은 옷이었어요. 명주에다가 기가 막힌 건데 싫다고 다투더라고요. 한참 구경을 했죠. 결국 바꾸지 않고 그냥 가더라고요. 아니? 저렇게 좋은 옷을 준다는데 그걸 마다하는 이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그게 궁금해서 ‘눌러 앉자.’ 마음먹고는 송광사에 얘기하니까 처음엔 믿지 않는 거예요. 고시 공부하러 왔던 학생이 중이 된다니까. 며칠을 두고 거듭 우기니까 나중에 받아주더라고요.”

사람이 존재하는 한 종교가 필요한데 출가 지향이 아니라 재가 지향이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수행자는 따로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돈연 스님. 수도자라 부르든 목회자나 성직자라 부르든 그 자체가 직업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한다.

“수행은 누구라도 저마다 제 일터에서 자투리 시간을 써서 하면 돼요. 재가자로 만들어진 수행이 보다 더 의미가 있다고 봐요. 그러니까 소스를 열자. 다 열어놓고 힘닿는 대로, 할 수 있는 만큼 하자는 거지. 권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에요. 이게 부처님 생각이었어요. 송광사를 가든 해인사를 가든 절에 가면 좋잖아요. 그런데 70%가 예배 공간이에요. 주거공간은 한 20%쯤 됩니다. 나머지 10%는 절살림을 사는 사람들 공간이에요. 예배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나머지 시간엔 죽은 공간이에요. 국사를 모셔놓고 일 년에 한두 번 재를 지내요. 그 곳을 그냥 놔들 까닭이 어디 있어요? 사람들이 와서 자고 가게도 하고, 이벤트나 잔치를 해주는 공간으로 써야지요. 쓸모없는 공간이 넘쳐나는데도 자꾸 뭔가를 지어대요. 쓸 방법을 찾지 않고. 경제논리에 어긋나요.”

79년도에 독일 유학을 가려고 괴테 인스튜티에서 공부하던 돈연 스님은 송광사로 내려오라는 법정 스님 부름을 받고는 송광사에 내려가 교육을 맡았다. “거기서 또 스님을 육칠 년 모시고 살았어요.” 그때 돈연 스님은 수련회를 맡아 절을 출가자 중심에서 재가자들도 함께하는 수행도량으로 탈바꿈시켰다.

“옛날 수련회는 학교에서 불교 학생들이 교수 모시고 사박오일 동안 한두 차례 얘기를 듣고 산이나 타고, 스님들한테 한 두 차례 강의 듣고 마는 노는 분위기였어요. 그래서 제가 법정 스님한테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말씀드렸어요. 그해 여름 송광사에 수련회를 신청한 학교가 일곱 개 학교였는데 불교학생회장들을 불러 앉혀놓고 ‘사박오일 출가’라고 제목을 붙이고 수련회 프로그램을 보여주니까 그렇게 못한다는 거예요. 못하면 장소 빌려주지 않겠다고 그랬더니 숙대, 이대를 비롯한 몇 개 대학만 참가했어요.”

교육 원장이었던 법정 스님을 모시고 동참자 모두에게 승복 만들어 입히고, 발우공양을 시키고, 법문 듣고, 참선도 하게 해 수련회에 새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그 뒤로 송광사 수련회는 수련대회 기준이 되었다. “템플스테이 원조지. 그때 템플스테이 구상까지 다 해놓았었어요.”

아이에게 재밌고 맛있는
어린이 경전이 필요하다

1987년 돈연 스님은 활성 스님, 강연심씨와 함께 ‘고요한 소리’라는 단체를 만들어 사람들이 초기경전에 눈을 돌리게 이끌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경전읽기모임’을 만들고 이어 경전연구소를 만들어 초기불전인 빠알리 경전 번역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원전을 정확히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스님과 불교학자들이 턱없이 모자란 현실을 넘어서기에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2년 연구소에 불이나 안타깝게도 번역한 원고가 모두 타버렸다. 망연자실. 하지만 돈연 스님은 폐허 위에서 추스르고 마음을 모아 다시 경전을 번역하는 일을 이어왔다.

