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붓다가 보여준 존엄한 죽음 (3)

가면 쓰고 변신해 나타나는 죽음불안
죽음은 스승, ‘이 순간’을 살도록 도와

내담자 승희(45·가명) 씨는 쏟아 부은 상담의 노력이 무색할 정도로 변화가 없었다. 분노 조절이 어려워 아이에게 던진 컵이 깨지면서 발바닥을 다쳐 절뚝거리며 상담실을 찾았다. “다쳤으니 병원에 가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내가 왜 이럴까요?”라는 말만 반복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상담 경험이 많지 않을 때 만난 내담자였기에 너무 난감하고 어렵게만 느껴져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야 했고 자신의 말만 옳다고 믿었다. 가족들은 가식적인 평화라도 지키려면 그녀의 말을 따르고 순종해야 했다. 폭군 같은 그녀에게 어렵사리 조언을 건네면 논박하듯 자신의 주장을 다시 길게 설명하며 초보 상담사인 나를 설득하려 했다. 자신의 주장을 굽히면 마치 자신이 죽을 것처럼 대응하며 숨을 강하게 내쉬고 얼굴은 벌겋게 변했다.

마지막 회기가 됐을 때 해결방법을 몰라 발을 동동거리는 심정으로 승희 씨에게 “무엇이 그리 두려운가요?”라고 물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맥락 없는 질문에 스스로 당황하고 있을 때 승희 씨는 잠시 침묵하고선 답했다.

“죽는 게 두려워요.”

죽음불안은 내면 깊은 곳에서 자리하고 있다가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죽음을 느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편하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억압하며 자신의 마음을 가린다. 그렇게 외면했던 죽음불안은 또 다른 욕구로 변신해 사람들의 마음을 부추긴다. 그 결과로 사회집단의 인정, 명성, 영원한 사랑, 외모, 인기, 부유함 등을 쫓게 만든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되어야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은 욕구로 변신해 사람들을 끌고 다닌다. 이것이 애착이 되고 갈애가 된다. 그래서 나는 ‘죽음불안이 집착의 뿌리’라고 단언한다.

“죽음에 대해 정확히 무엇이 무서운가요?”

잠시 질문의 답에 머물러보라. 무엇이 떠오르는가? 외로움, 어둠, 잊혀짐…. 질문을 받고 나면 사람들은 대부분 죽음을 피하고 있는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 이유에 대해 묻고 또 꼬리를 물듯 질문을 이어가면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자신의 삶 속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을 발견한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신의 삶을 조종하는 큰 무의식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다.

위 질문은 실존주의 심리치료의 대가 어빈 얄롬(Irvin D. Yalom)이 내담자들에게 자주했던 질문이다. 얄롬은 죽음에 대해 질문하며 상담했고 내담자들을 치료했다. 그는 죽음에 대한 직면은 삶을 연결하는 열쇠임을 알았다.

그리고 얄롬은 치료 현장에서 내담자에게 소설 <그렌델(Grendel)>을 소개하며 베오울프(Beowulf)가 현자를 만나 지혜를 얻은 가르침을 소개하곤 했다.

“모든 것은 사라진다. 예외는 없다.”

간결한 이 진리는 불자라면 너무나 익숙하다. 붓다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선정의 세계가 묘사된다. 죽음 직전에 부처님은 초선정(初禪定)에 들어갔고 이선정(二禪定), 삼선정(三禪定),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서 멸진정(滅盡定)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비상비비상처로 내려오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사선정(四禪定)에서 열반에 이른다. 사선정은 평온하며 마음 깊이 안정된 높은 알아차림의 경지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 어느 누구가 붓다처럼 평온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일체의 두려움도 고통도 없는 붓다의 죽음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운 순간이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죽음에 대해 깊이 사유할 것을 당부했다. <증일아함경> 제40 칠일품(七日品)에서 붓다는 “너희들은 죽음에 대한 생각을 닦고 죽음에 대해 깊이 사유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어떤 수행승은 붓다에게 “저는 항상 죽음에 대해 생각을 닦고 깊이 사유하고 수행하고 있다”고 답한다. 붓다가 그 수행승에게 방법을 묻자 그 수행승은 “‘이레 동안만 살 수 있다면 칠각의를 사유하며 여래의 법에서 많은 이익을 얻고, 죽은 뒤에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라고 마음을 먹고 있다”고 답했다.

붓다는 그에게 방일하다고 말한다. 다른 수행자들의 답에 대해서도 붓다는 방일하다며 그것은 죽음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고 말한다. 수행자들은 엿새, 닷새, 이틀, 하루, 한 끼 식사 시간 등 짧은 시간들을 제시하며 이 기간 동안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수행할 것이라는 답을 한다. 붓다는 반복해서 내일 죽을 것처럼 열심히 정진하겠다는 그들의 답에 방일하다며 죽음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고 했다.

붓다는 “수행승들이여, 만일 드나드는 호흡 속에서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면 곧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근심, 걱정, 괴로움, 번민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호흡 속에서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호흡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의미한다. 지금 호흡을 하는 이 순간, 잠시라도 죽음이 곁에 있음을 사유하고 죽는다는 것을 받아들여보라. 지금 이 순간을 살지 못하고 마음이 집착으로 괴롭고 어두워질 때 자신의 호흡에 죽음을 초대해 사유해보라. 죽음은 스승이 되어 지금 이 순간을 살게 하고 애착을 끊게 하는 자유의 선물이 될 것이다.

*사례는 내담자 보호를 위해 취지를 손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재정리했습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