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경주 황룡사

가섭불 앉았다는 연좌석 비롯
장육존상·구층목탑 대작불사도
몽골 침입으로 모두 불탔지만
신라불교 자부심 드러낸 도량

황룡사지 금당터.
황룡사지 금당터.

가섭불의 옛터에 창건
주춧돌, 석탑, 석불 등 석조만 남아있는 절터를 순례할 때는 여러 생각이 든다. 작은 절터는 아늑한 느낌 속에 편안함을 던져준다. 큰 절터는 가슴이 팍 뚫리는 느낌을 준다. 물론 인간사 피할 수 없는 무상의 가르침을 덤으로 던져준다. 그러나 무상함보다는 이곳에서 그때 수행자들이 얼마나 신심 나게 수행하였을까 상상하며, 마음속으로 그때 모습을 그리는 즐거움이 더 크다.

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는 가슴이 뚫리는 느낌, 무상함, 상상의 즐거움을 어느 절터보다 강하게 준다. 특히 저녁노을이 질 무렵이면 더욱 그렇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황룡사 터는 과거불인 가섭불이 앉았던 연좌석이 있었다. 신라 경주에는 과거칠불이 계셨던 일곱 곳이 있다. 이곳이 그중에 하나다. 진흥왕 14년(553) 2월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는데, 그 터에 지으려고 할 때 황룡이 나타났다. 왕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고쳐서 황룡사를 세웠다. 진흥왕 30년(569)에 이르러 주위의 담장 지붕을 만들어 17년 만에 1차 불사가 끝났다.

진흥왕 35년(574)에 장육존상(높이 약 5m 이상의 불상)을 모셨고, 진평왕 6년(584)에는 금당을 완공하였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자장 율사의 권유에 따라 구층목탑이 착공되어 2년 뒤에 완성되었다. 이처럼 황룡사는 4대왕 93년이라는 긴 세월에 거쳐 완공된 대사찰이다. 그런데 고려 고종 16년(1238) 겨울 몽골의 침입으로 탑과 절과 장육존상을 모신 전각 등이 모두 불에 탔다.

지금은 법당을 지탱하던 주춧돌과 부처님을 모셨던 석조대좌만 남아있다. 그렇지만 <삼국유사> 등에 남아있는 이야기를 통해 황룡사를 상상할 수 있다. 무엇보다 황룡사는 신라불교의 자부심을 그대로 드러낸다. 과거불인 가섭불의 절터, 인도 아소카왕이 보낸 금동으로 조성한 장육존상, 황룡사 목탑을 세우게 된 인연 등에 담긴 이야기가 그러하다.

아소카 염원으로 모신 삼존불
신라는 다른 나라보다 불교를 늦게 받아들였지만 대신 매우 적극적이었다. 신라의 불연(佛緣)사상이 그 적극성을 나타낸다. 신라 땅은 옛날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황룡사 뒤쪽에 있는 큰 돌은 과거불인 가섭불이 앉았던 연좌석이라는 이야기가 그렇다. 그리고 불연은 멀리 인도와 직접 연결된다. 다음은 <삼국유사> ‘황룡사 장육’의 내용 요약이다.

서축(西竺, 인도)의 아육왕(아소카왕)은 부처님이 열반한 지 100년 뒤에 태어났다. 그는 부처님께 공양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금과 쇠 몇 근씩을 모아서 세 번이나 불상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매번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때 태자는 혼자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 조언하였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금쇠와 함께 불상 하나와 보살상 둘의 모형을 배에 싣고 공문을 첨부하여 바다에 띄웠다.

‘인도 아육왕이 누른 쇠 5만7000근과 황금 3만푼을 모아 석가모니 삼존불을 조성하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해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빕니다. 부디 인연 있는 국토로 가서 장육존상을 이루어주길 바랍니다.’

그 배는 오랜 세월 많은 나라에 이르렀다. 그러나 모두 불상을 조성하는 일에 실패하였다. 마지막으로 신라에 이르렀다. 이 소식을 들은 진흥왕은 배가 닿은 고을에 동축사(同竺寺)를 세워 배에 실린 모형 삼존불을 그곳에 모셨다. 그리고 금쇠로 불상을 조성하여 황룡사에 모셨다.

