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나’라는 상(相)을 버려라

성인이 된 자식의 진로 결정이
걱정되더라도 그건 부모 기준
스스로 헤쳐 나가는 힘 격려를

금융업에서 30여 년간 종사해온 연숙 씨에게는 20대 중반의 딸이 있다. 서울에서 자취하며 대학을 졸업하고 호텔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안고 취업을 준비 중인데, 그 딸의 진로를 고민하며 연숙 씨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혹시 주위에 호텔 쪽 근무하는 분 아세요? 저희 딸이 이번에 A, B 호텔 직원채용에 응시했는데 두 곳 모두 합격했어요. A호텔은 3성급인데 정규직이고, B호텔은 5성급이지만 계약직이에요. 아무래도 정규직이 급여도 높고 안정적이니 3성급이어도 저는 A호텔을 갔으면 하는데, 딸은 5성급 B호텔로 가겠다고 하네요. 비록 계약직이어도 본인이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고, 무엇보다 외국인과의 접점이 더 많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라서 꼭 가고 싶다는 거예요. 딸은 전부터 럭셔리하고 근사하게 살기를 원해왔는데, 저는 그 점도 좀 마땅치가 않아요. 세상 물정을 몰라서 정규직 놔두고 계약직으로 가는 것 같아 말리고 싶네요. 제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될 때 엄청 고생해봐서 잘 알거든요. 혹시 호텔업에 종사하시는 분 계시면 조언을 구해서 딸아이한테 마음 돌리라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자식의 고생길이 훤하게 보일 때 우리 마음은 어떠한가? 안타까움이 앞서 자식의 마음을 돌려놓고 싶은 유혹이 생기는 건 비단 연숙 씨에게만 일어나는 마음은 아닐 것이다. 자녀의 진로선택에 있어 부모가 원하는 곳과 자녀가 원하는 곳이 다를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경험의 폭과 연륜의 깊이가 다르니 분명 부모가 더 바람직한 판단을 할 확률이 높을 수는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부모의 인생이 아니라 자녀의 인생이라는 점이다. 자녀 인생의 주인은 부모가 아니라 자녀 본인이다. 돌봄이 필요하고 미숙한 청소년기 자녀에게는 부모의 조언이 어느 정도 필요하겠지만 이미 성인이 된 20대 중반으로서 자신의 주관이 명확하고, 스스로가 원하는 바에 따라 방향을 결정하고, 도전할 곳을 알아본 후 채용시험을 준비하고 합격까지 했다면 더 이상 부모가 끼어들 일이 아닌 것이다. 스스로 도전하고 개척해가는 자녀의 열정을 그저 찬탄해주고 격려해주고 믿어주는 지지가 필요할 뿐이다.

“따님 잘 키우셨습니다. 괜한 걱정 마시고 야무진 따님을 칭찬해주세요. 앞으로 직장생활에서 어려움이 닥쳤을 때 자신이 선택한 곳에선 이겨낼 힘이 나오지만 부모가 정한 곳에선 부모 때문에 이곳에 와서 내가 이렇게 힘들다는 원망심이 나올 수 있으니, 그 마음 거두시고 그저 따님을 위해 밝은 마음으로 축원을 해주세요.”

부처님 법문에 의지해 사는 불자는 자녀에 대한 집착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잣대와 기준으로 자녀를 대하는 걸 경계해야 한다. 성인이 된 자녀가 스스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며 시행착오를 거쳐 성장하는 기회를 빼앗지 말자.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각자의 배를 조정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어린 자녀를 키울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녀의 시행착오를 두려워 말자. 시행착오라는 말도 사실 맞지 않는 표현이다. 이름하여 시행착오일 뿐 실은 자녀를 키워주는 소중한 경험들이다.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서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말씀하신다. 내 기준으로 자녀를 키우지 말고 자녀 스스로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살도록 돕자. 자녀를 바라보며, 그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그들이 진정 원하는 삶의 길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도록 조용한 응원자가 되어주자. 그리고 그들에게 단단한 정신적 지주가 되어줄 수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자. 그리고 은밀하게 숨어있는 부모 자신의 두려움을 자식에게 투영시키지 말자. 두려움 또한 아상이기에 그저 나무아미타불로 항복받아야 할 것이다. 한탑 스님께서는 <금강경법문>에서 이렇게 법문해주신다.

김영애 문사수법회 법사.
김영애 문사수법회 법사.

“만약에 ‘나는 남을 제도할만한 능력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무슨 상(相)입니까? 그것은 ‘아상(我相)’입니다. ‘저 사람은 내가 제도해야 되겠다’하면 그것은 ‘인상(人相)’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과 내가 같이 열반의 세상에 들어가야 되겠다’는 것은 중생상(衆生相)입니다. ‘그러니까 역시 내 생명이 귀하구나’하면 ‘수자상(壽者相)’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누군가를 고치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은, 그 사람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있다는 생각이 밑변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내가 고칠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동안, 상대방을 제도하기는커녕 영원히 나 자신도 상대유한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어야 보살입니다.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는 것이 나무아미타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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