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안도감 주는 구체적·고전적 방법

천천둘레길, 만보산책로, 숲속 힐링길, 명상산책길, 암자순례길, 노을길, 다도의길, 회상길, 가족길, 사색길, 치유길, 행복의길, 사랑의길, 소롱콧길…….


대한민국에 있는 걷는 길의 이름이다. 길을 걸으면 영혼이 맑아질 것 같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놀러간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위적으로 지어진 최근의 길 이름도 전혀 즐겁지도 않고, 구체적 형상을 지닌 현실적 이름도 아니다. 손으로 잡기 어렵지만 걷다 보면 영혼이 맑아지고 현명해질 것 같은 이름이 다수이다. 육체적 필요성이 줄어드는 현대 기술사회에서 당연하다.
이제 걷기는 단순한 육체적인 활동이 아니다. 육체적 활동으로써의 걷기는 자동차가 대신해준다. 과거의 하위 병사나 비천한 계급의 사람들이 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을 위하여, 전쟁이나 노동을 위하여 걸었다. 하지만 현대의 걷기는 스스로의 육체적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걷는다.


걷는다고 해서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보다 비용이나 시간이 절약되는 것은 아니다. 속초에서 해파랑길을 걸은 적이 있다. 대포항에서 외옹치를 지나 속초 해수욕장에서 커피 마시고, 동명항에서 건어물을 산 다음에 장사항까지 걸었다. 바닷길을 따라서 걸으며 두 눈이 시원해짐을 만끽했다. 서울에서 회색 건물만 보다가 끝없이 펼쳐지는 파란 바다를 보면 마음이 시원해진다. 그래서 내륙에 살다가 바다를 보면 정신이 순화되는 느낌이 좋다.


하지만 같은 비용으로 서울에서 즐기면 좀 더 푸짐하고 넉넉하게 맛있는 것을 즐길 수 있다. 우선 속초까지의 왕복 교통비와 하루 숙박비만 해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해파랑길을 걷기 위하여 이틀의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였고, 앞으로는 틈틈이 시간을 내어서 부산부터 고성까지 동해안을 종주하는 해파랑길을 걸어보려고 한다.


물론 이렇게 걷기를 즐기는 것은 나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열풍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육체적 고통을 무릎쓰면서 걸을까?


웰빙이라는 단어가 나오면서 잘사는 것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하였다. 웰빙은 자본주의의 극대화로 말미암은 현대 산업사회의 병폐를 인식하고, 육체적, 정신적 건강의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려는 사람들이 들어나면서 나타난 새로운 삶의 문화 또는 그러한 양식을 말한다.


쉽게 표현하면 ‘잘 먹고 잘살자’. 여행도 마찬가지이다. 급하게 자동차에 실려서 목적지에 던져지듯이 내려지면 증명사진 찍듯이 후다닥 찍고 다음 여행지로 쫓기듯이 했다. 그런 여행에서 인간의 감각은 사라지고, 새로움에 대한 전율도 상실한 채 한 장의 종이로만 보상된다.


그러나 만져지고 느껴지는 아날로그 사회에 살다가 추상적인 데이터와 가치로 이루어지는 디지털 사회로 전환되면서 감각이 사라지는 현실에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의 욕망은 불안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느리고 구체적이며 감각이 살아있음을 갈구하게 되었다.


걷기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육체 활동이다. 따라서 걷기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본질적 여행이기도 하다. 현대는 다양한 여행의 수단이 있다. 육체를 편하게 하는 자동차, 비행기, 캠핑카…. 그런데 왜 가장 힘든 여행의 형태가 다시금 우리의 관심을 끌까?


디이어트를 위해 걷는 젊은 여성들, 건강을 위해 걷는 어른들, 우울증 치료를 위해 걷는 주부들까지. 이 모든 걷기 여행 붐에는 삶의 속도를 늦추고 나를 돌아보자는 취지가 담겨 있다.


그것은 우리가 만질 수 없다는 이유로 무시했던 영혼의 목적지에 대한 동경이다. 현대인에게 걷기는 그 목적지에 대한 순례이다. 실제로 걷기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이고, 그 순례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걷는 여행이다. 그 길의 끝은 성야고보의 성골함을 보기 위함이다.


한국적 걷기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제주도의 올레길도 카미노에서 영감을 얻었다. 시초는 다분히 순례의 의미였다. 그런데 그 순례의 의미가 변형되고 있다. 만지고 느껴야 하는 아날로그적 인간이 추상적 데이터와 가치로 이루어진 디지털 세계에 산다. 빠르게 디지털화하는 세상에 서서히 흐르는 아날로그적 인간은 혼돈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 현대인에게 마음의 안식을 찾는 방법으로 두 다리로 걷기가 나타났다. 가상의 세계에서 잃어버린 좌표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다. 걷기는 전혀 새롭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안도감을 주는 대단히 구체적이고 고전적인 방법이다. 뭔가 새로운 세계에서 익숙한 방법으로 몸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일이 아직도 있다니, 일마나 다행인가?


걷기. 일시적 유행이라고 보기에는 매우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유지해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사회의 거대한 흐름의 변화를 베가트렌드라고 한다. 걷기 트렌드는 걷는 활동 중의 하나인 등산과는 또 다르다. 등산은 힘들어도 산에 오르는 활동에 중점을 두지만, 걷기는 ‘어디를 왜 걷는가?’도 중요하다.


즉, 테마가 있는 길들을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북한산 둘레길이 각 코스마다 고유한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은 그 지역이 갖고 있는 상징성을 표현하고, 그 길을 걷는 데 의미를 부여하고자 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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