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묻은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

망자는 천도재로 이끌 수 있지만 
산자는 삶을 이어 나가야 하기에
과거를 돌아보는 파묘는 계속된다

학교 다닐 때, 소풍날이나 운동회에 비가 오면 아이들끼리 소곤대곤 했다. ‘우리 학교 처음 지을 때 땅을 파는데 피가 쏟아지더니 커다란 이무기 몸통을 잘랐대. 하루만 더 있으면 용이 되어 승천하려던 이무기였는데 그렇게 죽게 되면서 원한을 품고 저주를 내렸대. 그래서 소풍날이나 운동회 때마다 비가 오게 된 거래.’ 뭐 이런 이야기들.

황당하지만 뭐, 아주 뜬금없는 이야기는 아니기도 하다. 근대적 학교는 갑자기 넓은 빈 터를 필요로 했고, 풍수를 오래 존중해온 문화권에서 좋은 땅은 이미 ‘명당’이라는 이름으로 도시에서는 이미 사람이 들어 살거나 땅값이 엄청 비쌌고, 농사가 경제의 바탕인 사회에서 볕 잘 들고 땅 힘 좋은 터는 논이 되고 밭이 되었으며, 사람 모여 살만하지 않은 산골에서도 자리가 좋다 싶으면 이름 있는 집안 대대로 선산 묫자리로 차지하고 있었으니.

그래서 값이 헐하고 살만 하지 않은 터는 학교 자리가 되고, 병원 자리가 되다 보니 흉한 이야기가 돌게 되기도 했을 것이다.  

과학도 학문도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동서고금 어디에나 있어왔다. 이런 이야기들이 대중문화와 만나 장르가 되었다. 오컬트, 과학적으로 규명도 설명도 할 수 없는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현상. 가령 귀신이 들렸다거나 저주에 씌었다거나 괴수가 날뛴다거나 하는 이 장르는 판타스틱 문학과 영화의 큰 축이 되고 있다.

예전에는 ‘납량특선’이라는 이름으로 해마다 여름이면 오컬트가 개봉되고는 했다. 으스스한 내용의 영화들을 보면서 더위를 물리치라는 상업적 계산으로. 냉난방 시설이 보편화 되면서 오컬트도 계절을 타는 장르가 아니게 되었다. 3.1절을 앞두고 〈파묘〉가 개봉하게 된 것처럼.

공포와 불안, 긴장과 불길함이 관람의 한 요소가 되는 장르다 보니 매니아는 있어도 초대박이 쉽지 않은 장르가 오컬트인데 지금 〈파묘〉(장재현 감독)의 기세는 한국영화 오컬트의 역사뿐 아니라 흥행사 자체를 새로 쓰고 있다. 이 영화 자체가 역사를 파헤치듯이. 

〈검은 사제들〉, 〈사바하〉 등 이미 오컬트 장르를 빚어내는 데 탁월한 장재현 감독이 풍수, 장례지도, 무당 역을 맡긴 배우들은 최민식, 유해진, 김고은, 이도현이 뭉친 ‘묘벤저스’ 4인방. 이들은 각각 장르 영화나 드라마에서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연기자들이다. 이들을 위협하는 ‘험한 것’도 영상 콘텐츠에서는 이미 대세가 된 CG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배우 김민준과 농구선수 김병오 두 사람이 실제 몸으로 연기한 것이라 인공적인 화면과는 결이 다른 날것 그대로인 육체에서 나오는 조화와 긴장이 배어있다.

‘험한 것’의 존재감이 살아 있는 것이듯 〈파묘〉의 이야기도 살아 있다. 영화는 한국의 무당들이 비행기를 타고 미국까지 날아가는 데서 시작한다. 현대 의학으로도 까닭을 모르겠는 증상으로 앓고 있는 아기의 병세를 살피러. 

아기도 아기지만 장손들에게 흉사가 대물림하는 내력까지 알아챈 무당이 말하기를 조상 묘를 잘못 써서 문제란다. 미국에 이민 가 으리으리하게 살고 있던 집안에서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는 길은 집안 내력을 되짚어야 하는 길이고, 그 집안이 무덤 속에 묻어버린 일들을 파헤쳐 드러내는 길이고, 조상 모시는 정성을 최고의 효성으로 치는 장례문화와 묫자리로 조상 덕 보겠다는 풍수사상의 뿌리가 깊은 문화권 출신이니 성공한 이민자 집안에서 파묘 비용에 10억 들이는 걸 감당하는 것도 과하긴 하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려니 싶다.

