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불상은 누가 훼손했을까?

일제의 도굴로 생각할 수 있지만
유리건판 사진보면 이미 훼손돼
경주 남산, 양반들 묘소로 활용
조선시대 家廟 조성하며 절 파괴
남산 불상들도 같은 이유로 훼손

경주 남산 용장곡 석조여래좌상. 가사 소매들의 표현이 매우 섬세한 불상이지만, 불두와 수인이 훼손돼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경주 남산 불상들의 불두들이 훼손된 것은 조선시대 양반들이 남산에 묘소로 조성하며 인근 절과 불상을 파괴한 것으로 보인다.
경주 남산 용장곡 석조여래좌상. 가사 소매들의 표현이 매우 섬세한 불상이지만, 불두와 수인이 훼손돼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경주 남산 불상들의 불두들이 훼손된 것은 조선시대 양반들이 남산에 묘소로 조성하며 인근 절과 불상을 파괴한 것으로 보인다.

배동 삼존불상을 참배하고 길을 돌려 서남산길로 다시 나오면 조금 위에 삼릉이 오른쪽에 나타난다. 경주 남산의 소나무를 대표하는 구부러지고 멋스러운 철갑을 두른 소나무 숲에 삼릉이 있다. 삼릉은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것이라 전하고 있다. 그러나 천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무수한 신라왕릉 중 주인이 밝혀진 왕릉은 8기밖에 없다. 그렇기에 삼릉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내가 경주에서 제일로 뽑는 왕릉은 진평왕릉과 헌덕왕릉이다. 소박하고 고즈넉하면서 멋스러운 소나무에 둘러싸인 왕릉이다. 차 또는 커피와 돗자리만 있으면 눕거나 앉아 왕릉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포근히 안길 수 있어 좋아한다. 서남산의 삼릉은 소박함과 고즈넉함 그리고 멋스러운 소나무를 다 갖추었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쇠로 만든 울타리의 둘레가 있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사진이나 눈으로 담거나 보기에 풍경이 기가 막히지만 다가갈 수 없는 섭섭함이라고 할까 서운함이라고 할까 이런 마음이 드는 왕릉이다. 그러고 보니 경주 왕릉에서 가까이 다가서지 말라고 쇠로 된 울타리가 쳐진 왕릉이 또 있나 싶다. 앉아서 쉬고 싶지만 뭔가 그런 마음을 내기에 쉽지만은 않은 삼릉이다.

삼릉을 지나서 10분 정도 산을 좀 오르면 바위 위에 불두와 양손이 사라진 불상이 얹어져 있다. 불상이 있는 자리는 이제는 절의 이름도 추억도 사라진 ‘삼릉계 제2사지’라고 이름 붙여진 절터였다. 1964년 근처 계곡에서 불상이 발견되어 지금의 자리에 옮겨 놓았다. 불상은 왼쪽 어깨의 가사 매듭이 특별하다. 가사를 묶고 매듭을 지어 왼쪽 무릎에 늘어뜨려 놓았는데 술 장식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이런 가사를 끈과 매듭으로 결합한 모습은 남산의 용장사지 석조여래좌상에서도 비슷한 양식이 확인된다. 또한 불상의 중앙에 보이는 속옷인 ‘승기지’에도 매듭이 보인다. 가사와 속옷을 매듭으로 묶는 것은 지금의 한국불교계에선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매듭과 술을 재현하면 멋져 보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불상은 대좌와 하나의 돌로 조성되어 있다. 대다수 불상은 불신과 대좌를 따로 조성하는데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대좌는 아예 다 파괴되어 있다. 큰 바위 자체를, 그래서 남산 자체를 대좌로 한 불상은 아닐까 상상해 본다. 그랬다면 남산을 기단으로 한 용장사지 삼층석탑과 늠비봉 오층석탑처럼 상식의 틀을 넘어선 남산을 대좌로 삼은 멋들어진 불상이었을 것인데 아쉬움이 남는다. 

경주 남산에서 발견된 불상은 대다수가 파괴되어 불두가 없는 경우가 많다. 탑들 또한 파괴되어 흩어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2015년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 조사한 〈한국의 사지〉의 경주 남산에 관한 자료에서 절터는 149곳이 확인된다. 그리고 석탑은 99개, 마애불상은 73상, 불상은 129상이 확인된다고 전한다. 그러나 149곳 대다수 절터는 모두 폐허이며 알아보기조차 힘들 지경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남산의 불교 유적의 폐허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도굴에 의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남산에 관한 조사 자료와 유리건판 사진을 보면 이미 남산은 폐허의 상태였다. 불상은 모두 파괴되고 넘어져서 흩어져 있었으며 불두는 거의 모두 깨져 있었다. 남산의 석탑들 또한 모두 무너지고 파괴되어 있었다. 조선에 발을 들인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눈을 통해서도 경주 남산의 처참한 모습이 확인되는 것이다. 

