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현상법은 생멸변화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삶도, 소유물도 마치 영원한 것인 양 생각하며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필연적으로 괴로움을 접하게 된다. 애착하던 것이 변화와 함께 사라져 갈 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고(苦)라는 것을 자각할수록 인간은 또한 그 고로 부터 벗어난 세계를 꿈꾸게 된다. 불교에서는 고로 부터 벗어난 상태를 열반적정(涅槃寂定)이라고 한다. 열반은 범어로 니르바나(nirv쮄n.a)이고 ‘불어서 끄는 것’, 혹은 ‘불어서 꺼져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번뇌의 불을 끄는 것이 열반이다. 여기에서의 불은 말하자면 촛불과 같은 불이다. 양초의 촛불이 자신의 몸을 스스로 녹여버리듯 중생의 번뇌라는 촛불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태
?제법무아(諸法無我)는 ‘모든 법은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모든 법’이란 생멸변화하는 일체의 현상법을 말한다. 불교에서 무아란 아(我)가 아닌 것이다. 여기서 무아의 아는 인도 사상 속에서 나고 멸하며 변화하는 현상이 없는 영원불멸의 실체(?體)를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 실체는 경험되지도 인식되지도 않기 때문에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 조차 명확하지 않는 대상이다. 이 제법무아는 다른 학파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불교만의 독자적인 사상이다. 기존의 인도철학 전통에서 아(我)란 불생불멸의 영원한 존재인 아뜨만(?tman)을 가리킨다. 이 아뜨만은 우주적 실체인 브라흐만(brahman)에 대비되는 개인적 실체를 의미한다. 또 아뜨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현상과 관계가 없
?일체개고(一切皆苦)는 일체행고(一切行苦), 제행개고(諸行皆苦)라고도 하는 데, 이는 오온ㆍ십이처ㆍ십팔계 등의 모든 현상법이 ‘고(苦)’라는 의미이다. 이 내용은 원시경전을 비롯한 그 밖의 많은 불교경전에서 ‘현상법은 무상하기 때문에 고이다’라는 가르침에 기인한다. 하지만 일체개고가 객관적 진리인가에 대해서는 일반인은 물론 불자사이에서도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고 하는 제행무상(諸行無常)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는 진리라고 납득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이 고라고 하는 일체개고의 명제는 무조건 받아들기 힘든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실 속에 살아가다보면 고만이 아니라 낙(樂)도 있고, 고도 낙도 아닌 상태, 즉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의 상태에 머무를 때도 있기
사법인은 부처님이 깨달은 인간 세계의 진실로서, 제행무상(諸行無常)ㆍ일체개고(一切皆苦)ㆍ제법무아(諸法無我)ㆍ열반적정(涅槃寂靜)의 네 가지 항목을 가리킨다. 이는 부처님의 깨달음 중 가장 대표적인 내용으로 무상ㆍ고ㆍ무아ㆍ열반에 대한 가르침을 말한다. 이 중 일체개고를 뺀 세 항목이 삼법인이므로 사법인은 삼법인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사법인의 첫 번째 항목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제행은 생멸변화하는 일체의 현상법을 말하며, 유의(有爲)와 같은 뜻을 갖고 있다. 유의역시 현상을 뜻하는 말로, 원인과 조건에 따라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원인과 조건이란 인연을 말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은 무상을 뜻한다. 제행무상의 ‘행(行)’에 대해서는 앞서 연재한 ‘오온(五蘊
?우리가 알고 있는 제행무상(諸行無常)ㆍ일체개고(一切皆苦)ㆍ제법무아(諸法無我)ㆍ열반적정(涅槃寂靜)의 네 항목은 초기불교시대부터 확립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다. 이 네 가지 항목을 묶어 사법인(四法印)이라 하고, 여기서 일체개고를 뺀 세 항목을 삼법인(三法印)이라고 부른다. 법인(法印)은 산스크리트어 다르모다나(dharmod?na)의 한역으로, 다르마(dharma)와 우다나(ud?na)의 합성어를 한역한 말이다. 다르마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법(法), 가르침 등의 뜻이 있고, 우다나는 요목(要目), 총괄, 강요(綱要), 요약 등을 의미한다. 이는 산스크리트어 다르모다나를 ‘가르침의 증표’로 이해하고 ‘법인’으로 한역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삼법인과 사법인에 관한 각각의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어느 때 삼법
지난 호에 연재한 ‘십이처(十二處)’에서 감각 기관인 육근(六根)과 그 감각의 대상인 육경(六境)에 대해서 설명한 바 있다. 이번에 설명할 삼과의 마지막인 십팔계(十八界)는 육근과 육경을 합한 열두 가지 항목에 다시 ‘여섯 가지 식별작용[六識]’이 더해진 것을 말한다. 즉 육근ㆍ육경ㆍ육식을 합한 열여덟 개의 항목을 십팔계라고 한다.? 계(界)는 산스크리트어 다투(dh쮄tu)를 번역한 말이다. 다투는 근본, 기초 등을 의미하는 말로, ‘근원을 간직한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해 일종의 ‘원리’의 의미로 쓰인다. 불교에서는 이 육근ㆍ육경ㆍ육식을 합한 열여덟 항목이 세상의 성립과 인간생존의 성분이자 요소로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원리의 의미를 가진 ‘계’를 붙인 것이다. 또 계에는 생본(生本)과 종류(種類)의
