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한다 잘 한다 칭찬하면 보다 큰 능력 발휘





송광사의 광원암으로 가려면 피안교(彼岸橋)를 지나야 한다. 피안교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온갖 괴로움과 속박으로 가득 한 차안(此岸)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와 즐거움을 누리는 열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피안교를 지나자 초록빛 가득한 편백나무 숲이 나왔다. 비에 젖은 편백나무는 생기 가득했고, 초록빛은 허락도 없이 객의 마음을 차지해 버린다. 편백나무의 푸른빛에서 강한 치유에너지가 느껴진다.

광원암에 들어서면 햇절 냄새가 난다. 송광사보다 250년 정도 먼저 세워졌다고 하지만, 육이오 동란으로 소실된 큰절의 불사를 위하여 온 몸을 고스란히 내어준 것이다. 말하자면 연화문양의 기와며 백화(百花)가 새겨진 문짝이며, 오방색으로 단장한 대들보 등을 큰절을 복원하는데 무주상보시한 것이다. 30여 년간 덤불 속에 묻힌 채 빈터로 남아 있었는데 1992년 현봉 스님의 원력으로 지금의 도량을 갖추었다. 그리고 광원암은 해우소를 갤러리처럼 꾸며놓았다고 인터넷에 소문이 자자하다.


광원암은 한국 간화선을 낳은 보금자리이다. 송광사 제2세 국사인 진각혜심(眞覺慧諶) 스님이 광원암에 주석했으며 이곳에서 종문(宗門)의 최고 저서인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30권을 펴내었다. 선문염송집에는 선가(禪家)의 옛 화두 1225칙과 선사들의 긴요한 말씀이 담겨있다. 광원암의 지기(地氣)가 그러한지 현봉 스님 또한 <선에서 본 반야심경>등을 비롯해 선에 관한 책을 펴내었다. 스님이 광원암을 복원했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인연임에 틀림없다.

현봉 스님은 차를 한잔 앞에 두고 수직으로 퍼부어대는 비를 감상하고 있었다. 어찌 비뿐이랴, 온 몸으로 비를 맞고 있는 하얀 연꽃이며, 자줏빛 접시꽃이며, 노란빛 달맞이꽃도 눈에 담아내고 있겠지.

“꽃들도 보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더 잘 자란다고 하잖아요. 좀 못 생긴 찻잔이라도 자꾸 ‘이쁘다 이쁘다’하면서 쓰다듬어 주고 칭찬을 하면 그릇도 환희심을 내어 윤이 나고 더 예뻐져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맘에 좀 들지 않더라도 잘한다면서 칭찬해주고 기를 세워주면 자신의 능력보다 훨씬 더 많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요. 저 꽃들도 내가 보아주어서 더욱 좋을 겁니다.”
모든 참 생명은 연기에 의해 펼쳐진 것이며, 모든 존재들은 상호의존의 관계 속에 있다. 벌레 하나, 풀잎 하나, 한 송이 꽃도 우주의 근본 바탕인 절대의 참 생명으로부터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스님의 눈에는 들판에 핀 한 송이 꽃도 그렇게 어여쁘게 보인다고 했다.

스님은 대학을 다니다가 참선이 하고 싶어 서둘러 입대해 군복무를 마치고서는 출가했다. 이미 참선의 맛을 알고 출가를 했기에 송광사, 해인사, 백련사, 통도사, 봉암사, 수도암, 칠불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십 안거를 지냈다. 서른 해가 훨씬 넘는 세월동안 수좌로 살아 온 이력을 들어 화두참선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더니 “산중에 있다가 잡혀 내려가 주지도 4년이나 했는데 수좌가 아니라요” 하면서 손사래를 친다.

현봉 스님은 몇 해 전에 송광사 주지소임을 맡아 여법하게 잘 해내었기에 아직도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그때 송광사의 종무행정을 완벽하게 전산화시켜 제방을 놀라게 했다. 산중의 스님이지만 현대적 감각과 남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님은 출가 한 후 3년 동안 원두 소임을 맡아 농사일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농사만 지은 것이 아니라 밭두렁에서도 끊임없이 화두를 챙겼다. 초발심시절부터 노동과 수행을 몸에 익혀 온 터라 지금도 시간만 나면 밭 갈고 풀 뽑는 일에 매달린다. 광원암을 둘러보면 토마토와 고추를 비롯해 여름 내내 공양거리가 되는 푸성귀들이 자라고 있다. 쪽 고르게 줄맞추어 자라고 있는 고춧대는 얼마나 늠름한지 모른다.


중국의 선종사찰들은 대부분 들판이나 산중에 있었기 때문에 탁발도 할 수 없을 뿐더러 일일이 장봐다 나르는 것도 힘들었기 때문에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백장 선사의 <백장청규>도 한 몫 했을 터이다. 중국선사들의 선문답을 보면 노동하는 가운데에서 나온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서 찻잎을 따면서 위산영우 선사와 앙산 스님과 나눈 선문답을 보면 다음과 같다.