묫자리 길흉을 살피려니 풍수를 봐야겠고, 흉한 묫자리면 예전 묘를 파헤쳐 망자의 시신을 새로 수습하려니 장례지도사가 같이 살펴야겠고, 받은 돈이 크니 최고끼리 모여 나서기까지 망설임이 없다. 그러나 이들이 막상 묫자리를 가보고서 당황한다. 상식적으로 묘를 쓸 자리가 아닌 곳에 자리한 무덤, 무덤까지 가는 길에 보이는 여우 무리, 파묘하고도 관을 열지 말고 염도 새로 하지 말고 바로 화장하라는 의뢰인 집안, 이런 일을 업으로 하는 전문가 눈으로 볼 때 위험하고 흉한 일이라 보수가 얼마든 거절하고 싶어진다. 그래도 이들이 결국 나서기로 한 건 아기 목숨이 달렸기 때문이다.

〈파묘〉는 앞으로 살아갈 존재에게 닥친 위기에서 시작해 그 존재를 위협하는 과거의 망령, 그 망령이 숨기고 있는 것은 그냥 과거가 아니라 뒤틀린 역사, 그 역사 때문에 위기를 겪는 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라는 촘촘한 업보의 망이 무덤 하나에 중첩되어 있다는 것에 초점을 들이댄 돋보기 같은 영화다. 

일제강점기에 작위 받아 부와 권세를 누린 친일 집안에 맞서 항일독립군이 겨루고 있었다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 있는 집안일수록 풍수 따져가며 돈도 들이고 품도 들여온 오랜 풍습, 음양도를 믿어 음양사를 따로 관료로 등용했던 일본의 역사, 음양사 가운데도 여러 기담과 영화·만화에서 인용되는 여우의 핏줄이라는 아베노 세이메이를 빗댄 연출, 지금까지 청산되지 않은 친일 논란들이 실제 파묘와 이장에서 이뤄져왔던 제례 형식과 무속 퍼포먼스에 어우러져 스크린을 휘몰아친다.

〈파묘〉가 불러들이는 역사나 무속은 전혀 낯설지 않다. 아주 독실한 기독교 신자도 매년 ‘신년운세’를 보고, 액막이로 아기 백일날 수수팥떡에 해 바뀔 때면 동지팥죽, 새로 시작하는 일에는 고사떡 돌리는 풍속에 입맛 길들여지고, 무속인 찾아가 연예인들 사주팔자 보는 콘텐츠가 공중파부터 인터넷까지 넘쳐나고, 손바닥에 쓰여진 ‘王’자가 방송에 잡혀 대통령 후보가 공개적 해명을 했어야 했던 게 현실이니까.

오컬트 장르가 대중적인 까닭은 그것이 무섭고 기이한 볼거리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이런 현실과의 연관성 때문이다. 겪었거나 전해들은 이야기들, 일어났던 일들, 그것들로부터 만들어진 괴이한 소문들의 잉여가 불러일으키는 현실적인 불안과 공포가 대중에게 공감받으면서 ‘있을 법한 가능성’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이 실현가능한 것일수록 더 쫄깃하고 짜릿하므로 오컬트의 뿌리는 현실을 깊이 파헤칠수록 성공적이 된다.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다. 윤회를 믿고 영가의 성불을 기원하는 불교에서는 화장이 자연스러웠으나 육신의 부활을 믿는 종교들은 아예 화장을 금지했었다. 가톨릭이 화장을 허용한 것도 1983년 교회법을 고치고 나서부터였고, 설이나 추석의 중심 행사는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는 것이고, 할로윈은 망자들이 돌아오는 날을 기리는 행사였다. 〈파묘〉는 제대로 된 장례는 바로 산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과거사가 잘못 묻어버린 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현실이 위태롭다는 걱정을 보탠 영화다. 최선을 다해 현실을 잘살기 위해 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 노력해보자는 소망까지 덤으로 붙여서. 

〈파묘〉의 흥행은 대중들의 기원을 담고 있다. 망자는 천도재로 이끌 수 있다지만 살아있는 존재들은 계속 살아가며 인연을 이어가야 하고, 그 인연의 다발이 역사를 이루니 현재가 잘못될 때마다 과거를 돌아보는 파묘는 계속 될 것이고, 묻혀있던 ‘험한 것’들을 없애나갈 때마다 현실이 그만큼 나아질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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