“제가 새로운 불교운동을 할 만큼 행동주의자도 못돼요. 시를 쓰고 철학을 하는 가운데 결혼도 하고 그랬으니까, 모든 걸 다할 수는 없으니 번역 일 만큼은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경전연구소를 만들고, 사업을 해서 조그만 이익이라고 얻으면 거기에 써왔습니다. 경전은 승려들을 위해서는 만들 필요가 없어요.”

역경 사업은 용성 스님이 화엄경을 번역한 일을 필두로 운허 노장 스님 염원에 힘입어 법정 스님을 비롯한 돈연 스님, 그밖에 여러 어른들이 꾸준히 애써온 바탕 위에 뿌리내리고 꽃을 피웠다. 이제 부처님 육성이 고스란히 담긴 빠알리 경전도 여러 곳에서 번역되어 나와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부처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돈연 스님 경전 번역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초등학교 오학년에서 육학년으로 가고, 육학년에서 중학교로 가는 때에 읽을 경전을 만드는 게 제 바람에요.”아이들이 재밌고 맛있어할 경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어린이경전 만드는 일을 놓지 못하고 있는 돈연 스님. 된장 만드는 사업도 부진한 지금, 어린이 대장경 만드는 일을 이어가기 쉽지 않고 힘에 부친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에 돈연 스님은 한발 한발 작지만 큰 걸음을 내디딘다. 앞날 부처님을 위해. 이 소중하고 도타운 맑고 향기로운 사업을 함께할 따뜻한 손길이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사진=마음을 담는 사진장이 근승랑

돈연, 그는 과연 누굴까?
된장 항아리는 파리나 다른 벌레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소창이나 광목으로 덮는데 올해는 헌 것을 모두 벗겨버리고 새 것으로 바꾸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소창을 440마를 끊었다. 동그랗게 잘라서 박음질을 해 고무줄을 끼우는데 한 달이 걸렸다. 그 기간 동안 우리 집을 다녀간 사람이면 거의 누구나 천을 자르거나 재봉질, 고무줄 끼우는 일에 동참해 주었다. 말이 1천 5백 개지 정말 많았다. 드디어 일을 끝내고 헌 덮개를 벗겨내고 새 덮개를 덮었다. 팔이 떨어지듯 아팠지만 다 덮고 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흐뭇하게 항아리를 바라보고 있는데 남편이 돌아왔다.


“어머, 지금 막 덮개를 다 덮었는데. 고무줄을 끼웠더니 훨씬 깔끔하다.”
여러 사람 도움으로 일을 마치긴 했지만 내심 ‘참 애썼구려.’라는 칭찬을 기대하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돌아온 답은 “아니, 이거 삶지 않았잖소. 혹시 소창에 묻어있는 표백제가 된장에 닿기라도 하면 어찌되겠소?”였다. 나도 이걸 삶아서 덮을까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덮개 밑에 비닐을 깔고 그 위에 소금을 얹기 때문에 문제없으리라고 여겼다. 뿐만 아니라 덮개를 다 빨아서 널어 말릴 일도 만만치 않았기에 어차피 방충망 구실일 뿐, 항아리 위에 덮는 건데 별일이 있으랴 싶었다. 남편은 항아리를 한 바퀴 돈 뒤 말했다.


“모두 걷어서 삶으시오.” 그뿐이었다. 너무나도 짧은 한 마디.
망연자실 서 있었다. 그 매정함이라니.
‘제기랄.’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이게 웬 시집살이람! 아니야, 내가 생각이 짧았다. 짧았어.”
도완녀 님이 쓴 책 <남편인 줄 알았더니 남편이 아니더라>에 나오는 꼭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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