위산 선사가 찻잎을 따다가 앙산 스님을 보고 말했다.
“온종일 찻잎을 따면서 그대는 말소리만 들릴 뿐 그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구나.”
앙산 스님이 차나무를 흔들자 위산이 말했다.
“그대는 작용만 알 뿐 본체는 얻지 못했구나.”
그러자 앙산 스님이 “그대는 어떤가?” 하고 물었다.
위산 스님은 차를 따던 손을 멈추고 묵묵히 서 있었다. 그러자 앙산 스님이 말했다.
“스님은 본체만 얻었을 뿐 작용은 얻지 못했구나.”
이어 위산이 말했다.
“그대에게 방망이 30방을 쳐야겠구나.”

현봉 스님은 중국 선종에 대해서 좀 더 언급했다.
“중국에서는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참선하고 주경야선(晝耕夜禪)을 했어요. 그러다 비오는 날이면 일을 못하고 방안에서 짚신을 삼는다거나, 바느질을 한다든가 그렇게 하면서 법거량도 하고 했겠지요. 우리나라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인 실상사, 보림사, 태안사 등도 그러했어요. 앉기 위해서 앉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그만큼 힘을 받기 위해서 앉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옛날 조사스님들은 상황에 따라 친절하게 말해 주거나 침묵하거나 몽둥이로 때리거나 아니면 딴청을 피우는 등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학인을 단련시켰다. 조사스님들이 왜 그런 수단방편을 썼는지를 모르면 ‘어째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하고 참구해 기어이 그 뜻을 깨닫는 것이 화두참선이다. 이 참선 수행을 위해서는 세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 첫째는 대신심(大信心)인데, 부처님의 말씀을 비롯해 법에 대한 믿음이나 조사스님들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둘째는 대분심(大憤心)이다. 과거의 한량없는 선지식들은 이를 깨달았건만 나는 아직도 무명의 업장이 두터워 이렇게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는 부끄러운 마음에 이를 기어이 깨치고야 말겠다는 분발(憤發)하는 마음을 말한다. 셋째는 대의심(大疑)心)인데, 화두에 대한 의심은 물론이고 경전이나 어록을 보면서 그 참뜻이 무엇인지 탐구해가는 것이다. 현봉 스님은 <천수경>의 개경게(開經偈) 속에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 이 세 가지 요건이 다 들어있다면서 독송을 하되 허수로이 하지 말라고 했다.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隅) /아금문견득수지 원해여래진실의 (我今聞見得修持 願解如來眞實義)

“우주 처처에 불법(佛法) 아닌 것이 없듯이, 일체 모든 중생이 부처 성품을 지닌 부처이듯이, 팔만사천대장경은 마음 깨치라고 있는 것이니 높고 낮다는 간택심을 버려야 합니다.”

송나라 때 대전요통(大顚了通) 화상의 <대전화상주심경(大顚和尙注心經)>을 현봉 스님이 번역하고 주석을 더한 책이 바로 <선에서 본 반야심경>이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현봉 스님의 수행과 지혜의 불꽃을 한꺼번에 드러낸 것’이라 한다. 불교경전과 한학에 대한 해박함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지 여쭈었더니 속가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스님은 대여섯 살부터 속가의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한문을 배웠다. 할아버지는 자식들이 일본식 교육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스님은 할아버지가 직접 만든 교재로 한문공부를 했다.
“바람 부는 가지에 앉은 새는 그 꿈마저 위태롭구나…. 어릴 때 무엇을 알겠어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어린 나를 붙잡고 이런 공부를 시켰습니다.”


어린 손자에게 자신의 높은 학문을 쏟아 부은 할아버지, 어찌 보면 스님의 인생관과 사상관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며 어렸을 때 이미 형성된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공부를 마음껏 펼치지도 못한 할아버지는 스님이 열한 살 되던 해 돌아가셨다. 스님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중학교에 진학하여 신식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할아버지가 쓴 일기장을 발견했는데, 조부에 대한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고자 그것을 책으로 펴냈다. <운옥재 문집>에는 훔치고 싶은 아름다운 문장이 너무나 많다. 그중 한 구절을 여기에 소개한다.

화기승소체상고(花氣乘宵*上高) 꽃향기는 밤을 타고 섬돌 위에 오르고
만산송뢰청잔도(滿山松*聽殘濤) 온 산의 솔바람은 파도처럼 들려온다.