아소카왕은 기원전 3세기경 인물로 추정한다. 그는 인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 불교 전파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인도의 기원전 3세기 일이 신라의 6세기로 이어지니 무릇 900년 정도의 시간이다. 물론 과거불과 인연을 이야기하는 신라이니 900년 정도야. 배가 닿은 마을에 세운 절 이름이 동축사(同竺寺)다. 인도가 서축(西竺)이라면 이곳 신라는 동쪽의 부처님 나라라는 뜻이 된다. 이처럼 신라는 불연(佛緣)을 강조한다.

황룡사구층목탑 모형(황룡사지 황룡사역사문화관).
황룡사구층목탑 모형(황룡사지 황룡사역사문화관).

탑 세우고 삼한 통일한 신라
아소카왕은 인도 땅을 최초로 통일한 왕이다. 통일 전쟁으로 수많은 죽음이 있었다. 그 죽음을 보고 아소카왕은 참회하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기존 불탑을 해체하여 인도 전역에 8만4000개 탑을 세우고, 전 세계 불교 전파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로 인해 경전과 부처님 사리 등이 여러 지역과 오랜 시간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여기서 당나라에서 부처님 사리를 모셔온 자장 스님(590?~658?)과 연결된다. 신라 선덕왕 5년(636) 당나라에 들어간 스님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부처님 사리 등을 받아 귀국, 황룡사 구층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했다. <삼국유사> ‘황룡사 구층탑’에서는 신라의 불연을 언급하며 황룡사 구층탑을 세운 인연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문수보살은 자장 스님에게 말하였다.

“너희 국왕은 천축의 찰리종[인도의 크사트리아 계급]의 왕이다. 일찍이 부처님으로부터 수기(授記)를 받았다. 그러므로 남다른 인연이 있다.…훌륭한 스님들이 국내에 있으므로 왕과 신하들이 평안하고 모든 백성이 화평할 것이다.”

문수보살을 친견한 뒤 태화지(太和池) 곁을 지나는데, 홀연히 신인(神人)이 나타났다. 자장 스님은 타국의 침입으로 인한 백성의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을 물었다. 신인은 말하였다.

“황룡사의 호법룡은 바로 나의 장자다. 범천왕의 명령을 받고 이 절을 호위하고 있다. 본국으로 돌아가 절 가운데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아홉 나라가 조공하며 왕위가 길이 평안하리라. 탑을 세운 후에는 팔관회를 열고 죄인을 석방하면 외적이 해칠 수 없으리라. 그리고 나를 위해 경기 지방 남쪽 해안에 작은 절 한 채를 지어 나의 복을 빌면 나 역시 이 은덕을 갚으리라.”

자장 스님은 선덕여왕 12년(643) 귀국하여 선덕여왕에게 탑 세울 인연을 아뢰었다. 선덕여왕은 신하들과 의논하여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청하여 불사를 맡겼다. 탑 기둥을 처음 세우는 날, 아비지는 백제 멸망의 꿈을 꾸고서 손을 떼려 하였다. 그런데 홀연히 대지가 진동하면서 어둠 속에서 노승과 장사가 법당문으로부터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 사라졌다. 아비지는 이에 뉘우치고 그 탑을 완성하였다.

상륜부 높이 42척, 그 이하가 183척으로 총 높이는 225척(80m)이다. 자장 스님은 오대산에서 모셔온 사리 100과를 황룡사탑 기둥 안, 통도사 계단, 대화사 탑에 나눠 모셨다. 이는 태화지 못에 있는 용의 청에 따른 것이다.

탑을 세운 뒤에 천지가 태평하고 신라는 삼한을 통일하였다. 그 뒤에 고구려 왕은 신라에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침범할 수 없다 하였다. 세 가지는 황룡사 장육존상, 구층탑, 진평왕에게 하늘이 준 옥대다.

이후 황룡사목탑은 벼락 등으로 훼손되어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며, 고려시대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타버렸다. 지금은 받침돌만 남아있다. 바닥 면적만 해도 150평이고 지금 건물로 따지면 20층 정도다. 당시 경주 대부분 지역에서 우뚝 솟은 황룡사탑이 보였다.

황룡사지 복원에 대한 여러 의견이 있다. 복원에 여러 어려움이 있는 듯하다. 현재 황룡사와 황룡사구층목탑 모습을 추정하여 국립경주박물관, 황룡사지황룡사역사문화관에 작은 규모로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그런데 자료가 거의 없어 그 모습을 장담할 수 없다. 황룡사지에서 바로 보이는 남산 기슭이 탑골이다. 탑골에는 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이 있다. 여러 불보살님과 탑이 새겨져 있는 커다란 바위다. 새겨진 그 탑을 황룡사구층목탑의 모습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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