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세계를 색으로 경험하다

프랭크 허버트 원작 소설 영화화
희소 자원 둘러싼 갈등 등 그려내
허구의 세계, 영화적 장치로 표현

SF영화 〈듄: 파트2〉의 한 장면.
SF영화 〈듄: 파트2〉의 한 장면.

SF는 영어로 Science Fiction, 그러니까 과학에 대한 허구적 이야기를 지어내는 장르이고, 관습적으로는 ‘공상과학’이라고 번역하곤 한다. 그런데 사실 SF장르 안에 ‘공상’과 ‘과학’에 고르게 방점을 둔 작품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개봉 전부터 전 세계 흥행을 노린 〈듄: 파트2〉 같은 작품은 원작인 소설이나, 그 소설의 설정을 가져다가 만든 컴퓨터 게임이나 1984년에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연출했던 〈듄〉(이 영화를 당시에는 ‘사구’, 그러니까 ‘모래 언덕’이라고 소개됐던 작품)이나, 최근작까지 아무리 살펴봐도 설정이나 캐릭터, 서사는 과학의 범주로 해석할만한 내용이 아니다.

이런 장르는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한다. 클래식 음악에서 오페라라고 하면 대단히 고급스러운 장르의 연희인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치정, 살인, 전쟁, 마법 같은 극단적 상황들을 다룬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스페이스 오페라도 비슷하다. 지금까지 규명된 천체물리학이나 우주과학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의 미래 시점에서 어딘가 우주라고 설정된 배경을 모험과 전쟁이 펼쳐지는 무대로 만들고, 거기서 아주 극단적인 캐릭터들이 지구적 상식을 벗어난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장르다.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용어 자체가 음악의 오페라에서 바로 온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카우보이가 소를 치는 것이 아니라 말 타고 총질하며 원주민을 학살하거나 자기들끼리 영역 다툼하며 대결과 정복을 마초 오락물 장르인 호스 오페라(Horse opera)를 빗댄 대중적 ‘활극’ 장르인 것이다. 미국 서부가 배경이면 호스 오페라, 우주가 배경이면 스페이스 오페라.

‘우주활극’이라고 옮기는 게 적당한 스페이스 오페라는 이웃 농장이나 갱단과 겨루던 싸움이 우주전쟁이나 외계 침략이라는 스펙터클로 옮겨간 장르인 것이다. SF 가운데도 과학적 연구 결과나 가정, 이론적 정합성, 기존 지식에 대한 고증과 인용을 중시하는 〈마션〉이나 〈그래비티〉, 〈인터스텔라〉 같은우주 탐사(Space Exploration) 장르보다 대중적이든 매니아 중심이든 오락적 쾌감이 주된 요소가 되기 때문에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비과학적이어도 되는 장르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과학보다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과학적 방법’이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원래 영화 자체가 테크놀로지의 예술인데 스페이스 오페라에서는 테크놀로지가 공상을 실현하기 위한 형식의 거푸집이 돼 상상을 스크린에 실현하도록 하기 위해 총력전을 벌인다.

가령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에서 가장 유명한 시리즈인 〈스타워즈〉의 경우, 조지 루카스 감독이 자신이 상상한 세계를 구현할만한 테크놀로지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첫 편을 세상에 내놓고는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영화에 적용하기 위한 회사인 ILM을 설립해서 처음 만들어진 내용 이전의 이야기들인 프리퀄과 그 이후 이야기 연작을 시리즈로 만들었다.

