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영향으로 차문화 접해
‘다신전’ 편찬, 茶연구에 매진
초의가 주목한 제다는 ‘조청법’

무쇠솥에 차를 덖는 모습. 불을 이용하여 찻잎의 독성을 중화시키는 것이 제다의 시작이다. 
무쇠솥에 차를 덖는 모습. 불을 이용하여 찻잎의 독성을 중화시키는 것이 제다의 시작이다. 

조선 후기 민멸 위기에 놓인 차 문화를 중흥할 수 있었던 것은 초의 선사(1786~1866, 이하 초의)의 노력과 사대부들의 차에 대한 인식 변화에서 비롯됐다. 이런 변화의 흐름은 당시 연경(현재 북경)을 출입하며 청의 문물에 관심을 가졌던 유학자로, 대개 초의와 교유했던 사람들이 주도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의 차에 대한 관심에 부응한 것은 초의가 만든 초의차인데, 이는 우리 차의 우수성과 자긍심을 심어 주었던 좋은 차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초의는 어떤 연구 과정과 발심을 통해 초의차를 완성했던 것일까. 그 과정은 이랬다. 바로 그가 출가한 운흥사는 차의 산지인 화순에 위치했기 때문에 사미승 시절 그곳에서 수행했던 스님들의 수행 규범을 익힐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아울러 차에 밝았던 대흥사의 완호 스님(1758~1826)이 겨울 한 철 운흥사 암자에 차를 마시며 수행했다는 점도 초의가 차에 눈을 뜨게 된 배경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가 본격적으로 차의 연구에 매진한 시기는 1830년경이다.

이는 1815년 김정희(1786~1856)와 해후한 후 차에 대한 관심이 증폭돼 1830년경 <다신전>을 편찬에서 확인된다. 물론 김정희는 초의가 차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 인물이다. 초의가 김정희를 만난 것은 1815년으로, 이해 겨울 첫 상경한 초의는 학림암에 머물며 수행할 때다. 

이 무렵 김정희는 학림암으로 해봉 선사(?~1826)를 찾아와 공각소생(空覺所生)을 담론했고, 이 자리에 초의도 동석했다. 당시 초의는 해봉 선사와 김정희의 치열한 불교 논쟁을 곁에서 보면서 그의 해박한 식견에 감동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김정희가 연경에 갔을 때 옹방강(1733~1818)의 제자 완원(1764~1849)의 쌍비관에서 대접받았던 용단승설을 맛본 후 오묘한 차의 세계를 경험했던 이야기도 나눴을 것이리라. 그러므로 초의는 그의 차에 대한 깊은 안목과 관심에 주목했을 것이 아닐까. 아무튼 이를 계기로 초의는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선종의 차 문화를 복원하려는 의지를 확고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초의는 <다신전>의 편찬 과정에서 초의가 주목한 제다법은 명대의 초청법이다. 바로 뜨거운 무쇠 솥에서 차를 덖는 방법이다. 이는 잎차를 만드는 제다법인데 초의는 대흥사에 차밭을 만들어 본격적인 제다 연구에 매진한 결과 맑고 경쾌하며 단맛과 싱그러움이 감도는 한국 차의 특성을 함의한 초의차를 완성했다. 이는 그가 제다법에 대한 해박한 이론을 두루 섭렵한 후 이를 토대로 제다의 실증 연구에 매진한 결과라 하겠다. 

한편 초의는 1837년 홍현주(1793~1865)의 요청으로 <동다송>을 저술했다. 이 무렵 초의는 제다법을 거의 완성해 가던 시기이다. 실제 그가 초의차를 완성한 시기는 1842년경으로, 이는 김정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삼매(茶三昧)의 경지를 얻었다”는 극찬을 받았던 사실에서 확인된다. 

한편 조선시대는 차 문화의 쇠락 시기로 정의한다. 이는 융성한 차 문화를 이룩했던 고려시대와 견주어 본다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대개 한 나라의 문화 융성과 쇠락은 어느 시대보다 융성했고 어느 때보다 발전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는 등 그 기준을 삼을 만한 시대가 있고, 이 시대에 비해 그런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조선시대의 차 문화는 고려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새로운 차 문화의 유형을 만들어내지 못했던 경향을 보인다. 바로 차 문화의 질적 수준은 좋은 차를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의 유무(有無)와 음다층의 문예적인 소양과 식견, 다구의 실용성과 예술성이 함의된 다구로써의 완성도 등을 기반으로 형성된다. 그러므로 융성한 차 문화를 구가했던 고려시대에 비해 조선시대는 그 시대를 대표할 차 문화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런 결과는 조선이 건국한 후 태종 16년(1416년 9월) 예조의 건의로 기신제에 울리는 제물 중에 차를 술로 대체하라는 조칙이 내려진다. 이는 조선시대가 차에서 술로 전환이 됐음을 나타낸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의 시기에도 차를 즐기는 명맥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차의 진수를 아는 이들이 점차 적어졌고, 임진왜란과 호란을 거치는 동안 차를 즐기거나 아는 사람이 더욱 드물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차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그 진수를 알아차릴 사람을 기다렸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차의 진면목을 알아차린 사람으로 정약용과 그 자제들, 초의와 그 제자들, 김정희와 그 형제들, 그리고 제자들, 신위, 박영보, 홍현주와 그 형제들 등이 있다. 실제 초의와 교유했던 북학파 경화사족들은 초의차를 통해 차의 진수를 경험함에 따라 차를 애호하는 계층으로 부상돼 이 시기에 차 문화를 이끌었다. 이뿐 아니라 조선 후기 차의 애호층 확대는 경제력을 갖춘 중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이 주관한 시사회(詩社會)에서 차를 즐기며 시를 짓고 그림을 감상하는 흐름을 보였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김정희와 관련이 깊은 인물이라는 특징을 보인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18세기 말 이덕리는 진도에 유배된 후 이곳에 널려 있는 차나무를 보고 이를 활용해 나라에 도움이 되고 민생을 넉넉하게 할 방법을 제안했으니, 이는 그의 저술 <기다>에서 드러난다. 

아울러 정약용도 <상두지>에서 쓸모없는 초목처럼 여겼던 차를 활용해 중국에 판다면 나라와 백성에게 실익을 안겨줄 것이라 했다. 이들의 차를 활용한 부국론은 제안에 불과했지만, 이들의 제안이 실행됐다면 조선 후기 차 문화의 흐름은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해 보다 나은 문화의 유형을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라 점에서 아쉬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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