경주 남산 불상과 불탑의 파괴가 도굴에 의한 것이 아니란 점은 불두가 사라지고 몸만 남은 불상이 많은 것으로도 확인된다. 불상의 경우 불두에 부장물인 보물을 보관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도굴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상황에서 횡행한 현상이었다. 조선시대 불교 유적과 관련된 도굴에 관한 기록은 전무하다.

그렇기에 조선시대 도굴을 위해 경주 남산의 불상과 불탑을 파괴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미 일제강점기 이전 경주 남산의 불상과 불탑은 파괴되어 있었다. 경주 남산의 불상 불두가 대다수 깨지고 잘린 것은 도굴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도굴을 위해 불두를 자르고 멀리 버려 지금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을 이유도 없어 보인다. 혹시나 도굴의 과정에서 석불이 넘어져서 깨진 것이라 해도 많은 경주 남산의 불상 불두가 사라졌거나 계곡에 나뒹굴던 이유가 되지 못한다. 도굴로 불상이 넘어진다고 불상의 불두가 깨져 사라질 리는 없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 이전 남산의 불상과 불탑이 파괴되어 있었다는 점은 도굴에 의한 파괴가 아닌 점을 알려준다.

경주국립박물관 야외 전시 석조 유물 중에는 불두가 없는 불상이 쭉 서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여기에는 1965년 분황사에서 발견된 석불이 20여 점이 있다. 분황사 뒷담 북쪽 30m 즈음에 있는 우물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견됐다. 토지의 주인이 논에 대는 물이 한곳에 고이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땅을 팠더니 괴석이 나왔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을 듣고 옛 문화재관리국에서 지하에 고분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땅을 파 내려갔다. 그랬더니 40m 지점에서 석불이 출토되었는데 2m 정도 깊이로 석불이 계속 발견되었다. 옆을 보니 우물의 벽선이 확인되어 우물가에 던져진 석불로 판단됐다. 불상이 발견된 지점은 신라시대 분황사의 금당이나 강당의 부근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발견된 불상들은 모두 불두가 잘린 상태로 발견되었다. 발견된 불상 등 석조 유물은 석조여래좌상이 13구, 석조보살입상이 1구, 불두가 5점, 광배편이 1점, 그 외 불상이 6구이다. 조선시대 어느 때 분황사 주위에 있던 불상을 파괴하고 우물에 묻은 것이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왜 우물가에 버렸을까? 누군가는 파괴된 불상을 스님들이 우물가에 숨겨놓은 것이라고도 한다. 분명한 것은 조선시대 경주의 야외에 있던 석조불상이 파괴되었다는 것이 확인된다는 점이다. 특히나 경주 남산의 석조불상들이 거의 모두 파괴되고 불두가 깨져 사라진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에 의해 경주 남산의 불상과 석탑은 파괴된 것일까? 이유는 경주 남산 절터에 조성된 묘지에서 찾을 수 있다. 남산의 석탑이 있던 자리나 불상이 있던 자리에는 석탑과 불상이 파괴되고 묘지가 있었다. 남산의 등산로에는 경주 남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기에 묘지의 이장을 권하는 안내문을 쉽게 볼 수 있다. 경주 남산에는 지금도 무수히 많은 묘지가 남아있다. 특히나 절터에는 묘지가 있거나 있었던 흔적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초기부터 이루어진 숭유억불 정책으로 사찰들은 불태워져 폐사되고 있다. 이러한 억불의 정책 속에 조선 말기가 되면 전국에 폐사지가 산재하게 되었을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폐사지에는 석조로 된 불상과 불탑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 말기가 되면 풍수지리의 영향으로 양반들은 자신들의 조상을 금당과 불탑 자리에 모시는 유행이 불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순조실록〉에 보이는 경기도 광주에 사는 양반의 양주 회암사의 부도와 비석의 파괴가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러한 절터에 묘지를 쓰는 유행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꼽는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지를 쓰기 위한 예산 가야사의 파괴가 있다. 그러나 왕위에 등극한 고종과 그 후손들의 모습을 본다면 절터를 파괴하고 석불과 석탑을 파괴한 인과응보의 무서움 또한 확인될 것인데 양반들의 이러한 파괴적 행동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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