시리즈가 만들어지는 동안 IT산업은 주인공의 성장 속도를 훌쩍 앞질러 발전해 가면서 관객들이 맨 처음 봤던 작품에서 등장했던 깡통로봇이나 우주선과 광선검보다 오히려 영화 속 역사로는 더 이전인 시대가 테크놀로지로는 더 첨단으로 구현되는 동안, 영화의 동일성과 정체성을 지탱하는 것은 동일자를 동일하게 만드는 시각적 재현이 아니라 영화 속 세계를 떠받치는 세계관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오랜 시간을 거치는 동안 과거에는 과거의 중생을 제도할 과거불이 있었고, 지금 시대에는 우리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 부처가 있고, 앞으로 인류가 어찌 될지 모를 먼 미래에는 그 시대를 품을 미래불이 있듯이 영화는 각 시대의 테크놀로지가 이끄는 대로 나아간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설정하는 세계관은 현실이 아니기에 ‘공(空)’과도 같으나 그것이 스크린에 펼쳐지는 순간은 시각과 청각을 사로잡는 ‘색(色)’으로 이뤄진다. 1984년에 만들어진 〈듄〉은 원작 소설의 세계관을 영화적으로 시각화하기에는 당대의 기술 이상의 상상으로 대중을 끌어들이는데 앞세웠던 것이 감독이나 배우의 이름값이 먼저였다. 

스파이스가 뭐길래 그걸 차지하겠다고 항공모함 크기의 모래 벌레가 출몰하는 다른 행성에 가서 원주민을 학살해가며 사막을 차지하려 하는지는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희소 자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욕망과 저항의 연대기는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몰입할 수 있다. 

세상이 어떤 정치적 제도와 권력의 사슬로 얽혀있든 아라키스 사막이나 코리노 제국, 하코넨 가문, 아트레이더스 가문, 프레멘 인들이 얽힌 제국과 식민지, 침략과 저항, 압제자와 해방을 이끄는 영웅, 전쟁과 난민, 정치와 종교의 경합은 저기가 별 세계라는 색을 걷어내고 보면 우리가 아는 색의 세계, 지구별의 역사, 인류의 여러 단면을 반사하고 있다.

그렇다고 스페이스 오페라로 심각하게 자본의 독점, 제국주의 침략, 원주민의 신화까지 훔치는 영웅 놀이, 가부장 권력에 저항하는 모계의 여성 해방 전선, 자원 개발로 망가지는 환경, 기후위기와 생태계 파괴, 수행보다 환각으로 구원을 바라는 인류의 암울한 처지 같은 걸 시시콜콜 사회과학적으로 따지는 건 이런 장르 영화에서는 옵션이 될 수는 있어도 영화 자체의 재미가 되기는 어렵다.

블록버스터가 쏟아 부은 제작비는 전 세계를 휩쓸었던 코로나 펜데믹 시기를 거치며 극장 스크린보다 OTT 플랫폼을 더 편하게 여기는 관객들을 다시 극장으로 불러내기 위해 영화만의 무기를 챙겼고, 〈듄: 파트2〉의 무기는 그것이 바로 스펙터클이다.

이 영화의 스펙터클은 아주 섬세하게 조정돼 텅 빈 세계관을 압도적인 색으로 채운다. 이 영화의 본질은 바로 ‘색’ 그 자체인 것이다. 관객들은 화면의 비율과 음향 설비가 제작진의 의도를 가장 생생하게 구현해줄 상영관을 찾아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예매 전쟁에 뛰어들게 됐다. 하루는 24시간인데 〈듄: 파트2〉의 상영회차를 보면 26시라는 임의의 시간대까지 관객을 모은다.

IMAX 상영관 가운데도 어떤 상영관이 수직과 수평을 오가는 화면의 변주를 잘 담아낼지, 서사를 담아내는 대사보다 음향처럼 울리는 음악이 잘 구현되는 좌석은 어디인지가 영화의 서사보다 더 중요해진다. 영화는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감을 자극하는 ‘색’ 그자체로의 몰입은 합리적일 필요도 없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듄’ 시리즈를 삼부작으로 만들겠다고 했는데, 프랭크 허버트의 원작 소설 6권 가운데 2021년에 발표된 〈듄: 파트1〉이 채 1권도 다 담지 못했고, 〈듄: 파트2〉에서야 1권이 겨우 마무리됐다. 이래서야 〈듄: 파트3〉에서는 나머지 5권을 모두 담는 건 무리지 싶다. 게다가 앞으로 극장이든 영화든 테크놀로지는 또 바뀔 터이고.

그러니 〈듄〉 시리즈를 즐기는 방법은 모처럼 순수하게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영화적으로 경험하며, 감각이 나를 세상과 이어주는 극단적 통로로 만드는 길이 극장이라는 걸 누리는 것이리라.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