십이처(十二處)의 처(處)는 입(入) 또는 입처(入處)라고도 한다. 이는 ‘처’의 산스크리트어 아야따나(쮄yatana)에 ‘들어오다’라는 의미가 포함됐기 때문이다. 아야따나는 어원학적으로 ?-yat-[들어오는] ana[곳, 것]로 분석되며 ‘들어오는 장소’, ‘들어오는 것’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들어오는 장소’란 안근(眼根)ㆍ이근(耳根)ㆍ비근(鼻根)ㆍ설근(舌根)ㆍ신근(身根)ㆍ의근(意根)의 육근(六根)을 말한다. 여기서 근(根)은 산스크리트어 인드리야(indriya)를 번역한 말로 ‘능력’을 의미한다. 즉 안근(眼根)이라는 말은 눈이 가지고 있는 시각 능력을 나타내며, 현대 의학에서 시각기관의 시신경과 같다. 안근과 마찬가지로 이근은 청각능력, 비근은 후각능력, 설근은 미각능력, 의근은 지각(知覺)능력을
?부처님은 깊은 명상을 통해 이 세상에 영원불멸한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꿰뚫어 보았다. 이 깨달음을 통해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설하며 모든 것은 무상하므로 불멸하는 자아(自我)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대신 부처님은 사람들에게 ‘오온(五蘊)’의 가르침을 설파했다. 오온은 상호의존적인 요소들이 서로 합쳐진 집합체를 말한다. 오온을 현대어로 풀어서 말하면 ‘다섯 덩어리’ 혹은 ‘다섯 개의 집합체’ 정도가 될 것이다. 오온의 온(蘊)은 산스크리트어 스칸다(skandha)의 한역(漢譯)으로 ‘집합’, ‘무리’ 등을 의미한다. 이 다섯 집합체란 색온(色蘊)ㆍ수온(受蘊)ㆍ상온(想蘊)ㆍ행온(行蘊)ㆍ식온(識蘊)을 가리키며 줄여서 통상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이라고 부른다. 이 다섯 집합체인 오온은 물질의 집합
불교는 인도의 외교(外敎)나 서양철학 등이 설명하는 영원불멸의 본체나 실체를 주장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감각과 지각으로 인식 가능한 현상 세계만을 인정한다. 불교교리에 의하면, 우리에게는 시공간을 초월해 생멸변화를 넘어선 존재를 인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의 존재자체를 증명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또 가령 그 존재가 인식됐다고 해도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상세계와는 무관하며 수행이나 깨달음에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설하고 있다. 이처럼 부처님은 우리의 인식을 초월한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우리의 내면을 중시하고 수행정진에 힘을 쏟게끔 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불교에서는 시간과 공간 속에 있고, 우리들의 경험을 통해 인식할 수
혜학은 세상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그 진실에 따라 살아가는 바른 지혜의 실천을 말한다. 여기서 ‘진실의 파악’은 사성제의 실천과 연기(緣起)의 자각,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진여(眞如)의 파악을 의미한다. 삼학의 학(學)은 산스크리트어 쉬크샤(?ik?a)를 번역한 말로 ‘배움’, ‘연구’ 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이다. 하지만 쉬크샤는 단순히 ‘배우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하는 것’의 뜻도 내포하고 있다. 즉 학(學)은 훈련의 반복을 통해 자신의 몸에 습관을 들인다는 뜻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수행을 통해 생활 속에 구체화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계학(戒學)을 수행함으로써 정학(定學)에 들어서게 되고, 정학을 수행함으로써 혜학에 이르게 된다. 불교 최후의 목적은 깨달음의
?계ㆍ정ㆍ혜 삼학(三學)은 대소승의 여러 불교종파마다 내용상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있지만, 부처님이 설한 수행체계 분류법으로서의 권위에는 이견이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삼학의 체계가 불교의 독자적인 수행체계라는 점이다. 인도의 사상 속에 인간의 내면과 신체를 닦는 수행체계는 고대 인더스 문명으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불교가 생기기 이전에 존재했던 인도의 여러 종교단체들도 나름의 수행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서로 유사한 점도 많아 구분이 모호한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불교의 삼학 체계는 다른 인도의 종교, 즉 외도(外道)들의 수행체계와 구분 짓는 불교만의 수행체계이다. 이는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성문지(聲聞地)’ 등에 ‘불교에만 있고, 외도에게는 없는 수행법’
부처님은 40년간의 오랜 세월에 걸쳐 사부대중에게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다양한 수행법을 설했다. 이 수행법을 모두 포괄해서 정리해 놓은 것이 계학(戒學)ㆍ정학(定學)ㆍ혜학(慧學)의 삼학(三學)이다. 여기서 ‘배울 학(學)’은 글자 그대로 배움을 뜻하지만 오늘날 말하는 학문을 배우는 것이 아닌 수행을 배우는 것을 가리킨다. 계ㆍ정ㆍ혜 삼학의 계학은 몸[身]과 언행[口]과 생각[意]으로 짓는 악행을 막고 선업을 실천토록 하는 덕목이고, 정학은 마음을 고요하고 평안히 하여 깊은 정신집중 상태인 선정(禪定)에 들도록 하는 덕목이며, 혜학은 평정된 마음에서 분별심을 없애고 사성제 등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게 하는 수행덕목이다. 이 세 가지 항목은 서로 보완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칼로 무 자르듯 엄격히 나눌 수
