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상승 중인 가상화폐 시장
금, 가상화폐 모두 개념만 존재
실제·가상세계 따로 존재 않아

‘우리들 만나고 헤어지는 일들이 어쩌면 어린애들 놀이 같아~’


유행가 가사처럼, 요즘 벌어지는 세상사는 철없고 납득하기 어려워 보인다. “비트코인? 애들 불장난치는 걸 어른이 말려야지, 보고만 있으면 되겠습니까?” 수년전 뜬금없이 등장한 가상화폐 열풍에 각종 매체에서 떠들던 단골 멘트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불장난이 아니라 그야말로 불장(상승장)이다. 그때는 옳고 지금은 틀린 걸까? 진실은 사랑처럼 움직이는 걸까? 


소프트웨어에서 시작되어 인공지능, 가상현실, 메타버스, 디지털트윈, 블록체인 그리고 가상화폐에 이르기까지 현대사회를 이끄는 동력은 단연 디지털이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실세계에만 익숙한 우리에게 디지털은 낯선 세계일 수밖에 없다. 실세계만 진짜고 디지털은 가짜라는 선입견을 지우기 어려운 이유다. 


뇌과학은 감각기관으로 입력된 대상 정보가 어떠한 전달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전전두엽에 이르러 대상을 인식하는지 소상히 밝히고 있다. 수천억 개에 달하는 뇌세포 사이의 길고도 먼 정보 전달의 여정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왜곡을 토대로, 지각과 인식 사이에 개입되는 언어적 변환, 그리고 입맛대로 가공되어 저장된 기억으로부터 인출된 정보를 거쳐야만 눈앞의 대상은 비로소 인식된다고 뇌과학은 말한다. 우리가 실세계라고 믿는 것이 진실에 있어서는 컴컴한 두개골 속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영화와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그것도 감독과 주연 모두 자기 자신인 자작극이다. 붓다께서는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해 주신다. 일체가 연기된 것이기에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와 같다고.(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금강경>) 


한편 뇌과학이 인식 주체에 관한 진실이라면, 양자역학은 인식 대상에 관한 진실을 다룬다. 의식의 개입 없는 독자적 대상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양자역학의 결론이다.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금덩이만이 최고가 아니다.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비트코인이지만 금덩이를 능가한다. 누가 뭐래도 금은 진짜, 비트코인은 가짜 아니냐고? 아니다! 우리는 눈앞의 금덩이를 직접 본 적도 없고 볼 수도 없다. 개념으로만 볼 뿐이다. 비트코인처럼! 


붓다가 본 진리는 공성이다. 실체 없으며, 상호의존적이라는 뜻이다. 금덩이도 비트코인도 꿈속 어린애 놀이와 다르지 않다. 실세계 따로, 가상세계 따로가 아니다. 너 따로, 나 따로가 아니다. 공색여여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윤회계 존재를 세 가지 양태로 구분한다. 생시, 꿈, 그리고 죽음과 탄생 사이의 중음이다. 이 셋은 ‘불이(不二)’다. 생사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인 ‘불이’의 실상 진리를 통찰하기 위해 세 상태 각각에서도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의식의 계발을 최상의 수행법으로 삼는다. 비록 실체는 없지만, 상호의존적이기에 불이다. 

 

무엇을 상상하든 현실이 된다는 점에서 무한가능성의 진리다. 동시에 실체처럼 생생한 느낌과 의식과 행위를 수반하기에 저지른 업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발효된다는 점에서 무한책임의 진리이기도 하다. 오랜 논란거리인 우문으로 마무리한다. 현답은 독자의 몫이다. “윤회는 있는 걸까?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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