빗님은 수굿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광원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진각국사 부도탑이 있다는데, 세차게 내리는 비 때문에 참배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빗물은 마당에 도랑을 이루면서 흘러가고 있다. ‘우르릉 꽝꽝~’하고 내리치는 천둥 번개소리에 이야기는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어느 때보다도 말이 넘쳐나고 있는 시대이지만 그 말은 거칠거나 화려하기만 할 뿐,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러한 시대에 오히려 유마(維馬) 거사의 침묵이 더 요구되는 것 같다. 현봉 스님은 유마거사의 침묵에 대해 조근 조근 짚어주었다.


부처님 당시, 바이샬리에 유마거사가 있었다. 재가자로서 그 수행은 제자들을 능가하는 훌륭한 분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유마 거사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자들에게 병문안을 갔다 올 것을 일렀다. 부처님의 십대 제자들을 비롯해 여러 보살들이 병문안을 갔는데, 유마 거사는 그들에게 불이법(不二法)을 법문했다. 이분법(二分法)적인 상대성을 초월한 절대의 진리에 대해 토론하며 하나하나 깨우쳐 주었다. 부처님의 뛰어난 십대 제자들도 유마 거사의 법문 앞에 고개를 숙일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지혜가 뛰어난 문수보살이 찾아가서 불이법에 대해 서로 문답을 나누었다. 문수보살은 불이법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유마에게 ‘이제 거사님께서 불이법에 대해 말씀해 보십시오’하니 유마거사는 아무 말씀도 없이 침묵했다. 그때 문수보살과 대중들은 ‘유마거사가 불이법을 가장 훌륭하게 잘 설해주었다’고 찬탄했다.

스님은 “유마 거사의 침묵은 <천수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정구업진언의 극치”라고 했다. 유마거사의 침묵은 자타(自他), 시비(是非), 선악(善惡) 등 상대적인 모든 것을 초월한 청정한 그 자리인 것이다. 현봉 스님은 끊임없이 분별하고 시비하는 그 마음을 두고 “중생들의 본래 근원”이라 했다.

“일체의 모든 법이 다 같이 마음으로 돌아가니 만법은 바로 이 마음의 다른 이름입니다. 나누어 보면 팔만 사천이요 넓히면 무궁무진하니 마음이 생기면 온갖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온갖 법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대진 화상은 ‘수미산을 꺾어서 붓을 삼고 바닷물을 갈아서 먹을 만들어 이 마음(心) 한 글자를 표현하여 써보려 할지라도 능히 다 쓸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며 이 마음이 부처를 이룬다는 것’을 믿지 않기에 미혹한 중생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생들은 ‘나’라는 집착 때문에 끝없는 탐욕과 번뇌 망상을 일으키고 온갖 업을 짓게 되며 스스로 얽매어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끝없는 번뇌망상의 실체를 깨달아 그 굴레를 벗어나겠다는 것이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이란다. 우리가 발심을 하게 되는 까닭은 중생살이의 고통 때문이며, 그래서 구경(究竟)에는 중생의 고통을 건지는 것이 그 목적이 되는 것이다.

현봉 스님은 송광사 주지 소임을 맡았을 때 무척이나 공사다망(公私多忙)했을 터인데 자가용을 마련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지금도 자가용 없이 서울로 어디로 법문을 다닌다. 스님은 털신 한 켤레면 지구 어디라도 못 갈 데가 없는 것이다. 산중에서 농사지으면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즐기는 현봉 스님께 요즈음의 사회 현실에 대해 진단을 부탁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경제논리로 풀어나가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습니다. 물질로만 모든 것이 해결된다면 부처님께서 전륜성왕이 되어 복지법으로 사람들을 구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유위법으로는 생노병사를 그리고 세상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음을 절감했기에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출가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출가는 부(富)나 빈(貧)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겠다는 의지이며, 상대적인 것에 이끌려 살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팔풍(八風)은 끝없이 불어오고 중생계의 번뇌는 끝이 없어요. 사바세계란 고통을 참으면서 안으로 반조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앞을 보면 내가 꼴찌라 그런데 뒤돌아보면 내가 세상에서 일등인 것이라. 인간의 욕망은 채워질 수 없는 것이기에 보살행을 하겠다는 맹서를 날마다 해야 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부처님의 출가 정신을 되돌아보라는 말씀 참으로 귀하다. 부처님은 물질로서 얻은 행복은 영원하지 않음을 매순간마다 법문해주고 계시는데 우린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허공의 본바탕에는 색(色)을 놓아두려 해도 공(空)은 색(色)을 받아들이지 않고, 소리를 놓아두려 하여도 공(空)은 소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던가?




현봉 스님 약력

1974년 송광사에서 구산 스님을 은사로 득도. 1975년 송광사에서 구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수지. 송광사, 해인사, 백련사, 통도사, 봉암사, 수도암, 칠불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십 안거 성만. 조계총림 유나, 조계종 중앙종회의원과 법규위원, 정광학원 이사, 송광사 주지 역임. 지금은 송광사 광원암에 주석. 저서로는 <선에서 본 반야심경>, <너는 또 다른 나> 등이 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