팔정도의 일곱 번째 덕목 정념(正念)은 흔히 ‘바른 의식’으로 번역된다. 그러다보니 정념은 두 번째 항목 정사유(正思惟)와 다소 혼동되곤 한다. 정사유가 부처님이 설한 사성제 등의 진리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바르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라면, 정념은 마음이 평온한 상태에서 ‘주의집중’하는 것이다. 즉 정사유가 생각에 의한 판단작용과 관련이 있다면 정념은 주의를 기울이는 작용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해 자신의 몸과 마음 상태를 주의 깊게 살핀다는 뜻이다. 찰나의 짧은 시간에도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마음을 살핀다는 것은 불법(佛法)을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염두에 둔다는 것은 잊지 않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정념에는 ‘주의와 기억’이 함께 작용하는
‘대기설법 응병여약(對機說法 應病與藥)’은 부처님이 사부대중에게 가르침을 설할 때의 방법론이다. 즉 듣는 이의 수준에 맞게 마치 의사가 병자에게 약을 처방하듯 법을 설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팔정도의 각 덕목도 출가자와 재가자의 구분에 의해 다양한 설명이 나올 수 있고, 그때 마다 당연히 재가자보다 출가자에게 보다 엄격한 잣대를 대게 된다. 이번에 설명할 정명(正命)은 특히 출가자와 재가자가 지켜야할 기준 차이가 큰 덕목으로 부처님의 ‘대기설법’이 잘 드러나는 수행법이다. 팔정도에서 정명이 실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덕목이기 때문이다. 정견(正見)ㆍ정사유(正思惟)ㆍ정정진(正精進)ㆍ정념(正念)ㆍ정정(正定)처럼 보이지 않는 의식 세계와 관련 있는 덕목은 수행자가 얼마만큼 체득했는지 그 척도를 가
언어 능력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기준의 하나이다. 이 복잡하고 섬세한 체계의 언어 기능덕분에 인류는 현재와 같은 고도의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 의사소통수단인 언어를 통해 정보를 전파하고, 서로 교섭하며 많은 문제를 해결해왔기 때문이다. 종교와 철학은 물론이고, 첨단 과학이라 한들 언어라는 수단이 없었다면 결코 형성되지도 않았고, 전해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즉 인간의 정신적 행위는 언어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언어를 초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해도 결국은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언어의 세계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언어의 기능이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전하는 것처럼 좋은 작용만 하는
‘정진(精進)’은 불자가 아닌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말이다. 특히 수험생이나 고시공부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많이 들어본 말일 텐데, 정진에는 정신을 집중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다가간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즉 ‘목표를 향한 노력’을 뜻하는 말이 된다. 하지만 그 목표가 사람을 해하는 악한 목표라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그래서 노력도 올바르게 해야 한다. 팔정도의 여섯 번째 수행덕목인 정정진(正精進)은 올바른 노력을 뜻한다. 불교에서 올바른 노력에 의해 최종적으로 얻게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정진에 태만이 있을 수 없다. 정정진 속에는 근면한 자세가 필수적으로 포함돼 있다. 또 깨달음이라는 목표를 향해 한 치의 물러섬 없는 각오를 필요로 한
?이번에 소개할 내용은 팔정도의 네 번째 항목인 정업(正業)이다. 정업은 총괄적으로 바른 신체적 행위를 뜻한다. 즉 몸으로 지을 수 있는 나쁜 행동을 자제하고, 선(善)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 부분에서 간혹 불자들조차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정업은 ‘직업’에 관한 수행덕목이 아니다. 행위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카르마(karma)가 한문으로 ‘업(業)’으로 번역됐고, 직업(職業)의 ‘업’과 정업의 ‘업’이 같은 한자(漢字)이다보니 정업 안에 직업에 관한 내용도 포함돼 있다고 혼동하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엄밀히 말해 직업 또한 인간의 신체적 행위로 규정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직업에 관한 부분을 정업에서 떼어내 정업의 다음 항목인 정명(正命)에서 설명했다. 고대 사회도 직업은 중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