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응무소주 이생기심

내가 살뜰히 챙기던 친척에게서
“성의 없다”는 말 듣고 상처 돼
무엇을 바라고 챙겨온 건 아닐까

아침마다 온라인 줌(ZOOM)으로 함께 <금강경>을 공부 중인 민희(가명)님은 사건이 있던 그날 밤부터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이 아팠는데, 다음날 마침 온라인으로 하는 100일간의 108배와 <금강경> 공부 안내를 보고는 ‘나를 위한 공부구나’ 싶어 동참하게 되었다고 한다. 정말 인생은 타이밍이다! <금강경> 법문을 읽다가 마음에 와 닿는 구절에선 울컥하며 말을 잇지 못하고, 아픈 상처가 떠오를 땐 한동안 울먹이던 그녀가 그날의 에피소드를 털어놓았다.

“저는 형제가 저 혼자뿐이에요. 자라면서 형제 없이 모든 걸 혼자 결정해오다 보니까 형제가 있는 것도 부럽고, 형제가 많은 것도 부럽고, 친척이 많은 것도 항상 부러웠어요. 그 부러운 감정 때문에 제가 상처를 더 잘 받는 것 같기도 해요. 고모님이 한 분 계시는데 슬하에 남매를 두셔서 그 사촌동생들과는 친형제처럼 지내왔어요. 얼마 전 남동생 생일이어서 전화를 걸었더니, 동생들 부부동반으로 한창 저녁을 먹고 있더라구요. ‘동생 생일에 갈 걸 그랬다’하는 아쉬움에 전화로 제 마음을 얘길 했더니 고모께서 딱 한마디, ‘오면 되지, 왜 못 와? 성의가 없어서 그러지’하시는 거예요. 제겐 그 한마디가 비수처럼 꽂혔어요. 사람은 항상 내가 해준 것만 기억하고 남에게 받은 건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동안 그 집안의 대소사에 관여해서 조언도 많이 했어요. 한마디로 오지랖이었죠. ‘이렇게 하면 좋지 않겠나, 저렇게 하면 좋지 않겠나’하면서 제 의견을 내고, 거기에 사촌동생들이 따르곤 했는데요. 남동생한테 처가에 인사는 잘 다녀왔는지조차 물을 정도였어요. 그런 반면에 동생들은 한 번도 제게 먼저 안부를 묻지 않았고, 제가 항상 주기적으로 잘 지내고 있는지, 별일 없는지 연락을 했어요. 제 딴에는 많은 걸 챙기며 지내왔는데, 결과적으로는 ‘성의가 없다’는 한마디만 남는구나 하는 생각에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어요. ‘이렇게 사람은 내 마음과 다르구나. 내가 굳이 그렇게까지 오지랖이 넓을 필요가 없었구나.’ 내가 이렇게 상처받고 힘든지 상대는 모르고 그냥 자기 감정대로 한 것뿐인데, 나한테는 이렇게 비수로 와 닿는구나. 내가 아직 마음공부가 덜 됐구나. 지금도 이렇게 얘기하다 보면 제 설움에 막 눈물만 나네요.”

남이 들으면 고모한테 한마디 들은 게 뭐 그리 대수인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민희님께는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부모형제간처럼 소통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날선 고모의 한마디가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오지랖이라고 표현하셨지만, 그동안 고모님 댁에 많이 베푸신 공덕으로 지금 부처님 법문을 공부하게 된 게 아닐까 해요. 그날 고모님의 그 한마디가 민희님에게 비수로 다가오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공부할 마음도 안 내셨을 거 아니겠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고모의 말에 가슴 아파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공부하는 열정을 낼 수 있었을까 싶어요. 작년에도 공부 안내를 봤었지만 그땐 지나쳤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금강경>을 공부하게 되어 오히려 감사해요. 하지만 인연을 끊을 생각도 했던 터라 아직 고모께 전화드릴 마음은 안 생기네요.”

괴로움의 정체가 뭔지, 그 괴로움의 원인이 뭔지 민희님은 아직 알지 못했다. 고모에 대한 서운함이 너무 커 내 마음의 괴로움은 고모에게서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고모의 말 때문에 내가 이렇게 괴로운데 어떻게 괜찮은 척 다시 또 전화를 할까?’라는 마음. 하지만 원인은 내게 있고 모두가 내가 뿌린 씨앗이다.

“사촌동생이 처가에 잘 다녀왔는지 물어봐주면서 내 딴엔 저쪽을 위해서 신경 쓰고 마음 써서 잘 챙긴 거라고 생각하시죠? ‘내가 너희들한테 이만큼 잘해줬으니 나를 고마워할 거야. 그러니 어쩌다가 내가 좀 못해도 내 본심을 다 알 거야’라고도 생각되고요.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성의 없다는 말을 듣고 ‘내가 성의가 없는 사람이었으면 지금까지 그렇게 했겠어? 어떻게 나를 그렇게 몰라?’라는 서운한 마음도 드실 거고요. 지금 중요한 건 그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내 마음을 보는 것이에요. 민희님 입장에서 상대방을 챙겼다고 하는 행동들이 저는 오히려 참견이나 간섭일 수도 있다고 생각돼요. 왜냐하면 부모조차도 이미 장성해서 가정을 이룬 내 자녀들에게는 독립된 가정이기 때문에 이러쿵저러쿵 간섭하기 어렵고, 조심해야 되는 부분이거든요. 그리고 ‘성의 없다’는 말에 상처를 입으셨다고 했는데,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민희님이 항상 성의 표시를 한 걸로 보이겠죠. 그러니 성의라는 단어가 나온 게 아닐까요? ‘내가 지금까지 상대가 요청하지 않아도 알아서 성의 표시를 해왔구나. 성의라는 단어는 결국 나한테서 비롯된 것이구나’ 생각해보세요.”

<금강경>엔 무주상보시(無主相布施)의 가르침이 나온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欺心)이라는 유명한 법문. 마땅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머문 바 없이’는 ‘내가 주었다는 생각 없이’ 주는 마음을 내라는 뜻이다. 바라지 말고, 생색내지 말고, 돌아올 것도 상정하지 말고 보시의 마음을 내라는 가르침.

김영애 문사수법회 법사
김영애 문사수법회 법사

“우리는 흔히 기브앤테이크, 주고받기에 익숙하죠. 주고 나면 하다못해 고맙다는 말로라도 은근히 그 대가를 기대하고 말이에요. 한탑 스님께서는 <금강경>의 이 말씀을 ‘주고 또 주라’는 쉬운 표현으로 항상 법문해주셨어요. 주고 나서 받을 생각 말고 ‘또’ 주라고요. 그저 주기만 하라고요. ‘지금까지 많이 베풀었다고 생각했는데 거기에 머문 바가 있었구나. 고맙다고 인사 받고, 잘한다고 칭찬받고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 내안에 있었구나. 그건 그들을 위해서 한 걸까, 나를 위해서 한 걸까?’ 그분들께 연락을 하고 안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을 살피는 일이에요. 서운함의 뿌리는 결국 ‘나’거든요.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서 ‘나’라는 게 있는 유위법은 꿈이요 환이요 물거품이요 그림자 같다고 하셨어요(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그러니 우리는 나무아미타불 염불하며 내가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해요.”

서운함, 미움, 원망심, 두려움 등 그 모든 것의 뿌리인 ‘나’라는 게 나올 때마다 그저 나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임을 믿으며 나무아미타불 하라시던 한탑 스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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